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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type="text">햇볕같은이야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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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전하는 교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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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2-05-18T18:38:35+09:00</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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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허태수 목사</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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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전하는 교회&lt;br /&gt;고전1:18-31&lt;/p&gt;
&lt;p&gt;2010.3.7&lt;br /&gt;&lt;br /&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2월 한 달을 [교회]에 맞춰 설교하다보니 길어졌습니다.&lt;br /&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 두 주로 나눠 할까, 점심을 먹고 계속 이어서 할까는 기도중입니다.&lt;br /&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 아마, 점심먹고 이어서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lt;br /&gt;&lt;br /&gt;&lt;br /&gt;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도 성서 또는 예수님의 &apos;말씀&apos;은 싫다고 하지 않습니다. 성현의 훌륭한 가르침이니까요. 그러나 말을 바꿔 &apos;십자가의 말씀&apos;이라고 하면 그 사정은 달라집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에 나온 그대로라면,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받아들이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어리석은 것으로 여깁니다. 바울은 전자를 &apos;구원받은 사람&apos;이라고 하고 후자를 &apos;멸망하는 자들&apos;이라고 했지요(18절). 그러니 뭡니까? 사람이 구원을 받는지 안 받는지 하는 것은 다른 어떤 조건이나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apos;십자가의 말씀&apos;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을 다른 것으로는 판단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가 &apos;십자가의 말씀 앞에 있느냐 없느냐&apos; 만을 따집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사람은 양과 염소로 갈라지는 것입니다.&amp;nbsp;&amp;nbsp;&lt;br /&gt;&lt;br /&gt;문제는 이 세상의 잘난 사람들은 &apos;십자가의 말씀&apos;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apos;십자가의 말씀&apos;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두고 바울은 &apos;하나님이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apos;(20)이라고 하며, &apos;이 세상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지혜안에서 된 일&apos;이라고 풍자적으로 말하기도 했습니다(21). 여기서 바울은 두 가지 지혜 곧 &apos;세상의 지혜&apos;와 &apos;하나님의 지혜&apos;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apos;이 세상의 지혜&apos;를 &apos;멸망할 자들은 이 세상 통치자들의 지혜&apos;와 나란히 두고, 이 세상 통치자들 가운데는 &apos;하나님의 지혜&apos;를 안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2:8). 그러니까 &apos;이 세상의 지혜&apos;와 &apos;하나님의 지혜&apos;를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하면 &apos;예수그리스도와 십자가&apos;라는 뜻이죠. &apos;이 세상의 지혜&apos;를 가진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도저히 구원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구원사건이라고 선포하는 바울의 &apos;십자가의 말씀&apos;을 어리석은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lt;br /&gt;&lt;br /&gt;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이 &apos;어리석은 선포&apos;를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다고 합니다(21). 실제로 그가 했던 &apos;십자가의 예수&apos;선포가 어리석다는 말이 아니라 이 세상의 지혜 있다는 자들 입장에서 볼 때 그렇다는 말이죠. &apos;어리석은 선포&apos;라는 말은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이 세상의 형편에 따라 뜻을 굽히거나 타협하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바울은 복음을, 세상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좋도록 적당히 적용하거나 변경시키지 않고, 그들이 그것을 어리석음이나 미련함으로 여길 정도로 진실하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는 &apos;십자가의 말씀&apos;으로만 복음을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apos;십자가의 말씀&apos;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아보겠습니다.&amp;nbsp;&amp;nbsp; &lt;br /&gt;&amp;nbsp;&amp;nbsp; &lt;br /&gt;&quot;유대 사람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하되,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 전합니다. 이것은 유대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quot;(22-24). 바울이 선포한 복음의 핵심은 &apos;그리스도를 전하되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 전한다&apos;는 말에서 잘 나타납니다(23). 그는 이러한 선포를 유대 사람이 표적을 구하는 것과 그리스 사람이 지혜를 찾는 것과 대조를 시킵니다. 표적을 구하는 유대 사람의 예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를 시험하여서 그에게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한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막8:11).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유대사람의 특징은 그런 게 아닙니다. 또 바울은 &apos;그리스 사람&apos;이라는 말로 특정한 민족을 가리키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가 같은 문장에서 &apos;그리스 사람&apos;을 &apos;이방 사람&apos;과 동의어로 쓰는 것을 보아 그렇습니다(23-24). 바울이 하고자 하는 말의 본심은, 표적을 구하는 유대 사람과 지혜를 구하는 그리스 사람이라는 말로 특정 민족이나 집단을 지칭하려는 게 아니라, 그가 전하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특징적으로 말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고린도 교회 밖에서 바울을 헐뜯고 바울이 전한 것과 다른 것을 전하려고 하는, 이른바 바울의 적대자들과, 그들의 영향을 받아 교회 안에서 물의를 일으킨 이른바 열광주의자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amp;nbsp;&amp;nbsp;&lt;br /&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lt;br /&gt;바울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은 바울이 예루살렘 출신이 아니라는 점과, 예수를 직접 따라다닌 제자가 아니라는 것들을 들어서 바울의 사도자격이 없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때 바울은 &quot;내가 자유인이 아닙니까? 내가 사도가 아닙니까?&quot;(고전9:1)하고 항변 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다시 말하기를, 진정한 사도라면 기적과 기사로 &apos;사도된 증거&apos;를 보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바울은 마지못해 자기가 본 환상과 계시를 말하면서(12:1), 자신도 표적과 기사와 기적으로 사도의 표적을 나타냈다고 합니다(12:12).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추천장이 없다(3:1), 육정을 따라 처신한다(10:2), 말주변이 없다(10:10), 정해진 금 밖으로 나가 선교를 한다(10:13-14), 간교한 속임수로 교인들을 사로잡는다(12:6)고 하면서 바울을 모함합니다.&lt;br /&gt;&amp;nbsp;&amp;nbsp;&lt;br /&gt;이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표적을 구하는 유대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예수를 따른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예수와 아무런 상관도 없이 이 세상 사람들의 기준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apos;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apos;은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움이요 거리낌이었습니다(23). &apos;거리낌&apos;이란 곧 &apos;걸림돌&apos;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만 없으면 잘 갈 수 있는데 그것 때문에 걸려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요. 유대사람들에게는 &apos;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저주를 받은 사람이다&apos;는 믿음이 있었습니다(신21:23, 갈3:13). 그런 그들의 상식으로는 십자가에 달린 사람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것은 있을 수 있어도 &apos;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apos;만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거기서 걸려 넘어졌던 것입니다.&lt;br /&gt;&lt;br /&gt;바울은 그와 같은 적대자들에 대해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들을 &apos;거짓 사도&apos;, &apos;속이는 일꾼&apos;, &apos;그리스도의 사도로 자칭하는 자들&apos;(고후11:13), &apos;하나님의 말씀을 팔아먹고 사는 장사꾼&apos;(2:17), &apos;빛의 일꾼으로 가장한 사탄의 일꾼&apos;(11:14-15)등으로 부르면서 맹렬히 공격합니다. 바울이 그들에 대해서 이렇게 까지 하는 것은 보복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왜곡 시키면서 &apos;다른 예수&apos;, &apos;다른 영&apos;, &apos;다른 복음&apos;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1:4). 그러면 바울이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무엇일까요? 그는 그 자신이나, 예수를 적대시하는 세력보다는,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apos;십자가의 말씀&apos;이나 &apos;그리스도의 복음&apos;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을 복음으로 위장하는 자들, 곧 &apos;다른 복음&apos;을 전하는 자들을 가장 경계한 것입니다. &lt;br /&gt;&lt;br /&gt;갈라디아서에서도 바울은 똑같은 상황에서 &apos;다른 복음&apos;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의 적대자들이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을 선동하여 할례 받는 것을 그리스도인이 되는 조건으로 삼으려고 할 때, 그것은 그가 전한 복음과는 &apos;다른 복음&apos;이라고 합니다(1:6). 바울은 실제로 다른 복음은 없으며 그것은 &apos;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 시키는 것&apos;이라고 합니다(1:7). 그리그 그가 누구든지, 비록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바울이 전한 것과 &apos;다른 복음&apos;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두 번이나 거듭해서 말합니다(1:8-9). 복음을 왜곡 시키는 것이 바울에게는 얼마나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일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lt;br /&gt;&lt;br /&gt;자, 이제 그러면 바울이 그토록 서슬이 시퍼렇게 경계하는 &apos;다른 복음&apos;이란 뭡니까? 그걸 알면 바울이 목숨을 걸고 주장하는 참 &apos;복음&apos;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 기준이 바로 &apos;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apos;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며 내용입니다. 복음이 뭐냐, 그것은 &apos;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예수&apos;입니다. 그 어떤 표적을 행할지라도 &apos;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apos;를 걸림돌로 여긴다면 그들은 복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고린도 교회 안에 있던 [열광주의자들]이었습니다.&amp;nbsp;&amp;nbsp;&lt;br /&gt;&lt;br /&gt;그들은 특히 헬레니즘적인 성령 이해에 빠져서 교회 안에서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면 &apos;헬레니즘&apos;적인 성령이해라는 게 뭐냐? 성령을, 성도들에게 나눠 줄 수 있는 신령한 물질과 같은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신령한 사람으로 믿으면서, 신령한 것에 참여하는데 몰두하여 현실의 삶을 가치 없게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말하기를 &apos;몸은 음행을 위해 있다&apos; &apos;음식도 몸을 위해 있으니 뭐든지 먹을 수 있다&apos;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극단적인 금욕주의로 치닫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기도할 때 외에는 떨어지지 말라고(7:1-7)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들과 같이 신령하지 못한 사람들과 구분을 지었습니다. &lt;br /&gt;&lt;br /&gt;뿐만 아니라 그들은 아주 지적이고 그리고 개인주의적이었습니다. &apos;우리 모두는 지식이 있다&apos;(8:1)는 말이 그들의 구호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무슨 일이든 할 자유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에게나 거리낌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예를 들면, 우상에게 절한 고기를 잘난 척 하면서 먹었습니다. 바울은 &apos;약한 사람들&apos;을 배려하라고 합니다. 이를테면 바울은 지적 자유를 용납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apos;약한 사람들&apos;을 망하게 하고, 형제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며, 그것은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8:9-12)이라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그들은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도 개인주의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서도 방언의 은사처럼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 들 만 선호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방언은 덕이 되지 않았습니다. 남에게 보이려고, 잘난 것을 드러내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14장에서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방언보다는 예언하기를 힘쓰라고 했던 것입니다. &lt;br /&gt;&lt;br /&gt;왜 예언을 하라고 하느냐? 그것은 남에게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남을 돕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12:28). 그리고 각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신 것은 각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잘나게 하려는 게 아니라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12:7). 그들은, 이미 여기에서 신령한 것에 참여하고 있으며, 구원을 받았다는 생각에서, 종말적인 소망도, 죽은 자의 부활도 부정하고 있었습니다(15:12).&lt;br /&gt;&lt;br /&gt;이러한 점들을 볼 때 고린도 교회의 열광주의자들은 개인주의적이고도 관념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이 헬레니즘적 사고의 특성입니다. 헬레니즘적 사고에서는, 성령은 어떠한 형태로든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실체였습니다. 이러한 성령 이해는 2세기 들어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났는데, 그들은 예수님의 선교 목적이 바로 이 성령을 나누어 주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따라서 그 성령을 받는 다는 것은 구원 자체가 되며, 예수는 영적인 것을 나누어준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안에 있었던 문제의 신앙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lt;br /&gt;&lt;br /&gt;바울은 이러한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apos;지혜를 찾는 그리스 사람&apos;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개인주의적이고 관념적인 지식만을 추구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apos;성령&apos;을 개인 소유화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아니라, 신령한 지식으로 인간을 천상의 세계로 이끄는 구세주를 믿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단지 그들의 신비한 지식과, 자유, 방종, 지적 교만을 만족시켜주는 어떤 원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어떤 행동이나 삶을 살지 않아도, 신령한 지식 또는 지혜를 소유하기만 하면 천상에서 구세주와 합일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현세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의미가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apos;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apos;를 아는 것이 &apos;어리석다&apos;고 했던 것입니다(23).&lt;br /&gt;&lt;br /&gt;&amp;nbsp;&amp;nbsp;&lt;br /&gt;&amp;nbsp;&amp;nbsp;&lt;br /&gt;바울이 이런 열광주의자들을 경계하고 비판하는 근거는 하나입니다. &apos;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apos;입니다. &apos;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apos;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신비한 지식을 갖추고 있어도, 아무리 큰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내적으로 완전한 자유를 누린다고 하더라도, &apos;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apos;를 어리석은 것으로 말한다면 그는 복음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amp;nbsp;&amp;nbsp;&lt;br /&gt;&lt;br /&gt;표적을 구하는 유대사람이나 지혜를 찾는 그리스 사람은 분명 서로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둘 다, 입으로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인간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이 좋아하는 대상을 섬기고 있다는 점에서, &apos;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apos;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어떤 유별난 존재로 서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들을 &apos;이 세상&apos; 또는 &apos;이 세상의 통치자들&apos;과 나란히 둠으로써 이러한 자들이 이 세상을 차지하고 있는 자들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1:21, 2:6). 