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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읽을꺼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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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nguage>ko</language>
        <pubDate>Sun, 05 Feb 2012 22:02:4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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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아이들은 왜 높은 곳에 올라가기를 좋아할까?</title>
            <dc:creator>황부일목사</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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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아이들은 왜 높은 곳에 올라가기를 좋아할까?&lt;/span&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아이들은 왜 높은 곳에 올라가기를 좋아할까? 아이를 길러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아이들의 모습을 경험했음을 기억하리라... 그러나 그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4px&quot;&gt; &lt;/span&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4px&quot;&gt;&lt;/span&gt;&amp;nbsp;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4px&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아이들은 막 걸음마를 배우면서부터 시작하여 초등학생이 되도록 까지 높은 곳에 오르기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앉기를 좋아한다. 먼저 야트막한 밥상부터 올라가기 시작하여 의자나 쇼파, 그것도 쇼파에서 제일 높은 등받이까지 올라가 앉는다. 방이나 거실에 올라갈 수 있는 곳이라면 다 올라가 본다. 뿐만 아니라 나가서 놀 나이가 되면 동네 골목이나 놀이터에 올라가 볼 수 있는 곳이라면 다 올라가 본다. 버려진 가구들이나 공사하려고 갖다 부어놓은 모래더미, 벽돌더미, 세워진 트럭 위, 끝없는 아파트계단, 옥상, 올라가는 놀이기구 등 보이는 것이면 모두가 다 오를 대상처럼 보이는지 올라 가다가 넘어지고 미끄러지고 떨어져 울면서도 또 올라간다. 물건들을 뒤엎고 깨고 넘어뜨리면서까지 올라간다. 그래서 때론 엄마들을 놀라게 하고 혼나면서까지 오르고 또 오른다. 위험한 느낌이나 두려움도 없다.&lt;/span&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언젠가 장안동에 살 때의 일이다. 연립주택이 많은 골목을 지나가는데 어디서인지 아이의 심상치 않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보통 울음소리가 아니라 급박한 괴로움의 울부짖음이었다. 나는 그 소리가 다급한 상태임을 직감하고 그 소리 나는 방향으로 재빨리 둘러보았다. 그랬더니 이제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 녀석이 연립주택 담에 끼어 버둥거리고 있는게 아닌가. 그 담은 일정한 간격으로 윗부분이 요철처럼 들어가고 나오게 되어있는데 그런 담의 들어간 부분은 어른 팔뚝만큼이나 굵은 쇠파이프 세 줄로 가로질러 있었다. 그 꼬마 녀석은 거기에 올라가 놀다가 내려오다 그랬는지 그 쇠파이프 사이에 머리가 걸려 버둥거리며 비명에 가까운 울음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얼른 달려가 머리를 위로 올려서 빼내어 주었다. 그 꼬마 녀석은 너무 놀랬는지 걸린 머리 부분이 아파서인지 계속 울면서 집을 찾아 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며 내 심장이 뛰고 있음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lt;/span&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아이들은 왜 이렇게 높은 곳을 위험한지도 모르고 오르기를 좋아할까?&lt;/span&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나는 언제부터인지 이것이 궁금했다. 나도 아마 아이를 셋씩이나 키우면서 이런 아이들의 공통점을 거듭 발견 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꼬맹이들이 올라가다 떨어지지는 않을까, 높은데서 뛰어내려 다치지는 않을까 내심 신경 쓰며 조바심 하며 붙잡아주고 했던 것이 걱정 반, 의문 반으로 발전했을지도 모른다. 우리 아이들도 어렸을 때 보면 그렇게 높은 데를 올라가기를 좋아했다. 큰 녀석은 돌이 지나면서부터 밥상에 올라가 앉기를 좋아했고 그러면 우리 집사람하고 나하고는 밥상에 있는 음식을 재빨리 바닥에 내려놓고 상전아래 하인처럼 고개 쳐 박고 눈치 보면서 밥을 먹기도 여러 번 했다. 또 그 녀석은 방벽에 붙어있는 높은 책꽂이를 올라가려고 책꽂이 칸 좁은 면을 계단 층처럼 디디면서 몇 칸씩 올라가려고 여러 번 시도했는데 그때마다 우리 집사람이나 나는 놀라서 붙잡아 내리곤 했다. 그 뿐 아니라 조그마한 다락이 있는 집에서 살았던 적이 있는데 큰 녀석과 연년생인 딸아이는 서로 그 다락에 올라가 그곳이 마치 중요한 요새나 되는 듯 자기 물건들을 올려다 진 치려 했고 그곳에서 놀면서 잠을 자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는 왜 이렇게 애들은 높은데 올라가기를 좋아할까에 대해 궁금해 본 기억은 없는 것 같다. 지금에 와서 이 궁금증은 가끔씩 나를 심연에 잠기게 한다. 누가 들으면 쓰잘데기 없는 생각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이들이 왜 높은 곳을 자꾸 올라가려 하는지 궁금한 것을 숨길수가 없다.&lt;/span&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바벨탑을 쌓던 후손들이라서 일까?&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창세기 11장에 보면 인류가 흩어지기 전, 언어가 혼잡되기 전에 우리 인류의 조상된 자들이 하나님 앞에 교만하게도 바벨탑을 쌓았다. 인간의 지혜와 능력과 방법으로 높아지려고 했었다. 헛된 이상을 실현시키려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징벌로 인해 수포로 돌아갔고 오히려 혼잡과 흩어짐만 가져왔다. 이것이 내내 인간들의 내면 속에 욕구불만으로 앙금처럼 남겨져 있어 혈육 적으로 유전되어 내려오는 것은 아닐까? 지금도 인간들이 끝없이 문명의 바벨탑을 쌓아가며 높은 이상의 비전을 바라는 것을 보면 연관성이 없지 않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이 하나같이 높은데 올라가는 것을 좋아 할 리가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어쩌면 아이들은 높은데 올라가기를 좋아 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작은 것에 대한 콤플렉스를 본능적으로 느껴서 그렇게도 높은데 올라 서려하는 것은 아닐까?&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우리는 실제로 우리 아이들이 의자나 책상 위. 식탁 위 등에 올라가서 “내가 더 높으지? ”“아니야 내가 더 높아” 하며 형제나 친구들끼리 모여 놀면서 서로 어디 한군데씩 올라가 서서 서로 높 다며 키 재기 하듯이 까치발로 서서 노는 아이들을 본다. 뿐만 아니라 쇼파나 쇼파 등받이까지 올라가서 “내가 더 크지?” “형아 보다 더 크고 엄마보다 더 크지롱!”하며 자신이 그렇게 실제로 커진 것 같은 기분을 보이는 것을 볼 때 그렇다. 인간은 뭐든지 남보다 작다는 것, 남 밑에 아래 있다는 것을 좋아하는 자 없다. 이런 것이 다 순진한 어린아이 때 부터 숨김없이 보여 지는 것은 아닐까?&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어쩌면 아이들은 아직 두려움이나 위험이나 고소공포증을 못 느끼는 감각이 미숙한 때여서 인지도 모른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쬐그만한 녀석들이 떨어지면 크게 다칠 수도 있는 곳엘 담력 훈련받는 특수부대 요원처럼 막 올라간다. 어른들이 볼 때 아찔한 담벼락이나 높은 축대위에 올라가서도 서커스 단원처럼 잘 노는 아이들을 종종 본다. 그런 아이들의 심리를 알아서인지 요즘 아이들 놀이터를 보면 올라가는 놀이기구를 많이 만드는데 그게 좋은 건지는 생각해볼 문제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내가 아는 어느 집사님의 아이는 겨우 걸음마 할 때 의자타고 책상타고 장롱 위까지 올라가서는 거기서 겁 없이 시원하게 대변까지 보는 여유까지 보였다는데 아이들은 높은데 올라가 내려다보는 것이 겁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야릇한 흥미를 느끼는지도 모른다. 이런 것들이 커가면서 모험심을 주고 산악인 허영호씨나 엄흥길씨 같이 끝없이 높고 험준한 곳을 죽을지 살지도 모르면서 이곳저곳 오르게 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려가는 어려움과 위험과 허무함과 결국엔 다시 내려와야 하는 맥 빠지는 인생의 하양 길을 체험하며 실감해 보지 못해서 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내려올 것이 두렵고 걱정 되어서라도 그리 쉽게 올라가려 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나는 아이들이 보여주는 본능적이고 순진한 상태의 의문점을 원죄로 인한 모습에서 찾아보았다. 