이런 사람들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 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는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만을 전하려고 했을 때, 두려워하고, 떨면서 성령의 능력으로 증거 했다는 증언은 이런 점에서 이해 할 수 있습니다(2:1-5).&lt;br /&gt;&lt;br /&gt;적어도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그것은 &apos;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믿는다&apos;고 해야 맞습니다. 여러 추측 가능한, 해석한 가능한 &apos;어떤 예수&apos;를 믿는 것은 &apos;믿는다&apos;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의 믿음일 뿐입니다.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apos;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apos;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바울은 그들을 &apos;부르심을 입은 사람들&apos;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apos;부르심을 받은 사람들&apos;에게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합니다(1:24). &apos;부르심을 받은 사람들&apos;이라는 말은 이 세상 사람들이 구분하는 것과는 다르게 사람을 구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로지 &apos;부르심을 받은 사람&apos;과 &apos;부르심을 받지 못한 사람&apos;만 이 세상에 있을 뿐이었습니다. &apos;부르심을 받은 사람&apos;이라는 말이 &apos;교회&apos;의 어원입니다(1:1, 24-26). &apos;부르심을 받은 사람들&apos;의 특징은 단 하나입니다. &apos;십자가에 달린 예수&apos;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느냐 아니냐 입니다. &lt;br /&gt;&lt;br /&gt;자, 이제 본문 26-28의 말씀을 찬찬히 읽어 읽어봅시다. 여기서 오늘 우리의 이야기는 결론을 갖게 됩니다. 깨달음이 시작되는 곳이라는 말입니다.&amp;nbsp;&amp;nbsp;&lt;br /&gt;&lt;br /&gt;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시작할 당시에 &apos;부르심을 입은 사람들&apos;이 어떤 사람들인지 밝히고 있지요(26). 그들은 대부분 배우지 못하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서는 이들을 &apos;멸시 받는 것&apos;이라고 했습니다. &apos;사람&apos; 축에도 들지 못합니다. 그냥 &apos;것&apos;입니다. 물건입니다. 그 단어들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데도 &apos;사람&apos;이라고 하지 않고 사물을 나타내는 중성복수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교회의 주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스스로 그들 자신이 잘나서 그렇게 되었다고 할 수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니 &apos;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내셨다&apos;고 밖에는 달리 말 할 게 없었지요. 그런데 그들이 그와 같이 된 것은 &apos;하나님의 뜻&apos;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뭔 뜻이 있었기에 그런 사람들이 뽑혀 교회를 이뤘던 것일까요? 27-28에 보면, 세상의 어리석은 것, 약한 것, 비천 한 것,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신 것은, 그토록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그들을 통하여 잘난 사람들을 없애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apos;사람&apos;을 없애려는 게 아니라 그렇게 차별지우며 사는 세상의 법을 없애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apos;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apos;의 일이었으며,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lt;br /&gt;&lt;br /&gt;&apos;부르심을 받은 사람들&apos;은 이렇게 그 역할에서 뿐만 아니라, 신분에서도 세상이 주지 못하는, 세상과는 다른 신분을 부여받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이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었고,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이룩된 구원의 현실이었습니다. 사람을 가진 것과, 배운 것과, 출신을 따라 차별하고 무시하는 이 세상과는 달리 오히려 세상을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을 부르시고 선택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이 가장 결정적으로 잘 나타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바울이 이해하는 &apos;십자가에 달리신 예수&apos;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그 법, &apos;예수가 십자가에 달림으로&apos;만들어진 그 &apos;십자가의 법&apos;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게 바울에게 &apos;복음&apos;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apos;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apos;를 전하지 않는 것, 조금 더 확장 해석하면,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고백하기 어려운 세상의 관성이 있다는 측면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부르심을 입지 않고서는 &apos;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apos;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lt;br /&gt;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인간 일반의 내면적인 속죄를 위한 어떤 사건으로만 한정짓고 추상화 시켜서는 안 됩니다. 바로 그 사건에서, 인간 일반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인격적인 대우도 받지 못하는 것들, 사람 취급도 당하지 못하는 사람들, &apos;아무 것도 아닌 것들&apos;을 택하시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현장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apos;복음&apos;으로 받아들여 믿고, 우리도 그렇게 사람과의 관계에서 실행하며 사는 것입니다.&amp;nbsp;&amp;nbsp; &lt;br /&gt;&lt;br /&gt;교회는 늘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들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늘 &apos;십자가의 말씀&apos; 앞에 자신을 세우게 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 배운 사람과 배우지 못한 사람, 출신이 좋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세상 기준에 따라서 넌지시 갈라놓고, 그런 기준 앞에다가 &apos;십자가의 말씀&apos;을 적당히 적용시키고 있지 않은지 반성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apos;그리스도의 복음&apos;이 아니라 복음을 왜곡하는 다른 복음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lt;br /&gt;&lt;br /&gt;바울 시대에는 유대 사람이 표적을 구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은 교회가 더 그런 것들을 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많은 교회가 &apos;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apos;는 그저 추상적인 속죄론의 의미로 간소화해버리고, 표적과 기적을 경험하거나 일으키는 것이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을 가늠하는 척도인양 여긴다면, 그것은 &apos;다름 복음&apos;으로 가는 중에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 성령의 은사를 수단화해서 특정 기도원이나 특정 부흥사한테 가야만 이런저런 은사를 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거나, 그렇게 하는 것만이 믿음의 증표인양 하고, 구원받은 증거라고 한다면, 이 또한 &apos;십자가의 복음&apos;을 위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교회가, 교우들이, 그것도 믿음이 좋다고 소문난 교회가, 칭찬이 자자한 그리스도인이 더 앞장서서 저지르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표적과 기사와 기적, 그리고 성령의 선물은, &apos;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apos;를 고백하고 따르고 사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지, 인간적인 욕심에서 구할 어떤 대상이 아닙니다.&lt;br /&gt;&lt;br /&gt;지혜를 찾는 그리스 사람이 오늘날에도 교회에 있습니다. 복음을 자꾸만 현실의 삶으로부터 유리시켜서 해석하여,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내세적, 천상적인 일에만 관심을 쏟게 하고 현실의 문제에 소극적이게 하거나 무책임하게 하는 것, 또한 역사의식을 갖고 살지 않게 하는 것은, 현대판 영지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지혜는 사람을 개인주의로 만들거나 관념론적인 내세주의자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것은 &apos;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apos;를 아는 지식이자 지혜이므로, 이 세상 속에서, 용기 있게 살고, 사랑하며 살도록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lt;br /&gt;&lt;br /&gt;&apos;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apos;를 주로 고백하는 것, &apos;그리스도의 복음&apos;을 따라서 사는 것은 추상적인 게 아닙니다. 심령적인 게 아닙니다. 내면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가진 것 없고 배운 것도 없고 가문도 변변치 않은 사람들, 곧 &apos;아무 것도 아닌 것들&apos;을 불러서 자녀 삼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나도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아무 자격도 없는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입어 신분이 달라진 것처럼, 나도 이 세상을 변화 시키고 사랑하는 일에 참여하며 사는 것이 &apos;십자가의 복음&apos;인 것입니다. &lt;br /&gt;&lt;br /&gt;이 세상에서 &apos;아무것도 아닌 것들&apos;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받고, 의롭다 여김을 받고, 거룩하다 여김을 받는 것이 곧 신앙의 신비입니다. 그것이 &apos;십자가의 복음&apos;인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것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lt;br /&gt;&lt;br /&gt;&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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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우리가 그리스도의 &apos;몸&apos;이라는 뜻</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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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2-05-18T18:36:57+09:00</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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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허태수 목사</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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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우리가 그리스도의 &apos;몸&apos;이라는 뜻&lt;br /&gt;고전12:12-27&lt;br /&gt;&lt;br /&gt;지난주일 저녁에는 &apos;老稼齊&apos;(정세환 장로의 별장)에서 여러 명의 목사들이 모여 밤을 새워 가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아마 새벽 2시30분 까지는 이야기가 계속되었을 겁니다. 비슷한 성향을 가진 이들이 모였기 때문에 대화는 아주 유익했습니다. 먼동이 터 올 무렵까지 이어진 이야기의 중심은 &apos;교회&apos;였습니다. &apos;교회란 뭔가?&apos;, &apos;오늘 교회는 제 구실을 하고 있는가&apos; 하는 물음들은 우리가 이번 2월 달 내내 성서를 통해 답을 구하고 있던 물음이기도 했습니다. &lt;br /&gt;&lt;br /&gt;예수님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노예 신분 철학자인 에픽테투스는 &quot;당신은 세계의 시민이며 세계의 한 부분이다. 누구나 이성을 갖고 있고 자연의 질서를 이해한다면 손이나 발이 하는 것과 같이 행동하여야 한다.&quot;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사회는 황제, 귀족, 평민, 노예가 피라미드 구조를 이루고 있는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회 속에서 귀족이나 평민이나 전체로서 다 한 몸이라는 선언이나 말은 대단한 체제전복적인 발언입니다. 스토아 철학자인 세네카(Seneca)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quot;당신이 보고 있는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다. 우리는 거대한 몸의 지체들이다.&quot;&lt;br /&gt;&lt;br /&gt;그러나 이렇게 근사한 말이나 이념도 누가 그걸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완전이 그 뜻이 뒤바뀝니다. 철학자들이 하고자했던 의도가 무엇이든지간에 로마의 통치자들은 이 말을 어떻게 썼는지 아십니까? 이 &apos;몸과 지체의 비유&apos;를 가지고 자신들의 통치를 합리화 했습니다. 그들은 불만이 가득한 평민들과 반항심이 가득한 노예들을 이렇게 설득했습니다. &apos;우리는 귀족이든 평민이든 노예든 다 같은 지체이며 전체로 한 몸으로 이루어진 관계다. 그러니 여러분이 우리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봉사하면 그것이 곧 여러분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apos; 실제로 B.C. 494년 경 메네니우스 아그립바는 당시에 유행하던 &apos;몸과 지체의 비유&apos;를 이런 식으로 사용하여 불만 계층을 설득했습니다. 이건 속임수입니다. 평민이나 노예들을 &apos;영혼을 가진 도구&apos;정도로나 알고 있던 시대에 이 말뜻이 진심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apos;몸과 지체의 비유&apos;가 성경에도 나온다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quot;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한 몸임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합니다&quot;(12절).&lt;br /&gt;&lt;br /&gt;바울 사도의 이 비유는 앞에서 말한 스토아 철학자들의 비유들과 형식상 비슷합니다. 그러면 바울도 로마의 통치자들이 속임수로 했던 것과 유사한 의미로 이 말을 썼는가 하는 것이죠. 좀 더 바울의 비유를 들어 보십시다.&lt;br /&gt;&lt;br /&gt;&quot;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여러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발이 말하기를 &apos;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속한 것이 아니다&apos;한다고 해서 발이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또 귀가 말하기를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속한 것이 아니다&apos;한다고 해서 귀가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quot;(14-16).&lt;br /&gt;&lt;br /&gt;손이 무엇을 잡으려고 하면 발은 동시적으로 그것을 향해 걸어가기 마련입니다. 귀에 어떤 소리가 들리면 눈은 자동적으로 소리의 방향을 쫓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발과 손, 눈과 귀는 대립하지 않고 더불어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게 뻔한 이치를 본문에서는 전혀 다르게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대립하는 기능처럼 표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그동안 이 사실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취급했습니다. 이 비유는 &apos;차별&apos;이 아니라 &apos;차이&apos;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개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lt;br /&gt;&lt;br /&gt;고린도 교회를 시작하던 처음에 부르심을 받아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그 사회의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고전1:26-28).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구성원이 교회에 들어왔을 때, 가진 사람들이나 많이 배운 사람들이 물의를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분열의 위기에 까지 몰렸습니다. 예를 들면, 교우들이 친교를 나누고 하나를 이루어야 할 공동식사 자리에서, 가진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잔뜩 먹고 취했습니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들은 배고파했습니다(11:21). 또 많이 배워 유식한 사람들은 무식한 사람들을 깔보고 제멋대로 행동했습니다. 바울이 &apos;약한 사람들&apos;이라고 하는 이들은 이교도였다가 기독교로 개종하여 교회에 들어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매사가 불안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우상의 제물로 바친 고기를 앞에 놓고서도 두려워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배운 사람들은 우상 따위는 상관이 없다고 하면서 모든 것에 대해서 자유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quot;음식은 배를 위한 것이고, 배는 음식을 위한 것이다&quot;(6:12, 10:23), &quot;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는 것은 음식이 아니다&quot;(8:8)등등의 말을 구호처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lt;br /&gt;&lt;br /&gt;바울은 이런 구호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구호가 틀렸는지 맞았는지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그와 같은 신앙 인식을 동의하고 있는 듯 보여 집니다. 바울이 문제를 삼는 것은, &apos;약한 사람들&apos;을 무시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그들의 행동이었습니다. 바울은 가진 사람이나 못 가진 사람,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의 어느 편도 들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apos;여러분은 모두 한 몸의 지체이니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여 조화를 이루어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apos;고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런 중재는 둘 다를 아우르겠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가진 사람들을 꾸짖습니다. 약한 사람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체들 간의 &apos;차이&apos;를 무마하려는 게 아니라, &apos;차별&apos;을 극복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quot;너는 네게 쓸데가 없다&quot;(21절).&lt;br /&gt;&lt;br /&gt;이것은 바울이 의인법으로 표현한 어느 지체의 말을 빌려온 것입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한 게 아니라 그런 말이 교회 안에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우들 간에 노골적인 반목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바울은 계속 교우들에게 권고합니다. &lt;br /&gt;&lt;br /&gt;&quot;그러므로 눈이 손에게 말하기를 &apos;너는 내게 쓸데가 없다&apos;할 수 없고, 머리가 말하기를 &apos;너는 내게 쓸데가 없다&apos;할 수 없습니다&quot;(21).&lt;br /&gt;&lt;br /&gt;다른 사람을 향해서 &apos;너는 내게 쓸데가 없다&apos;고 말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계속 말합니다. &lt;br /&gt;&lt;br /&gt;&quot;그뿐만 아니라, 사람이 몸 가운데서 더 약하다고 여기는 지체가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quot;(22).&lt;br /&gt;&lt;br /&gt;&apos;약하지만 요긴한 지체&apos;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신체의 어느 부위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어떤 사정이나 형편을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평소에는 요긴하게 생각지 않았던 손가락이 다쳤을 때, 절실히 손가락의 중요성을 깨닫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신체 부위 중에서 &apos;손가락&apos;이 가장 중요한 부위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뭡니까? 바울의 다음 말이 그것을 분명하게 해줍니다. &lt;br /&gt;&lt;br /&gt;&quot;그리고 몸 가운데서 덜 귀하다고 생각하는 지체들은 더욱 귀한 것으로 입히고, 볼품없는 지체들을 더욱더 아름답게 꾸며 줍니다&quot;(23절).&lt;br /&gt;&lt;br /&gt;약하다고 여기는 사람을 더 요긴하게 여기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덜 귀하게 여기는 지체들을 귀한 것으로 돌보고 보호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볼품없는 사람을 아름답게 꾸며주려는 이가 어디 있습니까? 사람들은 발보다는 손을 더 가꾸며, 귀보다는 눈을 더 치장하며, 발보다는 얼굴을 더 화려하게 꾸미지 않습니까? &lt;br /&gt;&lt;br /&gt;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파격적인 언어를 읽어야 합니다. 이걸 읽지 못하니까&amp;nbsp;&amp;nbsp;지금까지 바울이 하고자 하는 말이, 공동체의 불화를 무마하려는 아그립바 왕의 정치적인 전술쯤으로 생각을 합니다. 급기야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타협주의자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타협이란 이 세상의 상식선을 고수하는 것을 목표로 할 때 지어내는 꾀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 말은 그런 세상의 고질적인 문제가 교회 안에서 생겼으니 그냥 덮고 가자는 게 아닙니다. &lt;br /&gt;&lt;br /&gt;바울은 이 세상의 그러한 현실을, 인간들의 문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이세상의 상식에서 어떤 타협점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약하고 부족한 지체에게 아무런 조건이나 이유도 없이 더 큰 존귀함을 주는 하나님의 사랑, 아래로부터의 사랑, 상식적이 아니라 파괴적인 그 사랑에서 문제의 해결책을 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그의 계속되는 말에서 더욱 분명해 집니다. &lt;br /&gt;&lt;br /&gt;&quot;그러나 아름다운 지체들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몸을 골고루 짜 맞추셔서 부족한 지체에게 더 큰 존귀함을 주셨습니다&quot;(24).&lt;br /&gt;&lt;br /&gt;아름다운 지체는 더 꾸미고 부족한 지체는 소홀히 하는 것이 세상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의 내용은 그런 상식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앞에서 사용한 것과는 다른 주어 &apos;하나님께서는&apos; 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주어를 사용함으로써 바울은, 부족한 지체에게 더 큰 존귀함을 주는 것은, 실제적으로 신체 기관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이 세상 사람들의 상식이 아니라, 그런 것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뜻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가진 사람과 지식이 있는 사람이 그러하지 못한 사람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고린도교회의 상황에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약한 지체를 무시하여 &quot;너는 내게 쓸모가 없다&quot;고 함부로 말하는 강한 지체들을 꾸짖으며 반성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약한 지체의 권리를 복권하여 진정으로 소중하게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겉으로만 하나처럼 보이는 위선적인 일치가 아니라, 속까지 하나가 되어서 한 몸을 이루는 운명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lt;br /&gt;&lt;br /&gt;&quot;그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게 하시고, 지체들이 서로 같이 걱정하게 하셨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같이 고통을 당합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quot;(25-26).&lt;br /&gt;&lt;br /&gt;여기에서 &apos;그래서&apos;라는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 이후에 나오는 내용은 이 단어 앞에 나오는 내용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즉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하나가 되는 일, 지체들이 서로 같이 걱정을 하게 되는 일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앞의 내용, 곧 아름다운 지체는 더 존귀하게 대접하는 그런 파격적인 사랑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이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파될 때 사람들은 고통도 함께 하고 영광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lt;br /&gt;&lt;br /&gt;&quot;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입니다.&quot;(27절).&lt;br /&gt;&lt;br /&gt;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죄 많고 흠투성이인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게 아니라, 그들이 어떤 이유에서든지 다른 사람에게 &quot;너는 쓸데가 없다&quot;고 말하지 않을 때,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배운 사람이 배우지 못한 사람을, 잘난 사람이 못난 사람을 깔보지 않고(경우의 상황을 더 확장하여 설명해야 함)더불어 한 몸을 이루는 소중한 지체로 여길 때, 그리하여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하는 운명 공동체를 이룰 때,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lt;br /&gt;&lt;br /&gt;오늘 교회의 문제는 크냐 작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느냐 못 이루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걸 바울도 2000년 전에 말하고 있던 것입니다.&amp;nbsp;&amp;nbsp;&lt;br /&gt;&lt;!-- 내용이 끝나는 곳입니다.--&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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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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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2-05-18T18:35:16+09:00</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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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허태수 목사</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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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情&lt;br /&gt;마23:37&lt;br /&gt;2010.2.14 &lt;br /&gt;&lt;br /&gt;[情]은 군인들이 좋아 한다는 간식용 과자의 이름입니다. 그동안 저는 개인적으로는 너무 달아서 잘 먹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달콤한 게 입에서 당기면서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과자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情]이라는 단어의 뜻이 예수님의 정체성과 같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오늘은 구정 명절이라서 들고났던 가족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이는 날이 아닙니까? 그 회집의 구심력이 바로 [情]인 것입니다. 가족 간의 [情]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情]은 보편적으로 [母情]즉 어머니의 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정이 왜 없겠습니까 만은, [夫情]은 아예 그 단어조차 상용화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정과는 반대인 경우가 허다합니다.&amp;nbsp;&amp;nbsp;&lt;br /&gt;&lt;br /&gt;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본문은 예수님이 죽을 줄 알면서도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보고 탄식하면서 하신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지금까지 자신이 해 온 일을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에 품은 것에 비유를 합니다. 조금 뜻밖이지 않습니까? 가부장적인 그리스도상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문장입니다. &apos;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apos;하는 식으로 여성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상을 갖고 있는 사람은 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 이것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앞에 둔 한 인간의 가장 진지한 자기 정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구약성서에도 나옵니다.&amp;nbsp;&amp;nbsp;&lt;br /&gt;&lt;br /&gt;&quot;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뒤 흔들고 새끼들 위에서 퍼덕이며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받아 그 날개 위에 업어 나르듯이 주께서만 홀로 그 백성을 인도하셨다&quot;(신32:11-12).&lt;br /&gt;&lt;br /&gt;&quot;새가 그 날개를 펴고 둥지의 새끼를 보호하듯이 만군의 주께서 예루살렘을 보호하신다&quot;(사31:5).&lt;br /&gt;&lt;br /&gt;이 구절들을 앞의 마태복음과 비교해 보면, 암탉 대신에 독수리나 새를 비유한 것 말고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상은 새끼를 보호하는 어미새와 같은, 모성적인, 어머니와 같은 상이 아닙니까?&amp;nbsp;&amp;nbsp;&lt;br /&gt;&lt;br /&gt;이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좀 낯선 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한 아버지 하나님 상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더 친근한 표현으로 &apos;아바 아버지&apos;라고 했습니다(막14:36). 이 호칭은 우리말로 &apos;아빠&apos;를 뜻합니다. 그러니 이 &apos;아빠&apos;라는 호칭은 가부장적인 의미의 &apos;아버지&apos;와는 다른 것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을 이렇게 부름으로써 친근한 아버지로서의 상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아버지가 곧 신이라고 여기던 당시의 가부장제도에 정면으로 반대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인간에 불과한 아버지의 권위는 약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quot;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다(마10:37)는 예수님의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자신의 육신의 아버지를 신처럼 떠받드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이었습니다. &lt;br /&gt;&lt;br /&gt;예수님은 구약성서에 나타난 모성적인 하나님 상을 받아 들였을 뿐만 아니라 새롭게 해석 하였습니다. 본문으로 읽은 &apos;암탉&apos;은 &apos;새&apos;라는 의미도 됩니다. 예수님은, 구약성서에서 새끼를 보호하는 어미 새의 일에 비유한 하나님의 일을 자신의 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나아가서 그는 자신의 일을 새롭게 이해합니다. 구약성서는 하나님의 활동을 독수리의 웅장한 날갯짓에 비유했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하는 일이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에 품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함으로써, 그동안 자신이 해 온 그 많은 일들이, 사람들을 지배하고 그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대신에 그의 삶은, 그가 한 일은 사람들을 어머니처럼 감싸고 보호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lt;br /&gt;&amp;nbsp;&amp;nbsp;&lt;br /&gt;어릴 때 기억이 납니다. 봄에 어미닭이 알을 부화해서 수 십 마리의 병아리를 데리고 종종거리며 들판을 다니면 독수리나 매가 병아리를 채 가려고 하늘을 빙빙 돕니다. 그러면 긴급하게 소리를 질러 어미의 품안으로 그 많은 병아리들을 모아들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는가 하면, 양지쪽 흙더미를 뒷발질로 파 헤쳐 병아리들에게 먹이를 찾아 주던 모습도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병아리를 품고 있는 어미닭은 연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미닭의 강함은 병아리들을 위할 때만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런 존재임을 그의 생애 마지막 현장에서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복음서의 면면은 이런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정신이며, 교회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무슨 죄를 졌는지 잘 모르는, 죄인으로 불리는 어떤 여인은 예수님이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서 식사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 집 주인의 냉대를 무릅쓰고 예수를 찾아옵니다. 그는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바릅니다(눅7:37). 집 주인인 바리새인의 입장에서도 난처하기 그지없고, 기분 나쁜 행동인 것입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이런 행동은 보통의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왜 그런 행동을 해야만 했을까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예수님은 그렇게 말도 되지 않은 행동을 해도 받아 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이것은 마치 어린 시절에 필요한 용돈을 받기 위해 어머니에게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손 내밀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주머니보다 어머니의 정을 더 믿었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그렇다고 어머니가 고분고분 내 기분이 상하지 않게 그렇게 용돈을 내 주시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했던 이유는 그래도 어머니가 나를 잘 받아 줄 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lt;br /&gt;&lt;br /&gt;예수님을 찾아와서 그런 낯선 행동을 하는 여인도 그랬을 것입니다. 딱히 예수님과 그녀는 특별한 관계였던 게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예수님은 그녀의 그런 행동을 받아 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와 함께라면 사는 맛이 나고, 속에 있는 것조차 다 털어 놓고 싶어지는 그런 사람이었던 게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심판하고, 꾸짖고, 따져대는 그런 무서운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병아리를 품는 암탉의 날개 속 같은, 그런 품이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런 면을 딱 꼬집어 표현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 있을까요? 흔히 &apos;사랑&apos;이라는 말로 표현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다 담아내지 못하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오늘 [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정이 있는 사람은 상대방에게서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는 그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작은 느낌까지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정은 그런 것입니다. 그는 꼭 누가 옳고 그르냐를 따지기보다는 누가 더 소외되거나 상처를 받지 않는지 배려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합리적이거나 이해 타산적이기보다는 인간적인 끈끈함을 느끼게 해 주는 사람입니다. &apos;한 번 주면 정 없다&apos;는 말이 있듯이, 정이 있는 사람에게는 밥이 얼마만큼, 몇 그램을 주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한 술이라도 더 주려는 마음, 그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lt;br /&gt;&lt;br /&gt;어느 가난한 여인이 렙돈 두 닢, 곧 한 고드란트를 헌금함에 넣는 것을 보고, 예수님은 그가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말씀 한 적이 있습니다(막12:43). 다들 넉넉한 가운데 얼마씩을 떼어 넣었지만, 그 여인은 가난한 가운데 모든 것을 털어 넣었다는 것입니다. 고드란트는 요즘 돈으로 5원 정도의 액수입니다. 우리도 아마 5원을 헌금 통에 넣으려면 무척 망설이게 될 것이고, 주위를 둘러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걸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는 것도 바로 그 [情]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apos;마음 씀&apos; 말입니다. 이게 오늘날 우리가 하는 헌금의 정신이며 태도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lt;br /&gt;&lt;br /&gt;어느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가 든 옥합을 깨트려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을 때, 곁에 있던 사람들은 너나없이 그 여자가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화를 냈습니다. 그걸 삼백데나리온 이상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줘도 된다고, 합리적인 이유로 그 여인을 비난했습니다(막14:5). 이것은 노동자 일 년 치 연봉과 맞먹는 금액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십니다. &apos;아름다운 일이다&apos;고 하십니다. 겉으로는 &apos;장례&apos; 운운 하지만 속내는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짚고 있는 것은 그 여자의 마음이었습니다. 마음보다 크고 귀한 것은 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인을 배려하는 그 정 깊음이 이야기 전체에 흐르고 있지 않습니까?&lt;br /&gt;&lt;br /&gt;예수님의 모습이나, 삶 어디에도 강하고 뛰어나고 능력이 있어서 남을 지배하고 훈계하는, 까다롭고도 엄한 아버지 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요즘 시중에 &apos;성공한 CEO 예수&apos;라든지, &apos;경영자 예수&apos;같은 도서들이 나돌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한낱 상술에 해당하는 것이지 본시 예수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님은 우리의 어머니처럼, 작은 일도 세심하게 배려하며, 늘 감싸주고, 편들어 주는 분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마음열고 다가가 가슴 속에 있는 것들을 털어 놓게 하는 분입니다. 한마디로 정이 참 많은 분이라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어릴 적에, 암탉이 병아리를 몰고 다니다가 목이 마르면 물가로 갑니다. 그러고는 암탉이 먼저 물을 한 모금 머금고는 머리를 하늘로 쳐들죠. 그러면 그 노랗고 까만 병아리들이 어미를 따라 새싹 같은 부리로 물을 쪼아 머리를 하늘로 쳐들곤 했습니다. 초등학교에 갔을 때, &apos;물 한 모금 입에 물고....하늘 한 번 쳐다보고&apos;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마치 내가 병아리가 되어 어미를 조롱조롱 따라 다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무슨 생각이 드는가 하면, 어미닭을 따라다니며 물을 먹고 모이를 쪼아 먹는 저 병아리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싶었습니다. 때론 양지쪽에 어미닭이 병아리들을 품고 졸고 있는 모습에서도 무한한 행복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에서 저렇게 행복하고 따뜻한 품과 장면은 없을 거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lt;br /&gt;&lt;br /&gt;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을 그런 암탉에 비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랑]보다도 [정]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우리나라에 계셨더라면 [사랑]보다는 [정]이라는 말이나 비유를 하셨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내 기독교 신앙관이 뭐냐고 물으면 저는 [정 나누기]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서 이루시려는 나라가 아니었습니까? 이것이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세워가야 할 교회도 이것입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품어 보호하고 키우듯, 그 품속에서 신뢰와 행복이 싹트듯, 무한한 정을 통해 이루는 기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가족 또한 [情]으로 이루어진 생명 공동체 아닙니까? 혈연을 넘어 그리스도이름으로 하나 된 신성 가족인 [교회]또한 [情]을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걸 확인하는 날인 것입니다.&amp;nbsp;&amp;nbsp;&lt;br /&gt;&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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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봄바람 같은 예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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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2-05-18T18:33:40+09:00</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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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허태수 목사</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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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봄바람 같은 예수&lt;br /&gt;막2:18-22&lt;br /&gt;2010.2.7&lt;/p&gt;