인류를 망케 하고 그나마 잠시 머무는 인생의 삶마저 헛된 것을 쳐다보게 하는 뱀의 미혹이 얼마나 무섭고 교활 했던가.&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하와는 뱀의 유혹에 빠져 쳐다보아서는 안 될 선악과를 따먹었다. 먹으면 죽는데도 그것이 먹음직했고 보암직했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여겨졌던 것이다. 이것이 범죄 이후의 인간들의 본성이 되고 욕망이 된 것이다. 거기다가 사탄은 지금도 그 헛된 욕망의 본성을 부채질하고 있는 것이다. 자꾸 위를 쳐다보게 하고 높아져야겠다는 욕망을 충동질 시키고 끝없이 오르게 한다. 어디든지 무엇이든지 오를 것을 찾고 그것이 때론 위험 하든지 경쟁자가 많든지 떨어지고 다치는 일이 있어도 오르려 한다. 하나님에게까지 라도 올라 보겠다는 바벨탑 후손답게 말이다. 먼저 누가 올라가 있어도 서로 밀치며 올라가 그 자리에서지만 금 새 또 올라오는 자에 의해 밀려 떨어지고 마는 인생이 되었다 이런 인생의 상태를 숨김이 없이 그대로 보여주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에게서 우리는 그 모습을 본다. 아이들도 높은 데로 왜 올라가는지도 모른 채 올라가려고만 한다. 몸의 균형도 제대로 못 잡으면서 발도 헛디디면서 맹목적으로 그냥 올라가고자 매달리며 안간힘 쓰는 아이들 모습 속에서 사탄에 의해 미혹 받고 충동질 받는 헛된 욕망의 본성이 우리 인생에게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예수님은 서로 니가 높으니 내가 높으니 다투는 어린이 같은 제자들에게 이방인들은 집권자가 되려하고 남을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는 자가 되려 한다고 말씀했다. 죄인 된 세상 모든 인간들의 중심 목표가 높은데 오르고 앉으려는데 있음을 말씀해 주는 내용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제자들에게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크고 으뜸 된 모습과 참 가치 있는 삶을 말씀해 주셨다. 그것은 낮아지는 것이었고 종 된 입장에서 섬기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먼저 섬기러 오신 삶의 본을 보이셨다. 그래도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그리스도의 교회된 자이면서도 서로 높아지려고 하고 있다. 본을 보여야할 자들이 오히려 서로 크고 높다며 외형적인 것 가지고 키 재기하고 있다. 아이들처럼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내가 더 크고 높지 하며 서로 으쓱거리며 자랑 질 하고 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높은데 올라가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의 모습 속에 우리의 모습이 있다. 우리의 과거가 있고 원죄로 인한 본성이 있고 떨어질 줄 모르고 오르기만 하려는 허망한 욕망의 인생이 있다. 또한 어린애 같은 한심한 어른의 모습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하나님의 주권의 자리까지 올라보겠다는 어리석은 인간들의 교만함이 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나는 가끔씩 “아이들이 왜 저렇게 위험함도 모르고 높은데 올라가기를 좋아하지요?” 하며 걱정스러운 듯이 말하는 자들에게 “그것이 순진한 아이들의 본 모습입니다. 그런 본성을 가지고 우리 인생이 태어남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지요. 어른들 가운데도 보면 그런 높은 데로 올라가고 높은 자리에 앉기를 무턱대고 좋아하는 어린아이 같은 어른들이 많은 것을 볼 때는 더 걱정스럽죠.” 라고 웃음 지며 말해준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어린아이들은 왜 높은데 올라가기를 좋아할까?&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인간이 태어나서 그렇게 살다가 떨어져 갈 것도 모르고 그저 높은데 오르기만 할려는 인생인 것을 숨김없이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인 것이다. 높은데 올라가면 마냥 좋은 것 같고 날아갈 것만 같은 기대 속에 꿈꾸는 삶의 인생임을 아이들의 숨김없는 본능적 행동을 통해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높아지는 자는 낮아지고 낮아지는 자는 높아진다는 진리를 모르고 사람들에게서 인정받고 높아지려 하는 어린아이 같은 신앙인들을 교훈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은 순진하고 때 묻지 않은 거울이 되어 우리들의 헛된 욕망을 가진 인생을 그대로 비춰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lt;/span&gt;&lt;/p&gt;&lt;/p&gt;&lt;/p&gt;&lt;/p&gt;&lt;/p&gt;&lt;/p&gt;&lt;/p&gt;&lt;/p&gt;&lt;/p&gt;&lt;/p&gt;&lt;/p&gt;&lt;/div&gt;</description>
                        <pubDate>Sat, 04 Feb 2012 12:49:2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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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아기들은 왜 팔을 만세 하는 것처럼 하고 자는 걸까?</title>
            <dc:creator>황부일목사</dc:creator>
            <link>http://cyw.pe.kr/xe/501630</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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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아기들은 왜 팔을 만세 하는 것처럼 하고 자는 걸까?&lt;/span&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아기들의 모습은 그저 이쁘기만 하다. 근래에 보기 드물게 생명을 생명의 주관자에게 맡기고 열 번 째 아이를 낳은 어떤 대단한 엄마의 고백에 의하면 아기의 모든 것이 다 귀엽고 우는 것도 변을 누는 것 도 이쁘다고 했다.&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4px&quot;&gt; &lt;/span&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4px&quot;&gt;&lt;/span&gt;&amp;nbsp;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4px&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나는 그 동안 그저 이쁘기만 한 것 같은 아기들의 모습 속에서 인생이 어떤 상태로 왔는지 그 이면을 엿 보았고 죄인 된 인생의 숨어있는 본 모습을 연기가 없는 순진한 아기들의 모습을 통해 그 단면이나마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아기는 태어나면서 왜 먼저 우는 걸까?” 라는 제목으로 발표 할 수 있었고 또한 “아이들은 왜 높은데 올라가기를 좋아할까?” 라는 제목의 글로 내 딴에는 그럴싸한 느낌으로 써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나는 아동심리나 육아교육이나 그런데 전문가는 아니고 또는 아기들을 잘 아는 소아과 전문의는 더더욱 아니다. 특별히 그런데 관심을 같고 언제나 세심히 살펴서 논문을 써보려는 자도 또한 아니다. 나는 그저 이남이녀의 아버지로서 아이들을 키워가면서 아이들의 같은 모습과 같은 행동에서 신비함과 의문을 가져보면서 내 나름대로의 생각과 판단을 피력해본 것뿐이다. 이번에는 “아기들은 왜 팔을 만세처럼 하고 자는 걸까?”에 대해 생각한 것을 얘기하고자 하는데 그렇다고 아기편 시리즈를 내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저 아기들의 이 모습이 왠지 신비로 왔고 매우 궁금스러웠던 것이다.&lt;/span&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4px&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아기들이 두 팔을 만세를 하는 것처럼 위로 들고 자는 것을 보았는가? 아기들은 신기하게도 잠을 잘 때 양 팔을 위로 벌리고 잠을 잔다. 나는 그런 똑같은 모습을 우리아이들이 아기일 때 보았고 또한 다른 아이들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큰아들 녀석이 17년 전에 그랬고 지금 8개월 된 늦둥이 또한 분명 그렇게 잔다. 물론 중간 녀석들도 아기 때 그랬고 다른 집 여러 아기들도 그렇게 팔을 반쯤 위로 벌리고 서서 만세 하는 자세처럼 하고 잠자는 것이었다. 어떻게 아기들은 한결 같이 그렇게 자는 걸까? 그런 자세의 잠자리가 편해서 일까? 그래서 나는 그렇게 나도 한번 자보기로 했다. 가능하면 아기들의 자는 모습과 똑같이 자세를 취해보고 잠에 들어 보려 했지만 그것은 부자연스럽고 불편한 자세였다. 그래서 편하게 팔을 내리고 잠을 청했는데 나도 그렇게 자본지 거의 50년이 되었으니 당연히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런 잠자는 자세가 편한 자세라면 많은 사람들이 그런 자세로 계속 잠을 잘 것이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아기 때가 지나 커가면서 그렇게 팔을 위로 벌리고 자던 자세는 사라진다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아이들을 키우면서 관찰해 보니까 분명히 그랬다. 