&lt;p&gt;&lt;br /&gt;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 와서, &quot;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제자들은 금식 하는데,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quot;하고 물었습니다(18). 물론 그들이 누군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과 마찰을 빚고 있는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아니라,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16,24). 그들은, 예수님이 세리들과 죄인(여기서 말하는 &apos;죄인&apos;은 당시의 바리새파나 율법학자들이 만들어낸 수많은 규칙을 따라 살 수 없는 연약한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이지, 실제로 인간관계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apos;관계를 깨뜨리는&apos;어긋난 행위를 한 이들이 아니다)들과 어울려서 한 자리에서 음식을 먹는 일이나,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일, 그리고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자른 일 등을 문제를 삼았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도, 그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거나 또는 그들과 같은 입장에&amp;nbsp;&amp;nbsp;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lt;br /&gt;&lt;br /&gt;그들이,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을 그들과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한데 묶은 것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입니다. 그 두 집단은, 금식을 한다는 거 말고는, 한데 묶일 수 있는 그런 공통점이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제자들과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두 집단을 한데 묶어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대조시킴으로써, &apos;너나 할 것 없이 다들 금식 하는데 왜 당신들만 안 하느냐&apos;는 식으로 몰고 가려는 것입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공박할 때 이런 식으로 하지요? &lt;br /&gt;&lt;br /&gt;그들은, 겉으로는 금식을 문제 삼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게 아닙니다. 그것은 구실일 뿐입니다. 진짜 문제는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예수님과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자주 이런 장면을 목격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비난 받는(이른바 죄인들)사람들과 밥을 먹을 때 그걸 문제 삼는 장면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고 생각을 하겠지만, 예수님이 그렇게 한다는 것은 당시의 율법이 정한 종교사회적인 가치관을 부정하고 저항하는 일이 됩니다. 그러니 그걸 가만 두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정을 잘 묘사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quot;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 너희가 말하기를 &apos;그는 귀신이 들렸다&apos;하고,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기도 하니, 너희가 말하기를 &apos;보아라 저 사람은 먹보요, 술꾼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구나&apos; 한다&quot;(눅7:33-34). 세례자 요한은 금식을 했고, 예수님은 금식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말은 두 사람을 모두 싸잡아 비난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금식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처신이 거슬렸던 것입니다. &lt;br /&gt;&lt;br /&gt;예수님은 시비를 거는 그들의 중심이 뭔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9절을 대뜸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quot;혼인 잔치에 온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금식할 수 있느냐?&quot;(19).&lt;br /&gt;&lt;br /&gt;예수님은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혼인 잔치에 비유합니다. 아무리 속상한 일이 있거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도 혼인집에 가서 금식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혼인집에 가서 손을 씻고 왔는지 아닌지를 검사하고 면박을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잔치판을 깨는 나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자신이 세리들과 죄인들과 같이 밥을 먹는 일이 마치 &apos;혼인 잔치&apos;와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님의 비유 중에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비유가 있다면 오늘 우리가 읽은 &apos;잔치집&apos;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모든 삶과 가치를 한 번에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apos;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시는 일&apos;이기도 했습니다. 이걸 안다면, 이게 예수님이 할 일이라는 걸 안다면 &apos;금식을&amp;nbsp;&amp;nbsp;했느니 어쩌느니&apos;하는 시비는 필요치 않습니다. &lt;br /&gt;&lt;br /&gt;어쩌면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apos;혼인 잔치의 비유&apos;를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릅니다. 그동안 기독교가 기득권의 종교가 되어서 일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다가 요즘 우리가 하는 결혼이라는 게 이런 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옛날처럼 온 동네 사람들이 며칠 동안 먹고 흥겹게 지내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어울린 잔치 자리는 흡사 옛날의 혼인 풍경이었을 것입니다. &lt;br /&gt;&lt;br /&gt;그러면,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그토록 기뻐하고 즐거워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맛있는 음식, 술 때문이었을까요? 그걸 여러 날 그렇게 먹을 수 있어서였을까요? 아닐 겁니다. 세상에서 멸시 받던 그들을 예수님이 받아들이고, 그들 속에 갇혀 있던 삶의 기쁨을 드러나게 해 주어서였을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들을 얼마나 무시 했던지, 기도하면서 &quot;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이 세리와도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 씩 금식합니다.&quot;(눅18:11-12)하고 했을 정도입니다. 그들은 그러면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분리하였습니다. 그런 세력들 앞에서 그들은 주눅 들어 기를 펴고 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받아 주셨을 뿐만 아니라 &apos;의롭다&apos;고 인정하였습니다(눅18:13-14). 그리고 하나님 나라 운동의 주인공들로 세웠습니다(마21:31). 그들과 친구도 되어 주었습니다(마11:19, 눅7:34). 그들은 비로소 예수와 함께 지내면서 사람이 된 듯 했습니다. 기가 살아나고 기쁨이 넘쳤습니다.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열등하게 취급을 했었는데, 그 때 부터는 선하고, 소중하며, 기쁜 자신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지금이나 예나 자기를 알아주고 높여주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amp;nbsp;&amp;nbsp; &lt;br /&gt;&amp;nbsp;&amp;nbsp;&lt;br /&gt;뭔가에 의해 짓눌리고 덮였던 것들이 확 걷히는 그런 일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동안에 일어난 것입니다. 추운 겨울이 가고 새싹들이 터 오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생의 봄, 영혼의 봄이 예수로부터 불어왔던 것입니다. 그들은 비로소 자기 자신과, 세상과, 삶과, 그들의 가난을 다시보기 시작했습니다. 봄이란, 이렇게 본다고 [봄]인 것입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에게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은 차가운 겨울바람이고 매서운 눈이었을 것입니다. 그들 앞에서 그들은 점점 움츠러들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있어서 [봄]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여인은 하지 말아야 행동을 예수님에게 서슴치 않고 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추위를 몰아내고, 눈을 녹이고, 얼었던 것을 풀리게 하고, 활짝 펴는 거, 거기서 아름다운 향기를 드러내는 게 봄 아닙니까? 그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서 그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존재입니다. 이게 또한 교회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세상을 보고, 자기 자신도 잘 들여다보고, 인생의 종착점도 보고, 웅크려진 마음도 펴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향기를 드러내게 하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의 삶이고, 그 삶을 이어받은 우리들의 과제인 것입니다. 사람이나 자연이나 이렇게 봄바람이 불어오면 그 무엇으로도 막지 못합니다.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이전에 감추고 싶었던 것들을 일부러라도 드러내게 됩니다. 속 깊은 곳에서 싹트는 기쁨을 억누를 수 없는 것입니다. 김상미 라는 시인은 봄을 이렇게 노래합니다.&lt;br /&gt;&lt;br /&gt;봄은 그래&lt;br /&gt;기쁨을 절대로 억제하지 않아&lt;br /&gt;조용 조용 가만 가만&lt;br /&gt;무엇이든 드러내려고 해&lt;br /&gt;&lt;br /&gt;잔치 날 신랑 신부는 즐거움과 기쁨을 감추고 싶어도 얼굴에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만물에게 있어서 봄이 그렇습니다. 예수를 만난 이들의 본성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잔득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을 가만 두지 않습니다.. 툭툭 건드리고, 살랑살랑 불어오고 해서, 그들 속에 있는 삶의 기쁨을 밖으로 끄집어 내지 않고서는 못 견디게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베푸는 혼인 잔치였습니다. 그게 배 아프고 못 땅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거 저런 거로 트집을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꽃 샘 추위가 이미 봄바람에 취한 만물을 다시 땅 속으로 들어가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lt;br /&gt;&lt;br /&gt;&quot;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다가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로운 조각이 낡은 데를 당겨서 더욱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가죽 부대를 퍼뜨려서 포도주도 가죽 부대도 다 버리게 된다. 세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아야 한다&quot;(21-22).&lt;br /&gt;&lt;br /&gt;그러면 예수님은 새것과 낡은 것이 어울릴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시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봄은 겨울을 놔두고 시작되는 게 아니라, 겨울을 파괴하고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정죄한 그 죄인들이 죄를 면제 받고 복권이 되는 것을 바라는 게 아니라, 그런 식으로 사람을 더 이상은 구속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제 너희들이 쓰던 그 종교적인 도구들은 쓸모가 없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amp;nbsp;&amp;nbsp;&lt;br /&gt;&lt;br /&gt;이것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기반을 뒤흔드는 말이었습니다. 혁명적인 선언이고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필사적으로 예수가 몰고 오는 그 변화의 바람을, 봄바람을 막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비난하고, 격렬하게 대들고 마침내 사람을 죽여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낡은 틀을 고수하려고 하는 것, 사람을 얽어매는 것을 틀어쥐고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으로부터 교회는 저항해야 하고 파괴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봄바람을 맞은 사람들과 같이 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처음 일이며, 마지막 일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숨 쉬게 하는 것, 사람들이 움츠러들지 않고 잔치집의 신랑과 신부처럼 봄에 취한 사람처럼 기뻐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이며, 신앙이며, 기독교입니다. 그러는 중에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일이, 우리 속에 스며들게 되는 것입니다.&lt;br /&gt;&lt;br /&gt;그런데 문제는 사람들 속에 나쁜 게 입력되어 있어서, 낡은 자루를 버리지 않고 그걸로 어떻게 해 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거침없이 밀고 들어오는 봄을 막아 보려는 허튼 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겨울이, 봄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을 통한 사람들의 변화나 가치관의 전환도 막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 앙드레지드의 [전원교향악]입니다. &lt;br /&gt;&lt;br /&gt;개신교의 한 목사가 부모 잃은 눈먼 아이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제르뜨뤼드 입니다. 목사는 그 아이를 잘 기릅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어른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목사가 그만 숙녀가 된 그 아이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숙녀가 된 아이는 개안 수술을 받습니다. 그녀가 세상을 보게 되었을 때, 그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가 늘 사랑하며 마음속으로 보고 싶었던 얼굴이 목사의 얼굴이 아니라 그의 아들 자끄의 얼굴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사가 그 두 사람사이를 가로막습니다. 아들과 아버지가 정적이 된 것입니다. 결국 아들 자끄는 집을 떠나고, 눈을 떴던 제르뜨뤼드는 자살을 하고 맙니다. &lt;br /&gt;&lt;br /&gt;뭐, 이상하게 끝난 사랑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한 번 새로운 세상에 대해서 눈을 뜬 사람은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보다 더 괴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한 번, 예수를 통해 변화를 맛본 사람들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운데 예수님이 일으키는 봄바람이 성큼 다가와야 합니다. 그걸 위해 우리가 이렇게 모여 교회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혼인 잔치의 기쁜 역사를 만드는 곳입니다.&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lt;br /&gt;&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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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게, 오늘 우리들의 숙제입니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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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2-05-18T18:32:22+09:00</published>
      <updated>2012-05-18T18:32:22+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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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허태수 목사</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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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이게, 오늘 우리들의 숙제입니다&lt;br /&gt;마11:28-30&lt;br /&gt;2010.1.31&lt;/p&gt;
&lt;p&gt;&lt;br /&gt;어렸을 때 제가 제일 갖고 싶었던 것은 내 키에 맞는 지게였습니다. 어린나이부터 일을 해야 하는 형편으로서는, 그 일의 대부분이 짐을 지거나 날라야 하는 것인데, 내 또래의 아이들이 제 키에 맞는 지게를 지고 꼴을 베 나르거나, 정미소로 낱알을 져 나르는 것을 볼 때마다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소원인 &apos;자가용 지게&apos;를 만들어 주지 않으셨습니다. 집 근처에서는 아버지의 지게를 졌지만, 멀리 물건을 나를 때는 &apos;질빵&apos;이라는 것으로 물건을 날랐습니다. 이것은 끈으로 물건을 달아서 두 어깨에 걸어 이동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끈이 넓던지 좁던지 멀리 가는 동안 물건의 무게 때문에 어깨는 마치 칼로 베듯이 아팠습니다. 그 때 어린 저는 &apos;무거운 짐&apos;이라는 게 어떤 건지 톡톡히 배웠습니다. &lt;br /&gt;&lt;br /&gt;지금 사람들은 거의 짐을 지지 않습니다. 가끔 네팔의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돕는 &apos;셀파&apos;들을 보면 짐을 지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웬만한 것은 다 차로 실어 나릅니다. 짐은커녕 자기 몸도 옮기기 싫어서 한 정거장을 가는데도 버스를 탑니다. 편리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이 옛날 사람들보다 더 무겁게 지고 있는 게 있습니다. 마음의 짐입니다. &lt;br /&gt;&lt;br /&gt;엊그제 삼성전자의 부사장이 자살을 했습니다. 왜 그랬는지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그의 유서로만 본다면 &apos;짐이 무거워&apos;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보도에 의하면 그는 아주 유능하고 탁월한 직장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는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들을 갖추고 있었으면서도, 남들이 알지 못하는 무거운 짐이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amp;nbsp;&amp;nbsp;&lt;br /&gt;&lt;br /&gt;이것이 어디 그분만의 이야기겠습니까?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청년은 청년들대로, 회사에 간신히 취직한 직장인은 또 그들대로, 정치인은 정치인 나름대로, &apos;미래의 행복&apos;이라는 미명아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 무거운 짐 때문에 미래의 행복을 쟁취하기도 전에 사람들은 쓰러집니다. 무거운 짐 때문에 쓰러지는 것입니다. 스트레스가 뭡니까? 무거운 짐 아닙니까? 그 짐을 좀 벗어 던지면 좋을 텐데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로 인해 더 큰 마음의 짐이거나, 죄의식의 짐 같은 것을 보탭니다. 등에 진 짐이라면 덜어서 같이 질수도 있지만 마음의 짐은 내려놓기도, 같이 지기도 어렵습니다. 그런 사람을 부르는 음성이 있었습니다.&lt;br /&gt;&lt;br /&gt;&quot;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라&quot;(28).&lt;br /&gt;&lt;br /&gt;예수님이 &quot;내게로 오라&quot;고 초청하는 것은 신약성서의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에만 나오는 독특한 문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apos;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apos;이 도대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무슨, 어떤 짐인지도 묻지 않겠다는 말씀일까요? 아니면 문자 그대로, 수고를 하며 등에 짐을 지고 나르는 당시의 농민, 남의 집 일꾼, 또는 날품팔이를 말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초청한 사람들 가운데는 이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구절에서 말하는 &apos;무거운 짐&apos;은 &apos;등에 지는 짐&apos;이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29절에 보니까 &quot;그러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quot;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apos;마음의 쉼&apos;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쉬는 &apos;몸의 쉼&apos;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게 꼭 &apos;정신적인 쉼&apos;이거나 &apos;마음만의 쉼&apos;은 아닙니다. 뜻을 살려서 풀이해보면 &apos;마음 또는 영혼으로 느끼는 쉼&apos;입니다. 몸과 마음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인간이 온전하게 쉬는 것을 말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본문에 나오는 &apos;무거운 짐&apos;은 단지 물리적이거나, 물질적인 짐이 아닙니다. 인간 존재 전체를 억누르는 어떤 짐을 말하는 것입니다.&amp;nbsp;&amp;nbsp;&lt;br /&gt;&lt;br /&gt;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해서, &apos;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않는 자들&apos;이라고 나무라셨습니다(마23:4). 바리새파 사람들은 주로 그 사회의 중간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apos;중간계층&apos;이란 먹고 살만 한 사람들의 층이라는 뜻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사두개파 다음으로 정치, 종교적인 힘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킴으로 다가오는 시대를 예비하겠다는 사회 개혁의 신념에서 출발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들이 실세가 되면서, 체제수호 세력으로 변질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주창하던 사회 개혁은 뒷전이고 편협하고 경직된 율법주의로 기울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해석과 번역을 독점했습니다. 그러면서 안식일 법, 정결 법, 십일조 법을 강조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율법의 강력한 적용이 그들의 삶을 살찌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재미를 붙인 이들은 수백 개의 세부 조항과 수천 개의 불문율을 지킬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러한 것을 그대로 지킬 수 없는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습니다. &lt;br /&gt;&lt;br /&gt;예수님은 자신의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에 대해서, 마치 &apos;목자 없는 양&apos; 같이, 고생에 지치고, 기가 죽어 있다고 하셨어요(마9:36). 그들 가운데는, 사람들이 꺼리는, 힘들고 냄새 나는 일을 하면서, 종종 그 천한 직업 때문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요구하는 철저한 율법과 수많은 규정들을 다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apos;죄인&apos;으로 규정하고 자신들을 그들로부터 구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천한일로 고생하며 지친데다가 바리새파 사람들로부터 정죄를 받아서 기도 펴지 못하며 살고 있었습니다.&amp;nbsp;&amp;nbsp;&lt;br /&gt;&lt;br /&gt;예수님이 말씀하시는 &apos;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apos;이란 이런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apos;수고 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apos;이란, &apos;수고하는 사람&apos;과 &apos;무거운 짐 진&apos;사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apos;수고를 하면서 무거운 짐까지 진 사람&apos;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 일로 겪는 고생만으로도 무거운 짐인데, 거기에다가 율법주의자가 지운 무거운 짐까지 지고서 허덕이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셔서 &apos;내게로 오라&apos;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례적으로&amp;nbsp;&amp;nbsp;&apos;위선자들&apos;, &apos;눈먼 자들&apos;, &apos;회칠한 무덤&apos;, &apos;뱀들&apos;, &apos;독사의 자식&apos;들이라고 까지 하면서 격렬한 비난을 퍼부었던 것입니다(마23:1-36). 그렇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까지 진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약속을 하셨나요? 그것은 어떤 보상도 행복한 미래에 대한 환상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을 뿐입니다. &lt;br /&gt;&lt;br /&gt;&quot;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quot;(28).&lt;br /&gt;&lt;br /&gt;단지 이 말씀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 나온 사람들은 숙명처럼 자기가 지고 다니던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지 않았습니까? 수많은 죄인, 세리, 창기, 어부, 온갖 병자들, 귀신 들린 사람들, 사마리아 여인,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 그리고 그 밖의 &apos;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apos;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진정으로 쉴 수 있었습니다. 그 쉼 다음에 그들은 기쁨에 사로잡혔고, 새로운 자아가 발견되었고, 가진 것을 나누게 되었고, 세상을 변화 시키는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차지를 받아들이도록 마음을 비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명상을 통해서 무슨 심오한 진리를 터득한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예수님의 그 말을 곧이듣고 나아와서 예수를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를 만나고 나서 웬일인지 마음이 편해지고 기가 살아난 것입니다. &lt;br /&gt;&lt;br /&gt;그런데 말입니다. 김지하는 架浦日記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lt;br /&gt;&lt;br /&gt;신은 다반사 안에 시어머니처럼 쪼그리고 있어 잔소리하는 노쇠한 망령이 아니다. 참된 신은 굵고 원대하며 우주와 세계와 미래를 채우는 청춘의 법이다. 그것은 건설하는 망치요 씨뿌리는 거친 손이며 수확하는 낫이다. 죄 속으로 웅크리지 말라! 너는 한 발짝도 못 나간다. 나가라! 그리고 죄를 뛰어 넘어라! 죄는 진보의 또 하나의 이름이다. 예수는 이 진보의 대가를 죄로 짊어졌다. 십자가다.&lt;br /&gt;&lt;br /&gt;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에 시어머니처럼 잔소리하며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율법주의자가 아닙니다. 사두개파나 바리새인, 율법학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십자가를 지기까지 하면서 우리를 그런 무거운 짐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진정으로 쉬게 해 주려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어찌하여 그런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기는커녕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지지 않는 무거운 죄의식의 짐까지 지고서 허덕이는 것입니까?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apos;예수님이 나의 죄를 사했다&apos;고 하면서도, 맨 날 죄지은 것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고, 사소한 일로도 찜찜해하며 자신을 감추려고 변명하고 핑계하지 않습니까?&amp;nbsp;&amp;nbsp;&lt;br /&gt;&lt;br /&gt;예수님이 그토록 비판한 율법주의는 사라진 게 아닙니다. 변질된 모습으로 우리 속에 더 견고히 뿌리박고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apos;은혜&apos; &apos;은혜&apos;하면서도 날카로운 눈으로 사사건건 다른 사람의 흠이나 결점을 찾아내서 정죄하기에 바쁜 게 아닙니까? 남들에게만 그러는 게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그럽니다. 그러니 아주 편협한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자기와 다른 것은 언제나 틀린 것으로 매도합니다. 더 큰 문제는 그런데서 오는 고통을 예수님이 주시는 것, 예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 받는 것, 예수를 위해 마땅히 져야 하는 짐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말도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어찌 우리에게 먼저 그런 짐을 지운단 말입니까? 오히려 정 반대로 우리를 그런 짐에서 해방시키려고 십자가를 지기까지 한 것이 아닙니까?&lt;br /&gt;&lt;br /&gt;바로 이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라는 제도와 체제가 지워준 짐과 스스로 만들어 낸 짐까지 지고서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quot;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quot; 이것입니다. 거미줄처럼 우리를 얽고 죄여오는 죄의식 속에 웅크리고 있는 한 희망이 없습니다. 아무리 회개를 하고 기도를 한다 해도 말입니다. 먼저 죄 의식을 뛰어넘고, 그 무거운 짐에서 해방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과 더불어 예수님은 비로소 새로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amp;nbsp;&amp;nbsp; &lt;br /&gt;&lt;br /&gt;수고하며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짐을 벗고 진정으로 쉴 수 있을 때, 거기서 새로운 공동체가 생겨났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처음으로 느낀 그 해방의 경험과 진정한 쉼은 한 번 느끼고 잊어버릴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든 계속되고 전파되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라면 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기쁘게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기꺼이 메고 싶은 멍에이고 지고 싶은 짐이었습니다. &lt;br /&gt;&lt;br /&gt;이게 오늘 우리들의 숙제입니다. 공동체를 이루되 구성원들을 죄의식으로 포위하지 않는 것, 진정한 자유의 기쁨으로 살면서 스스로 그리스도와 멍에를 같이 하는 것 말입니다. 이를 위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quot;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quot; &lt;br /&gt;&lt;/p&gt;&lt;!-- 내용이 끝나는 곳입니다.--&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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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되어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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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2-05-18T10:03:50+09:00</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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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최용우</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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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매일 아침 차 한잔 마시면서 전해드리는 햇볕같은이야기&lt;br /&gt;♣♣그 4365번째 쪽지!&lt;/p&gt;
&lt;p&gt;&amp;nbsp;&lt;/p&gt;
&lt;p&gt;□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되어야&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하나님께서는 애굽땅에서 애굽의 생활방식으로 애굽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 60만명을 광야에서 다 죽이십니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계명인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말씀의 생활 방식으로, 말씀의 가치관으로 살아갈 새 사람 60만명을 40년 동안 만들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lt;br /&gt;애굽에서 나온 60만명은 옛사람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60만명은 새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옛사람 60만명을 철두철미하게 죽이신 후 말씀에 순종하는 새사람을 만드십니다. 심지어 옛사람이라면 모세까지도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나는 목사이니까, 장로이니까 권사이니까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쯤은 따놓은 당상으로 여기다가는 큰 코 다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lt;br /&gt;내 안에서 깨어져야 되고 죽여야 될 죄성과 정욕과 구습도 무려 60만가지나 됩니다. 어쨌든 60만은 모두 죽어야 합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는 60만가지 중에서 한 10가지는 죽은 것 같은데, 그럼 나머지 599990가지는 어느 세월에 다 죽일 수 있을까요. 앞날이 캄캄합니다.&lt;br /&gt;나의 양심과 지성과 감정과 의지와 마음과 행실을 철저하게 하나님께 복종시킴으로 내 안에서 옛사람을 조금씩 제거해 나가는 삶을 평생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걸렸지만 저는 한 400년은 걸릴 것 같네요. &lt;br /&gt;참으로 오랫동안 &apos;구원&apos;이라 함은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신학이 발달하면서 신학은 &apos;구원&apos;의 개념을 &apos;예수님을 믿는 것&apos;으로 단순하게 바꾸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apos;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이 되는 것&apos;입니다. 그냥 단순히 입으로만 &apos;예수님을 믿습니다.&apos;는 고백만 가지고는 새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최용우&lt;/p&gt;
&lt;p&gt;&amp;nbsp;&lt;/p&gt;
&lt;p&gt;♥2012.5.18 쇠날에 좋은해, 밝은달 아빠 드립니다.&lt;br /&gt;♥글에 공감하시면 추천 버튼을 꾸욱 눌러주시는 센스^^ &lt;br /&gt;&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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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진정한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는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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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2-05-17T22:28:40+09:00</published>