그렇다면 아기들은 불편한 자세지만 잘 움직이지 못하는 때이니까 맘대로 움직일 때까지 어쩔 수 없이 그런 자세로 자는 걸까? 그러나 그것도 그렇지 않았다. 가족을 알아보고 구르고 엎드려 기고 한두 발자국씩 띨 정도로 제법 잘 움직일 때가 되어도 잘 때 보면 그런 자세로 잠자는 것이 보여 지는 것을 보면 그런 원인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왜 일까? 나는 아기들이 거의 모두가 그렇게 자는 것을 우리 아이들에게서 보고 또한 다른 아이들을 통해 확인하면서 왠지 의문이 생겼고 자꾸만 관심이 가졌다. 할 일없는 사람처럼 별 것을 다 관심 갖고 이상히 여긴다고 누가 나무랄지도 모르지만 나는 큰 녀석에 비해 16년이나 아래인 이제 8개월 된 늦둥이를 선물로 받고 새삼스런 기분으로 키우다 보니까 아기들이 만세 하는 자세로 자는 것을 좀 더 절실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또한 심방을 다니면서 똑같은 모습으로 그렇게 새근새근 잠자는 아기들을 보면서 내게는 신비한 감이 더욱 차올랐고 의문은 다시 새롭게 작용되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어떻게 아기들은 꼭 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한 모습으로 잠을 자는 걸까? 엄마 뱃속에서 10개월 동안 오금한번 못 펴고 웅크리고 있었던 몸이 태어나면서 이제 쭈욱 펼 수 있자 얼마간 계속 그것을 만끽하는 모습에서 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10개월 동안 웅크리고 있다는 것은 아기에게 너무 힘들고 고달픈 기간이 아닌가? 이제 우리는 하루도 그렇게 못 있으리라... 그래서 맘껏 펴고 자는 걸까? 아니면 아늑한 엄마 뱃속에서 떨어지고 내 팽개친 듯한 허탈함의 표현이고 몸짓인가?&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나는 좀 더 의미심장한 요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그것은 이미 전에 “아기는 태어나면서 왜 우는 걸까?”에서 생각했던 것처럼 전혀 어떤 배움도 훈련도 혹은 다른 사람의 의도로 인한 몸짓이나 자세 태도도 없는 어린 아기들의 공통적인 모습에는 반드시 깊은 계시적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다. 생명의 원천 되신 조물주께서 그들을 태중에서 장부를 신묘막측 하게 조직하시고 내보내시면서 가장 꾸밈이 없는 순진한 아기들의 같은 모습과 몸짓을 통해 간접적인 무언의 계시를 형용해주시는 것이라는 판단이다. 그의 창조하신 모든 것이 그를 나타내고 보여주시는 것처럼 사람에게는 더할 것이리라... 더욱이 순진무구의 아기들 모습에는 인생의 근원과 몰랐던 원리나 의문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그렇다. 누가 아기들을 그런 모습으로 꼭 같이 행동하게 할 수 있는가? 태어날 때 아기를 먼저 만지는 산부인과 의사가 그렇게 유도 할 수 있는가? 젖 빨리며 옆에서 자는 엄마가 그렇게 자세를 만들고 시킬 수 있는가? 그들의 요람이 그런 자세를 만드는 틀이라도 되어서 인가? 아기들 끼리 울음소리를 통해 단결이라도 했단 말인가?&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아기들을 누가 그렇게 자라고 조장할 수도 또는 도울 수도 더 나아가 강제라도 그렇게 시킬 수 없다. 아기들의 엄마가 온 가족이 전 세계적으로 함께 공감대를 가지고 운동하고 동시에 실시할 수도 없는 일이다. &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그런데 어떻게 아기들은 똑같이 팔을 만세를 부르는 것처럼 위로하고 자는 걸까? 그렇다. 그들의 모습은 꾸밈이 없는 인생의 거울이다. 인생의 중요한 우리가 찾아 보아야할 본연의 모습이 꾸밈이 될 수 없는 아기들의 순수한 모습을 통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아기들은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빈손으로 온 인생을 그렇게 팔 벌리고 자는 모습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으로 돌아가리라는 욥의 증거를 꾸밈없이 연출해 보여 주는 것이다. 들풀 꽃과 같은 헛되고 허무한 인생의 실체를 모르거나 잊고 살아가는 우리 어른들에게 동일한 몸짓이나 모습으로 나타내주는 것이다. 예전에 철학을 한 유명한 인생의 선배가 제자들에게 내가 죽으면 관 양쪽에 구멍을 뚫어 내 팔을 그리로 내놓게 하고 메고 가라고 시켰다고 했다. 그래서 보는 사람들이 의문을 가지고 물어보거든 사람은 빈손으로 왔다가 이렇게 빈손으로 간다고 일러 주라 했던 얘기가 기억난다. 그래도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갈 것처럼 악착같이 무섭게 살고 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에 비해 지금 주어진 것이 있다면 만족 할 줄 알아야 할 텐데 끝없는 욕심에 죄를 잉태하며 살아가고자 한다. 빈손의 모습으로 팔 벌리고 자는 아기 때 겨우 그때만 욕심 없이 사는 기간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아기들은 더불어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아직 욕심 없는 순진한 아기의 모습을 보여준다. 엄마 하나로 그저 족한 아기의 모습이 자연적으로 그렇게 표현해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점점 커 가면서 그런 팔 벌린 몸짓이 수그러들고 묘하게도 팔이 가슴 쪽으로 오므려서 잠자는 모습으로 변화되어져 갈 때 그때부터 자꾸 움키려하는 욕심을 가진 아이로 청년으로 어른으로 자라가고 살아가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욕심과 함께 커가는 인생의 참모습이 되는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아! 나는 감히 이런 것을 본 것이다. 아기의 모습에서 인생을 보고 아직 욕망과 힘겹게 씨름하며 잠잘 때에도 이리저리 뒤척이는 내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p&gt;
&lt;p&gt;&lt;/p&gt;
&lt;p&gt;&lt;/p&gt;
&lt;p&gt;&lt;/p&gt;
&lt;p&gt;&lt;/p&gt;&lt;/p&gt;&lt;/p&gt;&lt;/p&gt;&lt;/p&gt;&lt;/p&gt;&lt;/p&gt;&lt;/p&gt;&lt;/div&gt;</description>
                        <pubDate>Sat, 04 Feb 2012 12:45:48 +0900</pubDate>
                                </item>
                <item>
            <title>아기는 태어나면서 왜 먼저 우는 걸까?</title>
            <dc:creator>황부일목사</dc:creator>
            <link>http://cyw.pe.kr/xe/501627</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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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좀 엉뚱한 얘기 같지만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왜 먼저 우는 걸까? 저를 기대하며 모두가 기뻐하고 좋아하는 축복된 날인데 방긋방긋 웃으면 안 될까? &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우리 큰 아이가 태어 나던 날 나는 초조함 속에서도 가끔씩 들리는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줄곧 그 궁금증에 사로잡혀 있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아내의 진통이 멎고 우리 아이의 울음소리가 분만실에서 울려 나오고 부터는 아예 여유 있게 신생아실을 오가며 꼬물락 거리고 있는 갓난아기들을 창문 너머로 들여다보면서 그 생각에 잠겼었다. &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왜 먼저 우는 걸까? 세상으로 밀려 나가는 인생의 첫 관문이 너무나 좁고 힘들어서일까? 아늑하고 편안한 엄마의 뱃속에서 언제나 그렇게 머물러 있고 싶은데 뭔가에 의해서 떠밀려지고 엄마로부터 떨어지는 단절의 슬픔을 예민하게 느껴서일까? 그나마 엄마로부터 이어진 생명의 탯줄마저 끊기는 외로운 슬픔과 삶의 위협을 본능적으로 느껴서일까? 이제 살아갈 세상에 대한 걱정이 먼저 앞서서일까?&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죄의 형벌로 인해 잉태와 출산의 고통을 받아야 하는 여인들의 기구한 인생을 엄마의 몸에서 자연스러운 태교를 통해 들은 대로 느낀 대로 자기를 잉태한 엄마를 통해 막바지에 절감하면서 그 죄의 형벌의 고통이 얼마나 크고 무서운가를 몸부림치는 엄마의 몸을 통해 가장 가까이서 옥죄어오듯 전달됨을 여린 몸으로 느끼면서 애처로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실감했기 때문일까?&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산고는 멀쩡했던 사람을 졸지에 초죽음 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순간에 볼 수 있는 지옥의 아비규환이랄까? 그것은 실로 견디기 힘든 괴로운 고통을 보는 또 하나의 고통이었다.&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전날 오후3-4시경 배가 아파온다는 아내를 데리고 병원엘 갔는데 아내는 긴긴 밤새 내내 진통하다가 다음날 아침 8시가 넘어서야 분만했다. 정말 그때까지의 시간은 처절한 것이었다. 나는 반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줄곧 안절부절 못하면서 진땀을 흘리며 괴롭고 고통스러워 신음하는 아내의 손을 대책 없이 부여잡고 간절히 하나님만 불렀었다. 그때 그 고통의 신음, 괴로움의 몸부림 그것은 참으로 뼈저린 진통이었다. 아내는 너무 힘들어 했고 괴로워 했다. 나는 그때 잠시 몇 시간 동안 주어지는 것이지만 하와로 인해 주어진 죄의 형벌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실감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그렇다면 영원히 받게 될 죄의 형벌의 고통은 얼마나 무섭고 클까? 나는 그것을 몇시 간 동안이지만 뼈저리게 절감했다. 그렇게 옆에서 보기조차 고통스러운 것인데 아이를 낳는 본인은 어떠했을까? 나는 그때 아내의 몸부림치는 진통을 피해 안보고 안 들리는 곳으로 도망가고 싶은 절실한 심정을 몇 번씩이나 느꼈다. 정말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처절한 고통의 모습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아기는 도대체 태어나자마자 왜 먼저 우는 걸까? 방긋방긋 웃으면 안 되는 걸까? 태어나자마자 아기가 웃는 것을 보았다는 자는 혹시 없을까?&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우는 것은 본능적이고 선천적이나 웃는 것은 크면서 배우는 것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분만실 밖에서 안절부절 못하면서 자기의 탄생을 초조히 기다리는 가족들을 위해 이제나 태어났다고 알리는 분명한 신호가 웃음보다 울음이 더 생생하고 확실했기 때문일까?&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아니면 금방 나온 아기의 두 다리를 거꾸로 쥐고 ‘이 녀석 여러 사람 혼나게 했다’며 오래토록 멍이 들도록(그것은 몽고반점 이지만) 볼기를 때리는 산부인과 의사의 커다란 손 때문일까? 아니면 태어나자마자 보고 느끼는 난생처음의 살벌한 분만실의 그 분위기 때문일까? 마치 못되고 흉악한 죄인을 채워놓고 고문하며 취조할 때 쓰기위해 만들어진 싸늘한 형틀 같은 분만대, 사정없이 만들어진 섬뜩한 의료기들, 집게, 싸늘한 메스, 가위, 피 묻은 거즈, 약품냄새보다 더 짙게 풍겨지는 역한 피비린내, 죄인 다루 듯한 간호사와 의사의 냉정하고 짜증 섞인 소리, 그들의 엄하고 차가운 표정, 그곳에서 뒤틀림 당하듯이 채워져 몸부림치는 고통의 비명소리 뭐 이런 살벌하고 무서운 상태가 아기를 놀라게 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살벌한 분만실이 없었던 시대, 따뜻한 온돌방에서 경험 있는 이웃의 중년 아주머니나 가까운 할머니들이 자기 일처럼 다정히 정성껏 산파 역할 해 주던 그때도 아기는 울었던 것인데 그렇다면 그것도 이유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왜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응애 응애”하고 우는 걸까? 방긋방긋, 방글방글, 기분 좋게 웃으면서 나오면 안 될까? 모두가 다 기뻐하고 좋아 하는데, 하나같이 자신의 탄생을 축하하며 즐거워 해주는데 왜 우는 걸까? 이것이 엉뚱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매우 궁금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산부인과 의사에게 한번 진지하게 물어볼까도 했다. 아니 그냥 슬쩍 신생아실을 들락 거리는 간호사에게 농담반조로 한번 건네 보고도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의학적이고 논리적이고 또 어떤 체험적인 대답으로 내 궁금증을 풀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뭔가 막연한 것이지만 아기의 첫 울음소리에는 누구도 감히 생각할 수 없었던 굉장한 어떤 비밀적인 이유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것이 인생의 커다란 숙제같이 느껴졌고 이것을 아는 것에는 인생의 엄청난 비밀이 드러나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그것의 궁금증이 더하면 더할수록 매우 심각함과 진지함을 느꼈고 반면에 매우 설레임도 느꼈다. 그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들이 내게 어떤 기발한 확신을 가져다주는 것이 생겨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그것은 번뜩이는 영감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 답을 나름대로 직감하며 생각해 낼 수 있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그렇다, 갓난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먼저 우는 것에는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울음소리에는 뭔가 중요한 것을 잊고 사는 우리 인간 모두가 들어야 하고 알아야 하는 무언의 크고 깊은 인생의 근원적인 의미가 꾸밈없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우리 죄인 된 인생의 전부가 바로 암시되어져 있는 것이다. 그것은 빈주먹으로 왔다가 빈주먹으로 돌아가는 슬프고 허무한 인생을 아기는 엄마의 힘들고 어려운 좁은 문을 통해 막 출발하면서 본능적으로 느낀 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인생은 슬픈 것임을 본성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일찍이 성경에서 야곱이나 모세의 인생 말년을 통해 고백되고 정리되었던 것처럼 우리 인생의 삶에 자랑할 것이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했지 않았던가. 진노의 삶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인생이기에..... 그래서 구원과 회복된 삶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다던 솔로몬 왕도 말년에 고백하기를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일평생은 어두운데서 먹고 번뇌와 병과 분노가 있다고 했고 인생은 잠시 피었다가 사라지는 광야의 들풀 꽃과 같이 잠시 적이고 헛되다고 했는데 바로 이런 고생과 허무한 인생의 슬픔을 아기는 태어나는 과정을 통해 순진하고 예민한 감각으로 느끼면서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의 슬픈 인생의 진실이 꾸밀 수 없는 아기의 울음 속에 증거 되고 있는 것이다. 오염 안 된 순진한 몸으로 세상을 처음 대하면서 이 세상이 어떤 곳임을, 이 세상 삶이 어떤 것임을 느낀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거짓 없는 그의 순수한 울음이 인생과 세상이 어떠함을 만 천하에 고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 갓 태어나는 순진무구한 아기만이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느낌이요 진실하고 심각한 표현인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고 결국 모두로부터 떨어지는 영원한 외로움의 슬픈 인생을 어머니 태로부터 떨어지면서 고난의 그 인생을 감지하는 것이다. 인생은 고난을 위해 났다고 성경도 증거하고 있지 않은가?&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그리고 아이는 자라가면서 웃음을 배워 가리라. 그리고 다시 웃음을 잃어버린 늙은 인생의 슬픈 말년이 될 때까지 인생의 참 슬픈 진실을 잊어버리고 살아 가겠지….&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나는 우리 큰 아이가 태어나던 날 이런 슬픈 세상과 인생에 대한 진실한 고함을 갓난아기의 서글픈 울음을 통해 듣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웃지 않고 먼저 울 수밖에 없음을 나는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었다. &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좀 엉뚱한 얘기 같지만 이것은 내게 있어 난생 처음 듣는 인생의 소중한 울음 소리였던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p&gt;
&lt;p&gt;&lt;/p&gt;
&lt;p&gt;&lt;/p&gt;&lt;/div&gt;</description>
                        <pubDate>Sat, 04 Feb 2012 12:40:50 +0900</pubDate>
                                </item>
                <item>
            <title>교회에서 감사패와 공로패 증정은 불의한 일</title>
            <dc:creator>황부일목사</dc:creator>