      <updated>2012-05-17T22:28:40+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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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김필곤 목사</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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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strong&gt;&lt;font color=&quot;#0000ff&quot;&gt;진정한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는가?&lt;br /&gt;&lt;br /&gt;&lt;/font&gt;&lt;/strong&gt;“&lt;font color=&quot;brown&quot;&gt;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lt;/font&gt;.”(마16:15,16)&lt;br /&gt;&lt;br /&gt;본문은 예수의 제자가, 사실은 전체 인간 중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예수님의 정체성을 확인한 위대한 고백(the Great Confession)으로 불립니다. 예수님은 이 고백을 바탕으로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수난을 준비하고 또 제자들에게 당신이 십자가에 오르시고 죽을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lt;br /&gt;&lt;br /&gt;그러나 사실은 이보다 먼저 제자들로부터 동일한 고백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한 밤중에 물위를 걸어오실 때에 베드로도 물 위를 걷다가 바람을 보고 빠져가는 것을 주님이 구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습니다. 그 때에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마14:33)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혼자가 아니라 전 제자가 그것도 절까지 하며 분명히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lt;br /&gt;&lt;br /&gt;그런데도 왜 이 고백보다 나중에 한 베드로의 고백을 더 중하게 여길까요? 그 차이는 기적을 보고 놀라 자기도 모르게 탄복해서 나오는 말과 그런 일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단지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한 것과의 차이 때문입니다. 즉 후자의 경우는 베드로가 스스로 생각하여 마음에 완전히 수긍한 후에 한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그런데 제자들의 이런 고백들이 그 후에 진행된 일련의 사건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야말로 예수님을 입술로만 주여주여 하고 따른 셈입니다. 이 고백을 한 베드로부터 스승을 배반했습니다. 그의 고백에 비추어보면 스승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 아니 하나님을 배반한 것입니다. &lt;br /&gt;&lt;br /&gt;다른 말로 베드로는 마음에 수긍을 하여 예수님을 ‘주(主)’라고 시인해 놓고는 자기가 방금한 고백의 진정한 의미를 몰랐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이 그 고백을 바탕으로&amp;nbsp;&amp;nbsp; 주신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약속의 의미도 몰랐습니다. 실제로 이 고백 후에 귀신들린 간질 환자도 고치지 못했습니다.(마17:14-20)&amp;nbsp;&amp;nbsp; &lt;br /&gt;&lt;br /&gt;성경에서 가장 이해되지 않는 일 중의 하나는 이런 위대한 고백을 했던 베드로가 어떻게 스승, 아니 하나님의 아들을 세 번이나 부인할 수 있었을까일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마저 완전히 상실 된 사건 아닙니까? 혹시라도 믿음이 상실되지 않았다면 그 믿음이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만약에 그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신했다면 그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순교의 길을 가야 마땅했습니다. &lt;br /&gt;&lt;br /&gt;그렇지만 그의 고백은 단지 머리로만 생각하여 지식적 동의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3년간 예수님을 바로 곁에서 따르며 온갖 확실한 체험을 했습니다. 구약의 모세를 제외하고는&amp;nbsp;&amp;nbsp;인류 역사상 그만큼 예수님(하나님)과 가까이 대면하여서 많은 체험을 한 자도 없을 것입니다. 물위를 걸었고, 변화산에서 모세와 옐리야를 보았고,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았고, 자신의 장모도 고침을 받는 등 다른 제자들보다 더 많은 이적을 겪었습니다. 틀림없이 예수님과 대화도 가장 많이 나눴을 것입니다. &lt;br /&gt;&lt;br /&gt;다른 말로 그의 이 고백은 실제 체험과&amp;nbsp;&amp;nbsp;주님과의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한 위대한 고백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었습니다. 또 바로 그것이 십자가 사건 때에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배반케 한 결정적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 고백에는 아직 자신의 깨어짐이 포함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은 분명히 알았지만 그 분 앞에 비춰본 자신이 어떤 존재라는 것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lt;br /&gt;&lt;br /&gt;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던 바로 전날 밤까지도 자신에 대해 전혀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진정한 자아상을 그리지 못하고 사단이 그려준 허상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의협심이 강해 불의를 참지 못하고 앞장서는 정의의 사자가 될 수 있는 충분한 도덕성과 종교성과 심지어 영성을 갖추고 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amp;nbsp;&amp;nbsp;&lt;br /&gt;&lt;br /&gt;그런데 막상 대제사장의 하속들과 로마 군병들의 창칼 앞에 자신의 그 하늘 높은 줄 몰랐던 인간적 의협심과 스승에 대한 사랑이 휴지조각처럼 갈가리 찢어지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때까지 스스로 의롭다고 여겼던 자아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그의&amp;nbsp;&amp;nbsp;통곡은 단순히 스승을 배반했다는 도덕적 죄책감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너무나도 무력하고 부패해서 버러지보다 못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비로소 그는 완전한 자기 부인의 고통을 통과했던 것입니다. &lt;br /&gt;&lt;br /&gt;그러나 놀랍게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주님의 부활을 알고도 갈릴리로 돌아갔습니다. 또 다시 그가 부활을 믿지 못했거나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섣불리 단정 지어선 안 됩니다. 완전히 깨어진 자아가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죽어버린 자신이 되살아나지 못한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세 번의 부인 사건으로 그가 지니고 있던 몸과 마음과 영혼의 짐을 세 번의 용서로 모두 벗겨 주었습니다. 그는 드디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amp;nbsp;&amp;nbsp; &lt;br /&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 &lt;br /&gt;성경을 공부하고 교리에 동의하여 예수님을 지적으로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기도원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중병이 낫는 개인적 체험 후에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베드로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lt;br /&gt;&lt;br /&gt;그러나 언제든 환난이 닥치기만 하면 세 번이 아니라 수백 수천 번도 더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자신이 철저하게 깨어져서 스스로 고난의 십자가를 통과한 적이 아직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완전히 죽었다 되살아 난 자만이 가끔 실패를 하더라도 항상 그분께 되돌아오는 흔들림 없는 믿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lt;br /&gt;&lt;br /&gt;중생이라고 해서 특별히 신령한 체험을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철저하게 부인하다가 자신이 더 철저하게 깨어지는 과정을 반드시 겪어야 한다는 것뿐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려고 하기 이전에 십자가에 죽으신 그 분 앞에서 자기의 정체성부터 먼저 확실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주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은 저절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lt;br /&gt;&lt;br /&gt;다른 말로 그 동안 예수님을 부인했던 자신이 얼마나 확실한 죽음 속에 있었는지 그래서 살아는 있되 실제로는 완전히 죽어있었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저는 도저히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 말고는 제 힘으로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에 나보다 잘나지 않은 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제가 이제 살든지 죽든지 모든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의 처분에만 내 모든 것을 온전히 맡기겠습니다.”라는 항복 선언이 절로 나와야 합니다. &lt;br /&gt;&lt;br /&gt;베드로처럼 도저히 자신이 부끄럽고 싫어서 세상 끝, 갈릴리 바닷가까지 도망갔지만 그곳까지 찾아 오셔서 자신을 사랑해주시는 예수님을 만나 그 긍휼 앞에 완전히 엎드렸던&amp;nbsp;&amp;nbsp;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긍휼과 사랑 외에는 더 이상 이 세상을 살아 갈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는 없음을 온전히 인정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amp;nbsp;&amp;nbsp;&amp;nbsp;&amp;nbsp;&lt;br /&gt;&lt;br /&gt;예수님은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것을 미리 아셨을 뿐 아니라 사실은 당신께서 사전에 다 연출 해놓은 사건이었습니다. 세 번 부인한 자신을 다시 찾아 오셔서 똑 같이 세 번 용서하여 사랑을 베푼 주님을 베드로 본인이 어떻게 느꼈겠습니까? 세 번 부인할 것을 다 알고도 한 마디 경고도 야단도 치지 않으셨던 까닭이 바로 이 세 번의 용서하는 절차를 예비해 놓으셨기 때문이라고 확신했을 것 아닙니까? &lt;br /&gt;&lt;br /&gt;주님은 베드로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위대한 고백을 할 때에 이미 그의 배반을 아시고 당신의 용서까지 다 계획 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장에 그런 계획을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어봐야 아무도 알지 못했을 것이므로 말씀 안 하신 것뿐입니다. 대신에 주님은 그들에게 올바른 신앙 고백에 따라 올 천국 열쇠의 약속만 주셨습니다. &lt;br /&gt;&lt;br /&gt;그리고 그 약속에 담긴 주님의 진정한 뜻은 “너희도 스스로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랑을 절대 제대로 알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몸으로 십자가에 죽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그래야만 비로소 천국 열쇠의 권능이 나타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직 자신들의 자아가 깨어지기 전의 제자들이 그 진리를 들어도 알 재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신에 그 때부터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을 본을 먼저 보일 것을 비로소 가르치기 시작한 것입니다.&amp;nbsp;&amp;nbsp;&lt;br /&gt;&lt;br /&gt;이 시간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너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라고 똑 같은 질문을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물론 우리 모두는 베드로와 똑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천국 열쇠를 받았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또 그 권세를 실제로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 또한 입술로만 베드로의 고백을 흉내 낸 것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그분의 십자가 위에서 자신이 완전한 깨어지고, 낮아지고, 비워지지 않고는 어떤 거룩하고도 신령한 신앙 고백이라도 입술로 주여주여 하는 것뿐입니다. &lt;br /&gt;&lt;br /&gt;8/19/2006&amp;nbsp;&amp;nbsp;&lt;br /&gt;&lt;!--&quot;&lt;--&gt;&lt;/--&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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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믿음을 키우는 유일한 비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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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2-05-17T22:26:55+09:00</published>
      <updated>2012-05-17T22:26:55+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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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박신 목사</name>
               </author>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b&gt;믿음을 키우는 유일한 비결&amp;nbsp;&amp;nbsp;&lt;/b&gt;&lt;br /&gt;&lt;br /&gt;“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lt;font color=&quot;brown&quot;&gt;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lt;/font&gt; 하시고.”(마14:28-31)&lt;br /&gt;&lt;br /&gt;&lt;br /&gt;예수님이 먼저 떠나보낸 제자들과 동행하려고 밤 사경에 바다 위를 걸어오셨습니다. 여러 사람을 태운 배는 바람에 거슬린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는(24절) 반면에 예수님은 혼자 거친 풍랑 속에서도 아무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성경이 걸어오고 있었다고 표현한 뜻은 그 움직임에 전혀 부자연스런 모습 없이 실제로 걷고 있었다는 뜻입니다.&amp;nbsp;&amp;nbsp; &lt;br /&gt;&lt;br /&gt;그렇다고 공중 부양하듯이 날아왔다는 뜻이 아닙니다. 갈릴리 바다는 여전히 풍랑이 심한 바다 그대로였습니다. 예수님이 밟는 그 자리만 순간적으로 마른 땅처럼 된 것입니다. 비유컨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고 있는 동안만은 바다가 마른 땅으로 변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주님이 행하는 곳 어디나 당신의 거룩한 통치가 완벽하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성질 급한 베드로도 주님에게 부탁하여(?) 물 위를 걷는 기적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는 바람에 물에 빠져가기 시작했고 다시 주님께 구원을 간구하여 익사를 모면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께 믿음이 적은 자라고 야단을 맞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lt;br /&gt;&lt;br /&gt;간혹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런 기사를 두고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예수의 신성을 고취하려고 후대 사람들이 지어낸 신화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도저히 물 위를 걸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연계에 있는 기존의 법칙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 생기지 않는다고 믿는 것입니다. 기적을 부인하는 자는 결코 기적을 맛볼 수 없습니다. &lt;br /&gt;&lt;br /&gt;기존 질서만으로 모든 일이 운행된다면 하나님도 필요 없고 믿음도 무용지물입니다. 매사에&amp;nbsp;&amp;nbsp;가시적 사안으로만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적용하면 됩니다. 신자가 할 일도 자기 양심에 따라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면 그만입니다. 기독교 신학자나 교인인 양 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신학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높이려다 오히려 스스로 부인하게 된 꼴입니다.&amp;nbsp;&amp;nbsp;&amp;nbsp;&amp;nbsp; &lt;br /&gt;&lt;br /&gt;성경은 아주 정미한 기록입니다. 본문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라고 당시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출렁이는 물을 보고 무서워 빠졌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인간이 육안으로 바람을 볼 수는 없습니다. 풍랑이 이는 모습이나 귓가에 스치는 감각으로 바람이 불고 있음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어쨌든 지금 베드로가 바로 자기 발밑의 물을 보고 두려워 한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가 디뎠던 바다도 발을 밟는 그 순간만은 땅처럼 단단해졌던 것입니다. 얼마를 걸었는지는 모르지만 발밑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다 풍랑을 보고 혹시 휘말려 넘어지지는 않을까 염려가 드는 순간에 그가 디딘 바다도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간 것입니다.&amp;nbsp;&amp;nbsp;&lt;br /&gt;&lt;br /&gt;나아가 “빠져 가는지라”라고 기록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수영을 전혀 못하는 자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갈릴리 바다 어부 출신이므로 틀림없이 상당한 수영 실력을 갖추었을 것입니다. 도무지 수영조차 못할 정도로 큰 폭풍우였다면&amp;nbsp;&amp;nbsp;처음부터 바다에 뛰어들 생각도 안했을 것입니다.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더 조심하는 법입니다. 설령 그런 큰 폭풍우였다 해도 물에 빠져서 그리 쉽게 허우적대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는 분명 서서히 물에 빠져 들어가는 모습을 지칭한 것입니다. 즉 의심이 그의 마음을 파고&amp;nbsp;&amp;nbsp;드는 시간적 경과에 따라 그의 발밑의 딱딱했던 상태가 서서히 약해졌던 것입니다.&amp;nbsp;&amp;nbsp; &lt;br /&gt;&lt;br /&gt;지금 성경 기록의 진실성을 논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는 예수님이 지적하신 말씀의 진의를 밝혀보자는 것입니다. 우선 믿음이 많고 적음이 결코 신자의 의지적 결단력과 응집력의 많고 적음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나를 틀림없이 물 위를 걷게 하실 수 있을 거야!!”를 수십 번 되뇌면서 이제 물에 뛰어들어보기로 하자라고 행하는 것과 믿음과는 사실상 별개라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지금 상황에서도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물에 뛰어 들어간 것뿐입니다. 간절히 기도하여 각오를 다지면서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면 죽는다는 절박한 심정이 된 것이 아닙니다. 아무 흔들림 없이 물 위를 걸어오는 주님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또 주님이 오라고 하니까 그냥 배에서 내린 것입니다. 그 순간에는 불신과 의심은커녕 주저함도 전혀 없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좋은 믿음을 의심이 없는 상태와 연결시킨 까닭입니다. 좋은 믿음은 불순물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상태이지 의지력의 세기와는 아예 연관이 없습니다.&amp;nbsp;&amp;nbsp; &lt;br /&gt;&lt;br /&gt;그런데 막상 이 부분에선 더 세분하여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신자들은 예수를 믿기에 자기도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려 듭니다. 그래서 물 위를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일부러 전혀 의심 내지 의식조차 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또 그것이 믿음을 세우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lt;br /&gt;&lt;br /&gt;그러나 이는 사실상 모순입니다. 인간 사고의 흐름상 아주 부자연스런 상태입니다. 인간이 물 위를 걸을 수 없다는 것은 경험상, 교육상, 사물의 본질상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자유주의학자가 성경기록의 진실성을 계속 물고 늘어질 정도로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도리어 이상합니다. 베드로가 평생 동안 바다에서 터득한 원리도 바로 그것이지 않습니까?&lt;br /&gt;&lt;br /&gt;알기 쉽게 말해 베드로가 물에 띄어들기 전에 간절히 기도도 안했지만, 믿음으로 행하면 충분히 물 위를 걸을 수 있을 거야라고 단단히 다짐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라고 하니까 그냥 한쪽 발을 내밀었더니 그 밑의 물이 딱딱해졌고 그대로 걸어간 것입니다.&amp;nbsp;&amp;nbsp;결국 의심이 적거나 없어서 믿음이 좋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내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굳세게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그냥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그런데도 우리 중 대부분은 강한 믿음으로 기도하면 기도한 제목들이 응답이 될 거야라고 열심히 믿거나, 정확하게 표현하면 믿으려 노력하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믿음을 더 세게 만들면 반드시 응답되고야 만다는 사실부터 믿으려 듭니다. 그럼 믿음을 더 강하게 할 수 있다는 것과, 의심을 없앨 수 있다는 것과, 반드시 응답되리라는 사실 등이 열심히 믿으려는 대상들입니다. 정작 믿음의 대상이 되어야 할 하나님과 예수님은 빠져 있습니다.&amp;nbsp;&amp;nbsp;&lt;br /&gt;&lt;br /&gt;믿음은 정말로 아주 단순해야 합니다. 