            <link>http://cyw.pe.kr/xe/489978</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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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언제부터인가 교회에서 노회에서 교단 총회에서 또는 각종 교계단체에서 감사패를 증정하고 공로패를 증정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언젠가 아는 분이 교회 확장 이전예배를 드린다고 초청하여 가보았더니 교회확장이전에 앞장서고 물심양면으로 특별히 힘썼다며 교회가 그런 성도에게 감사패들을 증정했고 또한 목사에게도 수고의 보상을 지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이런 일은 예배당을 짓고 입당예배 할 때에도 반드시 순서에 따라 이행되는데 건축위원장을 했던 자 라던가 특별하게 건축헌금을 많이 한 자라던가 또한 뭔가 많은 것을 할애하고 크게 수고하고 한 몫을 단단히 한자에게 교회가 감사패나 공로패를 증정합니다. 또한 그 외 에도 은퇴하는 자에게, 특별한 것을 기부한 자에게도 교회가 이 패를 줍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노회나 교단총회에서 그리고 교계연합단체에서는 감사패와 공로패가 즐비합니다. 노회나 교단에 기여한 바가 크고 발전이나 화합에 공로가 있다고 주고 그 동안 장 자리를 맡아 수고했다고 주고 남발할 정도인데 웬만한 분들은 이런 상패가 집에 몇 개씩은 있을 겁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우리가 알다시피 개 교회만 교회가 아닙니다. 노회도 총회도 교계연합단체도 교회입니다. 문제는 교회의 본질이나 교회된 모습을 이루어가고 있느냐에 있습니다만 교회가 감사패나 공로패를 주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주객이 전도된 일이고 불의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된 한 연합체입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가 주가 되시고 머리되십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애쓴 성도에게 어떤 역할이나 직임을 한 교회 직분자나 목회자에게 감사패를 주시고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데 지대한 공를 세웠다고 공로패를 주시는 격이 되는 것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주께서 우리에게 감사할 일이 있습니까? 주께서 미리 계획하시고 언약하신대로 이루어 가시는 교회구원인 구속의 사역에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고 선한 일군으로 쓰임 받게 된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공로패를 받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로마서 11:34-35절에 보면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우리가 교회를 위해 주의나라를 위해 진실로 수고하고 섬겼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주권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또한 우리를 하나님의 선한 나라의 도구로 써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됨도 모두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로 인해서 인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나의 나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 고백했고(고전15:10)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 했는데 우리가 주께 감사를 받고 주님의 몸된 교회로부터 공로를 수여 받으려 하니 이것은 도구에 불과한 도끼가 톱이 쓰는 자에게 큰 체 하며 자랑한다고 지적한 말씀과 같은 경우입니다. (사 10:15)&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감사패나 공로패는 국가나 사회단체나 회사 같은 데 에서 단체의 원만한 관계와 발전의 도모를 위해 실행하는 방식들인데 이것을 교회로 끌어들인 것은 교회본질을 모르고 교회를 사업적으로 번창시켜 가려는 무지한 자들의 소행인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인본주의 교회로 크게 서가려는 세속주의 현상인 것입니다. 교회가 정말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의 어리석은 발상으로서 자신들이 주님의 몸된 교회가 될 수 없음을 드러내는 증거가 되는 셈입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성경에 보면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예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했습니다.(골3:17) 그렇습니다. 교회에 어떤 일이든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요 그가 그 나라로 이루어 가시는 섭리에 있습니다. 때문에 교회 구원과 하나님 나라 실현에는 사람의 공로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그분께 감사와 영광으로 돌려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p&gt;&lt;/div&gt;</description>
                        <pubDate>Mon, 16 Jan 2012 22:26:26 +0900</pubDate>
                                </item>
                <item>
            <title>성시(聖市)화 운동은 기독교 이상주의</title>
            <dc:creator>황부일목사</dc:creator>
            <link>http://cyw.pe.kr/xe/489975</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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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cyw.pe.kr/xe/489975#comment</comments>
                                    <description>&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얼마 전에 타락의 도시 서울을 거룩한 도성으로 만들겠다는 성시화운동이 한국 교회 이름 있는 몇몇 지도자 분들이 앞장서서 그 운동의 실천시작으로 “서울 성시화 헌신예배”를 수 천 명의 교인들과 함께 가졌다는 언론 보도를 보았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밝힌 내용을 볼 것 같으면 “서울의 범죄율이 높다. 그래서 변화된 사회와 민족으로 만들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소문이 꽉 차게 해야 한다. 그래서 작은 신앙실천에서부터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선언적이고 이벤트적인 운동이 아닌 신앙실천을 우선하는 운동이다. 성시화운동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운동이다. 그래서 4명 가운데 1명이 기독교인이라는 한국이 크리스찬이 1%도 안 되는 일본보다 1백배나 범죄율이 높은데 서울을 범죄율이 낮은 성시로 만들 것을 다짐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서울 성시화 운동 실천 방법으로는 전 시민에 3전 운동을 실시해 매일 일일 기도 운동을 전해 나라와 민족과 지도자들을 위해 1분씩 기도하는 것과 개인과 가정, 직장과 사회 등 모든 생활영역을 좀 더 깨끗하고 정직하게 만드는 7성 운동을 펼쳐 나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알고 보니까 성시화 운동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전국 주요 도시들마다에서 조직되어 나름대로 움직이고 있다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한국 민족이 많이 사는 외국의 도시까지 성시화 시키겠다고 이름 있는 교회 지도자들이 운운하는 것을 신문에서 보기도 했습니다. 근간에는 한 도시부터라도 집중 전략하여 완전 복음화 하여 성시화해야 한다는 목표아래 행사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이슈를 보면 “수도 서울을 복음이 넘치는 도시로”, “서울 시민의 가슴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속히 오게 하자”, “내가 사는 도시 만큼은 거룩한 도시로 변화시켜 민족 복음화를 앞당기고 우리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로 확장시켜 가야한다”, “우리는 도시 전체가 하나님의 도성이 되는 꿈을 꾸어야 한다, 그래서 거룩한 도시며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어야 한다”등 이런 주장들이 성시화 운동을 하는 자들의 주목표며 강조점입니다. 여기에는 교계에 이름 있는 목사들이 많이 동참하고 있는데 이들의 주장들과 운동이 서로 교파를 초월하며 공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amp;lt;칼빈은 제네바를 성시화 한 것이 아니다&amp;gt;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서울이나 그 밖의 도시나 더 나가서는 국가를 성시화 하고 복음화 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는 자들을 보면 칼빈도 당시 제네바를 성시화 했다고 강조하며 그것을 본받고 토대로 해야 한다고 합니다. 