불순물이 안 섞이고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순수하지 않으면 믿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온전히 성삼위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기도한 사실이 이뤄질 것부터 믿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으면 그 다음에 응답될 것도, 단 하나님의 방식으로, 믿어집니다. 정확히 말하면 응답되든 안 되든 이미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나게 되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lt;br /&gt;&lt;br /&gt;하나님을 믿는다고 단순히 전지전능성을 믿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을 못 믿는 자는 없습니다. 또 안 믿으면 기도도 하지 못합니다. 간단히 말해 믿음은 나와 내 일생이 그분의 거룩한 손 안에 완전히 붙잡혀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의심이 없는 것도 그 부분에 전혀 흔들림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하라는 대로 그냥 하는 것입니다.&amp;nbsp;&amp;nbsp;&lt;br /&gt;&lt;br /&gt;베드로가 풍랑을 보는 순간 두려워진 것까지는 아무 하자가 없습니다. 바다의 무서움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순간 “아차! 이러다 빠지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예수님이 오라는 대로 단순하게 따랐던 자세가 사라진 것입니다. 이제 의심에 붙들려 그의 관심사는 오직 물에 빠지지 말아야겠다는 것에 집중되었습니다. &lt;br /&gt;&lt;br /&gt;역설적으로 말해 그때야말로 그는 자기 믿음을 강하게 해서 물 위를 걸어야겠다고 다짐하는 시중에 통용되는(?) 믿음 상태로 바뀐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예수님이 나로 물 위를 걷게 해주실 줄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아멘!”을 그 짧은 순간에 수십 번도 더 읊조렸을 것입니다. 진짜로 믿는다면 그대로 행하면 그만입니다.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 믿습니다, 믿음을 주십시오, 믿을 수 있도록 징조를 주십시오, 등등의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amp;nbsp;&amp;nbsp;&amp;nbsp;&amp;nbsp; &lt;br /&gt;&lt;br /&gt;물론 우리 모두는 하나님 그분에 대해서도 의심이 전혀 없는 순수한 믿음을 유지하기 힘듭니다. 풍랑을 보면 겁을 집어먹기 마련입니다. 아니 베드로처럼 물에 띄어들지도 못합니다. 그럴 엄두도 못 내는 소인배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키우고 굳게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주님의 도움에 의지하여 그렇게 해야 합니다. &lt;br /&gt;&lt;br /&gt;그러나 이미 말한 대로 내가 믿으려 노력하기보다는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를 죽여서까지 나를 사랑한 그 사랑에 온전히 붙잡혀 있다는 온전한 확신부터 가지고 그 확신에 불순물이 끼어들지 않도록 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믿음을 자꾸 크게 키우기보다는 막상 순수하게 지켜내는 것이 사실은 믿음을 키우는 본질입니다. 예수 믿은 후의 일생이 정말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붙잡혀 있으면 본문의 베드로처럼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구태여 따로 믿고 자시고 할 일이 없습니다.&amp;nbsp;&amp;nbsp;&lt;br /&gt;&lt;br /&gt;정작 본문이 주는 의미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주님이 시키는 대로 그냥 순순히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은 믿음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보자고 하는 동기가 무엇이었습니까? 좋게 보면 주님의 권능에 동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더 단순하게 예수님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마중 나가는 심정이었을 수 있습니다. &lt;br /&gt;&lt;br /&gt;나쁘게 또는 엄밀히 해석하면 그로선 자기도 물 위를 걸어봐야겠다는 것 외에 다른 어떤 목표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풍랑을 보는 순간 걸어야겠다는 목표에 방해가 될 것 같으니까 즉, 자기가 물에 빠질 것 같으니까 두려워진 것입니다. 이를 우리의 믿음에 적용하면 어떻게 됩니까? 현재 기도하고 있는 제목들이 꼭 이루어져야 한다는 (그렇게 믿거나, 다짐하거나, 소원하거나 간에) 생각이 들면 들수록 자신의 믿음을 더 강하게 세우려 들고 동시에 의심도 더 많이 생기는 악순환이 되풀이 된다는 것입니다.&amp;nbsp;&amp;nbsp;&lt;br /&gt;&lt;br /&gt;바꿔 말해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고 믿음을 키우려 들어선 절대 의심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자를 계속 환난에 빠트리려고 사단의 방해가 심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환난일수록 신자는 하나님을 더 찾게 마련이니까 즉, 어떤 신자라도 위급하면 기도하니까 오히려 사단은 신자에게 풍요와 형통을 주려 애를 씁니다. &lt;br /&gt;&lt;br /&gt;욥의 경우처럼 도리어 하나님이 신자를 환난에 방치하거나 밀어 넣을 수 있음에 우리 믿음의 눈이 돌아가야 합니다. 그 목적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라고, 예수님의 표현대로 하자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저 그냥 그분을 믿고 따르는 것뿐입니다. 요컨대 순종이 앞서지 않고 단순히 믿음을 키우려 해선 절대 자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amp;nbsp;&amp;nbsp;&amp;nbsp;&amp;nbsp;&lt;br /&gt;&lt;br /&gt;지금 여러분의 눈앞에 온갖 풍랑이 일렁거리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 풍랑만 제거하면 만사형통하고 믿음이 자라며 더 순종할 것 같습니까? 또 그런 뜻으로 뜨겁게 기도하고 믿음을 굳세게 하려고 열심히 노력하십니까? &lt;br /&gt;&lt;br /&gt;그런데 잠시만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지난 모든 신앙경험을 되돌아보십시오. “이 기도가 응답될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면 응답될 것만 믿었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만약 응답 안 되면 하나님도 안 믿을 작정입니까? 솔직히 우리가 되풀이 했던 잘못이지 않습니까? 주님만 바라보면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경에 계시된 뜻 그대로 행하는 것 말고는 의심을 제거하고 믿음을 키우는 길은 사실상 없습니다. &lt;br /&gt;&lt;br /&gt;8/14/2009&lt;br /&gt;&lt;!--&quot;&lt;--&gt;&lt;br /&gt;&lt;br /&gt;&lt;/--&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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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바보 같은 신자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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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2-05-17T22:25:11+09:00</published>
      <updated>2012-05-17T22:25:11+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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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박신 목사</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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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strong&gt;&lt;font color=&quot;#0000ff&quot;&gt;바보 같은 신자들 &lt;br /&gt;&lt;br /&gt;&lt;/font&gt;&lt;/strong&gt;&quot;&lt;font color=&quot;brown&quot;&gt;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lt;/font&gt;.&quot; (마13:44-46)&lt;br /&gt;&lt;br /&gt;예수님이 천국의 성격에 관해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비유란 전하고자 하는 뜻을 전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가 충분히 잘 알고 있는 현실의 사물이나 사건의 특성에 비추어 설명하는 수사법의 일종입니다. 그럼 본문에서 천국은 어디에 비유된 셈입니까? 보화와 진주입니까? 물론 그것도 맞지만 본문에 드러난 행위 즉 사건 전체가 비유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물과 사건 둘 다에 비유한다고 한 것입니다. &lt;br /&gt;&lt;br /&gt;보화와 진주는 최고로 좋고 값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만큼 천국이 좋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눈물과 한숨과 고통이 없으며 그 무엇보다도 죄가 없는 곳입니다. 서로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며 상처를 주고 받는 일이 그곳에선 더 이상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곳입니다. &lt;br /&gt;&lt;br /&gt;그런데 이는 기독교 뿐만 아니라 어떤 종교나 심지어 무신론자도 상식적으로 아는 사항입니다.&amp;nbsp;&amp;nbsp;예수님이 단지 누구나 다 아는 내용, 즉 천국이 좋다는 뜻을 전하려고만 말씀하신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보화나 진주만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좋은 것을 어떻게 획득하고 소유해야 하는지 신자의 천국에 대한 관점과 태도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lt;br /&gt;&lt;br /&gt;우선 천국에 대한 관점부터 달라야 합니다. 천국이 막연하게 좋은 곳이다라고 그쳐선 안 됩니다. 두 비유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문구가 무엇입니까? &quot;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quot;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입니다. 보화나 진주는 장신구나 장식품에 쓰이는 귀금속일 뿐입니다. 그것으로 먹고 마시는 문제를 해결해 주지도 않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갖고 있는 집과 땅과 현찰과 자동차 등 동산 부동산 전부를 다 처분해서 사야 한다고 합니다. &lt;br /&gt;&lt;br /&gt;전 재산이란 이땅에 사는 동안에 현실에서 이룬 것의 전부입니다. 삶의 목적이자 살아가는 수단이자 생의 기쁨일 수 있는 것 전부입니다. 그 모든 것을 주고 바꿔야 한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생의 목적이 결국 천국에 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잘 믿어 죽은 후에 지옥 대신 천국 가야지 하는 막연한 바람이어선 안 됩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이곳에서부터 하나님의 품 안에서 그분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비유에서 보화를 사서 숨겨둔다고 했습니다. 숨긴다고 해서 천국을 주위에 소개도 하지 않고 자기 혼자만 소유한다는 것이 아니라 다시 팔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정말로 세계에서 하나 뿐인 아주 희귀한 보석이 나타나면 투자의 목적으로 전재산을 바쳐 살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 지난 후 되팔면 그 차익은 엄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 재산을 바쳐서 사고도 되팔지 않아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을 발견한 자는 이땅에서부터 항상 소유하고 있어라는 것입니다.&lt;br /&gt;&lt;br /&gt;진정으로 이땅에서부터 하나님을 알고 따르면 바로 그 삶이 천국일 뿐 아니라 이땅에서부터 천국의 삶을 살지 못하면 죽어서도 천국을 갈 수 없습니다. 엄격히 말해 기독교에선 사람이 죽은 후에 심판이 따로 없습니다. 살면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 자는 죽어서도 그 관계가 계속해서 연결되고 그렇지 못한 자는 죽어서도 하나님과 계속해서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대신에 신자가 죽으면 이 땅에서의 삶에 따라 천국에서의 보상만 달라질 뿐입니다. &lt;br /&gt;&lt;br /&gt;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느 누구도 자기의 죄를 스스로 씻을 수 없고 아무리 선행을 해도 그 죄를 대속할 수 없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한 마디로 착한 자가 천국 가고 악한 자가 지옥 간다는 것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인간끼리 판단할 때는 의인과 죄인이 나눠질지 몰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두가 똑 같이 불쌍하고 연약한 죄인이라 오직 당신의 긍휼만 바라며 겸손하게 나오는 자는 누구나 구원해 주십니다. 그래서 천국을 살아서 소유할 수 있는 비결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하는 것 뿐입니다. 값진 보화나 진주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lt;br /&gt;&lt;br /&gt;밭을 간 자는 보화를 우연히 발견했고 진주는 장사꾼이 구하러 다니다가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두고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만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으로도 얻을 수 있다고 해석해선 안 됩니다. 둘 다 천국이 세상의 모든 것을 바꾸어도 될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발견하는 방법의 차이가 문제가 아니라 둘 다 진짜 값진 보화요 세상에서 하나 뿐인 진주라는 것을 볼 줄 알았기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차지했다는 것에 포 커스가 있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천국에 대한 소원은 세상 사람 모두가 그 정도만 다를 뿐 어느 누구나 다 갖고 있습니다. 죽어서 지옥 간다는 것을 좋아할 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을 단순히 소원하는 것과 천국이 좋아 세상의 모든 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은 그 차원이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후자의 경우는 천국의 가치를 인정하기 이전에 반드시 이땅에 대한 가치의 부정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 반면에 전자는 반드시 그렇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정말 부질 없고 헛된 것이라는 확신이 없이는 돌이나 금속에 불과한 보석과 자기 전재산과 바꾸는 바보는 없습니다. &lt;br /&gt;&lt;br /&gt;이 세상은 잠시 잠간 지나갈 들풀 같은 것이며 나 또한 결국은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기에 영원한 본향에 대한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내가 얼마나 죄와 어리석음과 연약함에 쌓여 있는 불쌍한 존재인지 처절하게 깨달아 나의 정체성과 가치는 오직 하나님 안이 아니고는 절대로 발견할 수 없다는 확고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quot;나야 말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quot;이라는 고백과 함께 자신의 전존재, 전삶, 전인격,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깨어져야 합니다. . &lt;br /&gt;&lt;br /&gt;요컨대 자신의 완전한 깨어짐이 없이는 천국에 대한 참 소망은 결코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모든 인간더러 하나님을 몰랐던 자신과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의 무가치성을 철저하게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지금 당신은 막연하게 천국을 소망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미 전 소유를 팔아 천국을 사서 이미 소유하고 있습니까? 말하자면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자신부터 완전히 깨어지고 부숴진 체험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다른 말로 하면 세상 사람 눈에 지금 당신은 전재산을 팔아 눈에 안 보이는 천국을 소유한 바보로 보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땅과 천국 두 마리 토끼를 한 손에 잡으려는 영악한 자로 비췹니까?&lt;br /&gt;&lt;br /&gt;3/13/2006&lt;br /&gt;&lt;!--&quot;&lt;--&gt;&lt;/--&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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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건강을 위한 10가지 충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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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2-05-17T22:22:32+09:00</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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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김형모</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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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건강을 위한 10가지 충고 &lt;br /&gt;&lt;/p&gt;
&lt;p&gt;1. 하루 7--8시간 충분한 수면을 취하라.&lt;br /&gt;2. 매일 아침 식사를 하라.&lt;br /&gt;3. 간식을 삼가라.&lt;br /&gt;4. 인스턴트 식품을 피하라.&lt;br /&gt;5. 짧은 시간이라도 운동을 정기적으로 하라.&lt;br /&gt;6. 술, 담배를 피하라.&lt;br /&gt;7. 화 내지 말라. 아니면 곧 풀라.&lt;br /&gt;8. 마음의 여유를 만들라.&lt;br /&gt;9. 몸의 건강 이상으로 마음의 건강을 위하라.&lt;br /&gt;10. 지나치게 예민하지 말라.&lt;br /&gt;ⓒ김형모&amp;lt;마음의 고통을 돕기 위한 10가지 충고4&amp;gt;&lt;br /&gt;&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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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장학일목사 입니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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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2-05-17T14:18:11+09:00</published>
      <updated>2012-05-17T14:18:11+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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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장학일 목사</name>
               </author>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lt;img border=&quot;0&quot; src=&quot;http://image.postman.co.kr/postman2011/user/20120515/buniel_j_2eefe4ec97da49ddf5ea4baf97305702.jpg&quot; /&gt;&lt;br /&gt;&lt;img border=&quot;0&quot; src=&quot;http://image.postman.co.kr/postman2011/user/20120515/buniel_j_358aa21ed72d56435d46790043a58038.jpg&quot; /&gt;&amp;nbsp;&lt;/p&gt;&lt;/div&gt;</content>
                  
   </entry>
   <entry>
      <title>TIM 7차 열린하늘, 성령의 불 컨퍼런스 초청</title>
      <id>http://cyw.pe.kr/xe/525515</id>
      <published>2012-05-17T13:58:43+09:00</published>
      <updated>2012-05-17T13:58:43+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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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노상국</name>