당시 제네바시는 칼빈의 주도 속에 교회와 사회가 함께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도시의 성시화가 실현되었다고 보면서 모델로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칼빈이 당시 제네바를 오늘날 우리처럼 하나님의 도성으로 성시화 하겠다는 운동을 한 적도 없으며 세상 도시를 교회의 주도와 협력으로 함께 벌이는 운동을 통해 거룩한 도시로 전환된 결과를 보여준 것 또한 아닙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우리가 알다시피 당시 유럽의 국가와 도시들은 로마 카톨릭이라는 거대한 조직과 권력아래 있었습니다. 군주들도 막강한 종교정치 아래 지시를 받고 눈치를 보아야 했으며 때로는 하수인 그대로의 역할도 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교황 중심의 종교 정치가 유럽의 국가와 웬만한 도시들을 한 중심으로 주도하며 더 나가서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어떤 세력이나 능력의 인간도 우위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세를 앞세워 교묘하게 이용하여 조직화하고 권세를 휘둘렀기 때문입니다. 엄청나게 큰 잘못된 유형적 교회가 도시 국가로 구성되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종교 개혁이 일어나고 칼빈이 제네바에 성직자로 서게 되었을 때 그는 복음적인 개혁주의 자로서의 역할을 실제로 주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제네바라고 하는 한 도시를 하나님 중심 정치체제의 사회로 돌아가게 하는 성시화 운동이 아니라 당시 제네바는 한 커다란 유형교회와 같은 상황에 있었던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칼빈은 자기들 의도적 목적 아래서만 하나님의 권세의 법을 내세우고 실제 신자들의 사회생활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모습과 삶의 법을 만들어 주지 못했던 로마 카톨릭의 허상적 상태였던 제네바 교회를 하나님 중심의 교회된 모습과 생활로 개혁하는 사명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랫동안 잘못된 외형적 카톨릭 교회의 모순적 굴레에서 하나님 나라 된 모습과 삶이 실현되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개혁해 갔던 것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물론 여기에는 거슬림과 반대와 대적함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유형된 교회들이 완전한 교회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 안에는 가라지 같은 자들도 있고 옛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거슬리려는 신앙적으로 부족하고 형편없는 자들이 있는 것처럼 당시 대부분이 교인들로 되어져 있는 제네바도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제네바는 우리 시대에 한 세상 도시가 아니라 거대한 로마 교회에서 떨어져 나와 개혁교회로 가려는 시점에서 로마 카톨릭을 이제는 원치 않으면서도 또한 새로운 하나님 중심의 개혁 교회로 가는 것을 용납하는 것도 쉽지 않은 상태에서 칼빈은 하나님의 법을 강력하게 그들의 모든 삶에 적용되도록 주도했던 것입니다. 그의 목적은 당시 교회된 그들이 잘못된 종교와 그런 혼란과 미혹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함에는 하나님 나라 질서의 법인 말씀 중심의 제도나 규례가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모르는 자들은 마치 당시 제네바를 오늘날 세상 도시로 보고 그 도시를 하나님 중심의 사회로 칼빈이 주도하여 마치 교회와 사회가 일치가 되도록 성시화 시킨 것처럼 보는 것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그의 신학의 핵심과 신앙교리의 전부가 들어 있는 칼빈강요를 통해서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그의 신학과 신앙은 복음 중심의 개혁 주의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 그렇게 한 지역, 한 도시나 사회나 국가가 거룩한 도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거나 주장한데는 어디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칼빈과 그의 신학을 바로 안다면 그는 복음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의”대로 예정된 언약 교회가 현재적으로 실현되어져 가는 하나님 나라임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음을 알 것입니다. 교회와 세상은 본질적으로 영원히 일치가 될 수 없는 관계임을 복음을 통해 세운 것이 그의 신학인 것입니다. 그래서 전적 타락과 선택과 예정 교리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구원 교리를 세웠던 것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amp;lt;성시화를 기대했던 유대인들&amp;gt;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유대인들이야 말로 메시야를 통해 자기들이 꿈꾸는 지상천국을 고대했습니다. 그것이 안 맞고 그것을 실현시켜 주지 않는다고 당시 예수를 반대했고 메시야로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실 메시야를 통해 이루어질 메시야 왕국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잘못이해 했고 자기들 기대의 틀에다만 맞추고 바랬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적으로 유대 땅에 오신지 수 천 년이 지났지만 당시 때나 지금이나 그곳이 하나님의 도성으로 성시화 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당시 유대사회는 현실적으로나 형편 적으로는 더 혼란스러웠고 환난은 더 가중되어 갔던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천국으로 임재하시고 또한 천국의 복음을 통해 천국이 무엇이며 어떻게 천국 백성이 되고 천국이 어떻게 이루어 질 것을 말씀하셨고 또한 그렇게 천국 된 자들에게 실현시켜 주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이나 유대 땅 어디나 특히 사역을 많이 하셨던 갈릴리 고을 그 어떤 한 곳도 전부가 그리스도 중심의 나라 형태로 변화 된 지역은 한 곳도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계신 곳에는 언제나 일치될 수 없는 두 부류가 생겨졌던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못 이루셨기에 그러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한 미래 속에 현재적으로 세상에 실현 되었지만 세상에서 구원받아 거룩히 구별된 그리스도의 사람들 즉 그리스도의 교회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누가복음 17장 20-21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고 묻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실현된 하나님 나라의 상태와 본질의 모습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너희 안에 있다고 하셨지만 그렇다고 그 안이 당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거슬리던 바리새인들의 마음 중심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임재하고 실현되는지를 밝히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왕국은 분명 약속대로 당시 유대 땅에 그가 오심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심령 천국도 아니고 지역적인 성시화도 아니라 당시 유대 무리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나라로 시작되었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의 통치를 통해 그의 거룩한 몸 된 교회 모습으로 실현되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우리가 알다시피 역사적으로 실현된 하나님의 도성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허락하신 기업된 언약의 땅을 통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온성, 즉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거룩한 성으로 구별하셨고 그곳에 임재하시고 교통하시는 은혜의 역사로 성전을 세우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으로 그가 찾아 오셔서 특별히 그들에게 언약의 백성으로 통치하시는 역사가 이루어짐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되는 성격의 의미가 있으면서 보이게 실현된 거룩한 신정국가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로서의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점진적으로 실현되어가는 단계적인 하나님 나라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실 메시야를 통해 실현될 하나님 나라를 계시하셨고 언약해주셨던 것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다윗 시대 이후 하나님의 도성으로서의 유다왕국은 몰락되어져 갔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약속된 메시야 왕국은 점점 도래해 가고 있었던 것이 유다역사입니다. 