               </author>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small&quot;&gt;샬롬, TIM(트리니티국제선교회)에서 알려드립니다.&lt;br /&gt;&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small&quot;&gt;2 월말 이후 6 차에 걸친 TIM컨퍼런스를 통하여 강력한 성령님의 기름부으심과 임재가 나타나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게 됨을감사드립니다.&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small&quot;&gt;다음 까페(cafe.daum.net/tim-korea)에 오셔서 주님이 하신 일(간증)과 세계적인 예언의 글들을 보시기 바랍니다.&lt;br /&gt;&lt;strong&gt;7차 컨퍼런스에도 &lt;/strong&gt;성령님의 더욱 큰 역사하심을 사모하면서 하나님 음성듣기, 환상, 예언, 치유, 축사 등 (열린하늘과 성령의 불 컨퍼런스)를 개최하며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small&quot;&gt;이번 컨퍼런스에서도 성령님의 강력한 불과 기름부으심, 하나님의 분명한 임재의 영광 아래 모든 상한 마음과 육신이 치유되고, 주님의 방문을 받으며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듣게되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새로운 비전과 전략을 받으며, 다양한 성령의 은사가 풀어지고, 활성화되는 귀한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amp;nbsp;&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small&quot;&gt;일정 2012. 5. 21- 5.24 까지&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small&quot;&gt;&amp;nbsp;&amp;nbsp; 5월 21일: 오후 2시, 저녁 7시 30분&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small&quot;&gt;&amp;nbsp; 5월 22, 23일: 오전 10시, 오후 2시, 저녁 7시 30분&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small&quot;&gt;&amp;nbsp; 5월 24일: 오전 10시, 오후 2시&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small&quot;&gt;등록비 : 숙식비 포함 70,000원(당일등록)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small&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예약접수시 60,000원&amp;nbsp; 송금구좌 농협 351-0470-7931-93 (예금주:트리니티국제선교회) 송금후 전화 요망.&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small&quot;&gt; &lt;!-- end bbs_contents --&gt;&lt;!-- 이전 첨부파일 영역 --&gt;&lt;!-- 이전 첨부파일 영역 end --&gt;&lt;!-- 새로운 첨부파일 영역 --&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small&quot;&gt;&lt;!-- --&gt;&lt;!-- end clix_content --&gt;&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small&quot;&gt;&amp;nbsp;&amp;nbsp; &lt;strong&gt;문의&lt;/strong&gt;: TIM센터 오혜숙 목사&amp;nbsp;&amp;nbsp;070-8269-3578, 010-2369-0691,&amp;nbsp;&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small&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small&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 이메일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a href=&quot;mailto:tim-korea@daum.net&quot; target=&quot;_blank&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small&quot;&gt;&lt;u&gt;tim-korea@daum.net&lt;/u&gt;&lt;/span&gt;&lt;/a&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small&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small&quot;&gt;&amp;nbsp; 까페 &lt;u&gt;cafe.daum.net/tim-korea&lt;/u&gt;&lt;/span&gt;&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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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try>
      <title>독서속독법 개척교회 전도와 교육을 위한 세미나</title>
      <id>http://cyw.pe.kr/xe/525512</id>
      <published>2012-05-17T13:56:57+09:00</published>
      <updated>2012-05-17T13:56:57+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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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nk rel="replies" type="text/html" href="http://cyw.pe.kr/xe/525512#comment"/>
      <author>
         <name>이우상</name>
               </author>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large&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ff&quot;&gt;&lt;font size=&quot;5&quot;&gt;목회와 자녀교육에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lt;/font&gt;&lt;/span&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large&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ff&quot;&gt;&lt;font size=&quot;5&quot;&gt;속독독서법(두뇌개발) 목회자들에게 전도도구로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lt;/font&gt;&lt;/span&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large&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ff&quot;&gt;&lt;font size=&quot;5&quot;&gt;&amp;nbsp;&lt;/font&gt;&lt;/span&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large&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ff&quot;&gt;&lt;font size=&quot;5&quot;&gt;&amp;nbsp;일시: 매주 월요일 오전 10시- 오후 5시&lt;/font&gt;&lt;/span&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large&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ff&quot;&gt;&lt;font size=&quot;5&quot;&gt;&amp;nbsp;&lt;/font&gt;&lt;/span&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large&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ff&quot;&gt;&lt;font size=&quot;5&quot;&gt;장소: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탑원리 우리교회(유관순기념관옆)&lt;/font&gt;&lt;/span&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large&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ff&quot;&gt;&lt;font size=&quot;5&quot;&gt;&amp;nbsp;&lt;/font&gt;&lt;/span&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large&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ff&quot;&gt;&lt;font size=&quot;5&quot;&gt;교육회비: 3 만원 (교재비 22,000원과 &amp;nbsp;점심식사 대접해드립니다)&lt;/font&gt;&lt;/span&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large&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ff&quot;&gt;&lt;font size=&quot;5&quot;&gt;&amp;nbsp;&lt;/font&gt;&lt;/span&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large&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ff&quot;&gt;&lt;font size=&quot;5&quot;&gt;문의전화: 041-555-9107, 011-711-5007(이우상목사)&lt;/font&gt;&lt;/span&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large&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ff&quot;&gt;&lt;font size=&quot;5&quot;&gt;&amp;nbsp;&lt;/font&gt;&lt;/span&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large&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ff&quot;&gt;&lt;font size=&quot;5&quot;&gt;내용: 속독독서법이 이 시대에 주는 중요성이 크기에 , 교회 부흥에 도구로 사용되기를 소망합니다.&lt;/font&gt;&lt;/span&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large&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ff&quot;&gt;&lt;font size=&quot;5&quot;&gt;&amp;nbsp;&lt;/font&gt;&lt;/span&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large&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ff&quot;&gt;&lt;font size=&quot;5&quot;&gt;개척교회 주일학교 아이들을 교회로 부르고 전도하는데 긴요하게 사용되기를 소망합니다.&lt;/font&gt;&lt;/span&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large&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ff&quot;&gt;&lt;font size=&quot;5&quot;&gt;&amp;nbsp;&lt;/font&gt;&lt;/span&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large&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ff&quot;&gt;&lt;font size=&quot;5&quot;&gt;책한권 2-3분동안에 보고 내용을 파악하는 기적같은 아이들을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lt;/font&gt;&lt;/span&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large&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ff&quot;&gt;&lt;font size=&quot;5&quot;&gt;성경속독법으로도 유익할것입니다.&lt;/font&gt;&lt;/span&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large&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ff&quot;&gt;&lt;font size=&quot;5&quot;&gt;유,초,중,고 등 과정에서 어릴적에 배워야 큰 성과를 거둘 수가 있습니다.&lt;/font&gt;&lt;/span&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large&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ff&quot;&gt;&lt;font size=&quot;5&quot;&gt;&amp;nbsp;&lt;/font&gt;&lt;/span&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large&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ff&quot;&gt;&lt;font size=&quot;5&quot;&gt;아이들은 배우고 훈련시키면 100% 가까이 대부분 속독 독서법이 만들어 집니다.&lt;/font&gt;&lt;/span&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large&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ff&quot;&gt;&lt;font size=&quot;5&quot;&gt;의심하지 마시고, 믿고 한번 참여해 보시기 바랍니다.&amp;nbsp; 속독독서법은 60년이 넘는 세월동안 발전해 왔습니다.&lt;/font&gt;&lt;/span&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large&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ff&quot;&gt;&lt;font size=&quot;5&quot;&gt;&amp;nbsp;&lt;/font&gt;&lt;/span&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large&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ff&quot;&gt;&lt;font size=&quot;5&quot;&gt;60년 넘게&amp;nbsp;발전해온 최고의 속독독서법을 전수받으시고&amp;nbsp; 전도와 교육 목회활동에&amp;nbsp;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lt;/font&gt;&lt;/span&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large&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ff&quot;&gt;&lt;font size=&quot;5&quot;&gt;&amp;nbsp;&lt;/font&gt;&lt;/span&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large&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ff&quot;&gt;&lt;/span&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large&quot;&gt;&lt;span style=&quot;COLOR: #0000ff&quot;&gt;&lt;font size=&quot;5&quot;&gt;주일학교 부흥에 관심있는 목회자들에게 적극 추천해드립니다.&lt;/font&gt;&lt;/span&gt;&lt;/span&gt;&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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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발성클리닉 6월강좌안내</title>
      <id>http://cyw.pe.kr/xe/525509</id>
      <published>2012-05-17T13:54:46+09:00</published>
      <updated>2012-05-17T13:54:46+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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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한국성악아카데미연구</name>
               </author>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발성클리닉 2012년 6월 강좌안내&lt;/p&gt;
&lt;p&gt;한국성악아카데미연구소(&lt;a href=&quot;http://www.voicemusic.co.kr/&quot;&gt;www.voicemusic.co.kr&lt;/a&gt;)의 클리닉센터에서는 현재 발성클리닉(95기)과 음치클리닉, 음성(발음)클리닉, 기초성악교실, 보컬트레이닝, 보이스트레이닝, 전문성악클래스, 개인성악레슨, CCM보컬, 단체초청강좌, 교회문화센터개설, 찾아가는 성악교실, 노래부르기 세미나 등 다양한 클래스의 2012년 6월과정 신청을 받고 있습니다.&lt;/p&gt;
&lt;p&gt;특히 발성클리닉은 클래식, 뮤지컬, 일반음악, 교회음악, CCM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누구나 체계적인 발성과 음악표현법을 전문적으로 배우고 이를 실제 무대현장에서 함께 연주하며 직접 참여하는 과정입니다.&lt;br /&gt;총 12주(초급과정)의 과정으로 일반인, 음악애호가, 목회자, 찬양대, 합창단, 지휘자, 학생 등 누구나가 참여하실 수 있으며 국내 최고의 교수진과 함께 개인마다의 특성을 바탕으로 체계적이고 세심한 부분까지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lt;/p&gt;
&lt;p&gt;발성클리닉 특징&lt;br /&gt;* 거친 소리, 짧은 호흡, 무리한 고음, 작은 소리 등을 올바른 발성으로 클리닉합니다. &lt;br /&gt;* 음정, 박자에서부터 수준 높은 음악적인 지식과 테크닉을 배우실 수 있습니다. &lt;br /&gt;* 발성의 원리를 이해하며 체험함으로서 노래와 일상생활에 활력을 가져다 드립니다. &lt;br /&gt;* 전문적인 교수진으로부터 유럽과 미국 등의 폭넓은 음악을 접하실 수 있습니다. &lt;br /&gt;* 매년 3회 개최되는 음악회를 통하여 배운 것을 무대에서 실현하실 수 있습니다.&lt;/p&gt;
&lt;p&gt;일시: 2012년 6월초 개강 / 12주 과정 (현재 신청접수 중)&lt;br /&gt;장소: &lt;br /&gt;서울 &lt;br /&gt;강동스튜디오(강동구 명일동, 광진구 능동) / 강남스튜디오(동작구 사당1동, 사당2동) / 강서스튜디오(마포구 서교동, 창전동, 대현동)/ 강북스튜디오(은평구 응암동), 대전, 광주&lt;br /&gt;고양스튜디오(고양시 덕양구), 분당스튜디오(성남시 분당구) / 대전스튜디오 / 광주스튜디오&lt;br /&gt;* 위의 11곳의 스튜디오가 준비되어 있으며 시간과 장소는 스튜디오와 클래스마다 다릅니다. 홈페이지(&lt;a href=&quot;http://www.voicemusic.co.kr/&quot;&gt;www.voicemusic.co.kr&lt;/a&gt;)의 강좌안내를 방문하시면 더욱 자세한 안내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lt;/p&gt;
&lt;p&gt;한국성악아카데미연구소 클래스소개&lt;br /&gt;발성클리닉 / 음치클리닉 / 음성(발음)클리닉 / 기초성악교실 / 보컬트레이닝 / 보이스트레이닝 / 전문성악클래스 / 개인성악레슨 / CCM보컬 / 단체초청강좌 / 교회문화센터개설 / 찾아가는 성악교실 / 노래부르기 세미나 등&lt;/p&gt;
&lt;p&gt;홈페이지: &lt;a href=&quot;http://www.voicemusic.co.kr/&quot;&gt;www.voicemusic.co.kr&lt;/a&gt;&lt;br /&gt;신청 및 문의: 070-8791-7111 / 총무 이은진 010-6273-0698&lt;br /&gt;문의메일: &lt;a href=&quot;mailto:webmaster@voicemusic.co.kr&quot;&gt;webmaster@voicemusic.co.kr&lt;/a&gt;&lt;br /&gt;&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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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맑고 깨끗한 마음</title>
      <id>http://cyw.pe.kr/xe/525449</id>
      <published>2012-05-17T07:35:02+09:00</published>
      <updated>2012-05-17T07:35:02+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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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최용우</name>
                  <uri>http://cyw.pe.kr</uri>
               </author>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매일 아침 차 한잔 마시면서 전해드리는 햇볕같은이야기&lt;br /&gt;♣♣그 4364번째 쪽지!&lt;/p&gt;
&lt;p&gt;&amp;nbsp;&lt;/p&gt;
&lt;p&gt;□ 맑고 깨끗한 마음&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옷이 더러워지면 세제를 넣고 빱니다. 얼굴이 더러워지면 비누로 세수를 합니다. 상처가 나면 소독약으로 닦고 약을 바릅니다. 입에서 냄새가 나면 치약으로 치카 포카 푸카 오고로로로로로욱꿀꺽?&lt;br /&gt;그런데 마음이 더러워지면 무엇으로 씻어야 하는지 아십니까? 눈물입니다. 눈물로 회개하면 마음이 정화가 됩니다. 그것을 반성이라고 하지요. 하지만 마음을 깨끗하고 순결하게 하려면 반성이나 후회나 참회나 참선이나 그런 방법으로는 안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은 우리 마음에 묻은 그 어떤 죄악의 얼룩이나 흔적도 새하얗게 지워서 깨끗하고 순결한 마음이 되게 해줍니다. &lt;br /&gt;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마5:8)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안 보인다고도 하지 마세요. 마음을 깨끗하게 하면 다 보입니다. 마음이 맑고 깨끗한 엘리야 한 사람이 탁하고 더러운 마음을 가진 850명을 무찔렀습니다. &lt;br /&gt;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깨끗해진 마음은 잘 지키지 않으면 바깟 어두운 곳으로 떠돌던 귀신이 저희 동무 여럿을 데리고 다시 들어올 수 있으니 철저하게 지키고 단속을 해야 합니다. 청빈(淸貧)한 생활을 해야 맑은 마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침묵언(沈默言)의 생활을 해야 마음의 투명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순종(純種)의 생활을 해야 마음에 힘을 얻습니다. &lt;br /&gt;맑고 깨끗한 마음에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청빈 침묵언 순종의 생활은 맑고 깨끗한 마음의 힘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이론이 아니라 실체로 보여줄 것입니다. ⓞ최용우&lt;/p&gt;
&lt;p&gt;&amp;nbsp;&lt;/p&gt;
&lt;p&gt;♥2012.5.17 나무날에 좋은해, 밝은달 아빠 드립니다.&lt;br /&gt;♥글에 공감하시면 추천 버튼을 꾸욱 눌러주시는 센스^^&amp;nbsp; &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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