성전은 무너져 없어지고 이제 하나님의 도성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에 있는 예루살렘은 유대민족 종교의 중심지요 율법의 저주로부터 정죄 받은 자들의 곳이라고 바울은 분명히 증거 합니다(갈 4:25-26). 그리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의 후손들로 거룩한 그리스도의 교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거룩한 시온성은 도래할 메시야 왕국으로 선지자들은 예언하였고 온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하여 불러진 자들이 그 중심에 거하게 될 것이라고 증거 했으며(슥 8:3-8 참조) 히브리 기자는 당시 역사적으로 보이는(히 12:22-23)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이었던 시온성이 위에 있는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실현된 언약교회가 됨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세례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선포했습니다(마 3:1-2). 예수님도 꼭 같은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마 4:17).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실현된 하나님 나라는 더 이상 유대민족이 바라는 보이는 옛 왕국시대의 회복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 땅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는 보다 발전된 영적 하나님 나라로서 유다 영역을 넘어 온 세상으로 천국 복음을 통해 구원과 구별된 구원의 삶으로 이루어져 가는 교회가 이제는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시자 기대하며 소동하던 유대사람들을 넘어 먼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하나님의 특별하신 인도를 받아 새롭게 실현될 나라의 통치자로 오신 왕 되신 그리스도께 경배하게 하고 그 지시를 받고 살아가는 자가 이방에서 있어질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세상에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요 본질적인 상태인 것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이 세상 가운데 현재적으로 실현된 하나님 나라의 성질에 대해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에 비유로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거기 보면 먼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고 했습니다(마 13:24). 여기서 밭은 세상이고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라 했고 좋은 씨를 뿌린 자는 인자되신 예수님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 땅에 천국은 시작되나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구원 받는 자들을 통해 이루어짐을 밝힙니다. 그래서 그 가운데 가라지가 뿌려졌다고 말씀합니다. 그 가라지는 원수 마귀 악한자의 아들들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나라는 세상 어느 곳이 아니라 세상 중에서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구원을 통해 그의 사람들이 된것이고 반대로 세상나라는 죄 가운데 있는 불신앙의 사람들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바다(세상)에 던져진 그물 같아 온갖 물고기를 모아 끌어내어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는 것으로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통해 천국의 역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천국을 이루는 참된 복음의 역사는 이 세상을 구원과 유기로 구분시킴을 말씀하십니다. 이런 천국에 대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이 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다”고 말씀하시면서(마 13:11) 그래서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아 이것을 기쁨으로 보는 자가 있고 보지 못하는 자가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당시 기대 속에 이상적인 지상천국을 바라던 유대 무리들은 그런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으로만 볼 수 있고 들어 갈 수 있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요 3:3, 5). 그래서 그들은 당시 예루살렘이 유대 사회가 지배정치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 재난이나 질병이나 어려운 형편에서 회복되고 혼란과 서로의 갈등과 반목 속에서 벗어나서 평화와 안정이 깃든 이상적 도성으로 되는 것을 메시야 왕국으로 고대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이루어주시지 않자 그들은 예수를 메시야 왕국을 빙자한 이단으로 몰아 죽인 것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amp;lt;서울과 그 외의 도시는 성시화 될 수 없다&amp;gt;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서울은 성시화 될 수 없습니다. 그 외 이 땅의 모든 도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울이나 그 어떤 도시도 세상 나라일 뿐입니다. 그런 세상 그 어떤 곳도 하나님의 도성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도성은 그런 세상에서 구원으로 구별된 그리스도의 교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세상 도시로 국가로 실현된다면 그것은 인간의 기대나 꿈에 불과한 지상천국일 뿐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본질적인 면으로서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해 언약하시고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나 성격은 분명 아닙니다. 그래도 우리가 그런 천국을 기대하고 있다면 메시야를 통해서 이상적인 유대 나라로의 회복을 기대하는 유대종교와 별다름 없다고 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오늘날 우리는 예수님께서도 하시지 않은 성시화 운동을 예수의 종이요 그의 교회된 사람들이라는 우리가 인간적 운동으로 세우려고 하니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어떻게 세상의 한 도시가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띤 거룩한 도성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또한 한 도시의 전체사람이 한 나라의 전체국민이 복음화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세상에서 구별된 거룩한 교회는 없는 것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이런 주장은 순전히 하나님 나라를 복음적으로 보지 못하고 우리들의 이상적 구현에 맞추고 기대하는 것인데 이것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노선이나 만인 구원론을 강조한 알미니안 주의자들이나 신정통 주의자들로서 기독교 이상주의에 불과합니다. 고작 구현한 하나님의 도성이 범죄가 없고 잘살고 좋은 도시가 되는 것이라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인류가 줄곧 추구 했던 유토피아나 우리 사회가 구현하는 모두 함께 잘 살고 평화하자는 운동과 별다름 없는 것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요일5:19절을 보면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자 안에 처한 것이며”라고 인류를 구분 시켰습니다. 분명 성경은 인류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으로 나뉘어지고 육체로 난자와 성령으로 난자가 구분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가족 중에서도 서로 영적으로 원수 되어 대적 관계가 되기도 한다고 말씀했습니다.(마10:21) 그런데 어떻게 한 지역이나 세상 도시가 거룩한 도시인 하나님의 도성이 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 나라가 민족 복음화로 될 수 있으며 우리나라가 하나님 나라로 될 수 있단 말입니까? 분명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오히려 저희 중에서 나와 따로 있으라고 말씀합니다.(고후6:14-17)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자의 하나님이시라”고 하셨고(눅20:38) 또 네 나라 사람들(유대무리)이 너를 고소했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는 빌라도 앞에서 말씀하시기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였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 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하나님 나라의 분명한 상태와 모습을 밝히셨습니다(요18:35-36)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로 구별된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 말씀했습니다.(요17:16)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그래도 우리가 세상 도시를 하나님의 도성으로 성시화 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작정과 그 주권을 모르는 무지한 처사요 억지가 되는 것이며 더 나가서는 천국 복음으로 구별시키고 하나님 나라를 바르게 알고 살아가야 할 많은 교인들을 실족케 하거나 혼란케 하는 일이요 구원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거룩하게 실현되어 가야 할 하나님 나라를 거슬리는 인본주의가 될 것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amp;lt;이 땅에 실현된 하나님의 도성은 거룩한 교회일 뿐&amp;gt;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이제 위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된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들로 구별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이 도시에서 구원으로 거룩하게 된 무리들만이 위에있는 도성인 것입니다. 로마서 1장 6-7절을 보면 로마 교회를 가리켜 말씀하기를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했습니다. 어느 도시나 어느 나라나 어느 장소나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그 곳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가 하나님 나라 된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과 교회된 자들을 향해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증거 했고(빌 3:20) 사도 베드로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한 것입니다(벧전 2:9)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우리는 혼잡된 신앙시대의 흐름을 따라 어리석게도 하나님을 통해 우리가 기대하는 지상천국을 세우려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이제 우리가 합력해야할 것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된 구원의 나라로서의 교회를 거룩히 세워 가는데 일심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은 우리들의 운동연합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에 있고 복음의 능력으로 이루어져감에 있음을 알고 오로지 복음에 합당한 사역과 신앙에 전심해야 할 것입니다. *&amp;nbsp;&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9pt;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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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gt;&lt;/p&gt;&lt;/p&gt;&lt;/p&gt;&lt;/p&gt;&lt;/p&gt;&lt;/p&gt;&lt;/p&gt;&lt;/p&gt;&lt;/div&gt;</description>
                        <pubDate>Mon, 16 Jan 2012 22:21:3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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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새 해에 대한 거룩한 개념</title>
            <dc:creator>황부일목사</dc:creator>
            <link>http://cyw.pe.kr/xe/486919</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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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시작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때만큼은 좀 심오해 지는 것 같습니다. 한 해가 가는 아쉬움과 기대에 못 미친 허전함 속에서 다시 오는 이번 한 해에 그 기대를 다시 실어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는 한 해를 가리켜 새 해라고 말합니다. 지난 한 해는 과거로 흘러가 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옛 시대가 되어 버렸고 다가오고 펼쳐지는 한 해는 현재고 미래이기 때문에 새 해라고 합니다. 그래서 뭔가 새로운 기분 새로운 기대를 가지며 한껏 들떠 있기도 합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난해와 오는 한 해와 분리를 하고 오는 한 해를 특별한 해로 여기려 하고 새로운 해라며 특별히 구분시키려고 애씁니다. 그래서 많은 방식이나 패턴을 바꾸기도 하고 새로운 것들을 도입하고 기획합니다. 그러나 그랬던 한 해가 갈 때 보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아쉬움과 허전함을 떨치지 못함을 볼 수 있습니다. &lt;/span&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사실 한 해 한 해는 같습니다. 돌고 도는 인생의 연속이고 마치 긴 줄자에 칸칸으로 작은 눈금 큰 눈금으로 나뉘어져 숫자적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한계 되어 있는 유한된 세상은 긴 줄자와 같고 거기에 작은 눈금은 하루, 일주일, 한 달의 기간이고 큰 눈금은 한 해 두 해 십년 등 표시와 같습니다. 이 줄자의 끝을 향해 인생은 흘러흘러 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한 눈금이 작든 크든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줄자는 그대로 있고 그 줄자를 따라가는 인생기간의 눈금이 어떤 새로운 줄자를 만들거나 다른 세계의 줄자로 건너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lt;/span&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문제는 오늘날 많은 교회들도 이렇게 새 해를 말하고 교인들에게 새 해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더욱 기대하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와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오라 이것이 새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 라고 말씀합니다. (전1:9-10)&lt;/span&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인간의 죄로 인해 저주받은 이 세상과 죄로 인해 이 세상에서 형벌을 살아가는 일식간적인 인생의 본질은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고 증거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죄 아래 있는 죄인 된 인생에서 벗어나 의인될 수 있고 죄와 사망의 본질에서 영원히 새롭게 의와 생명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는 본질적으로 새롭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세상의 줄자를 따라 영원한 사망으로 가는 죄의 형벌된 길에서 벗어나 구원의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옮겨진 자로서의 참된 새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기에만 새 날과 새로움이 있는 것입니다.&lt;/span&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성도에게 있어 새해와 새날은 날이나 년수가 바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시간속에 있으며 복음을 통해 구원을 이루어가는 모습과 삶속에 있는 것입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p&gt;
&lt;p&gt;&lt;/p&gt;
&lt;p&gt;&lt;/p&gt;
&lt;p&gt;&lt;/p&gt;
&lt;p&gt;&lt;/p&gt;
&lt;p&gt;&lt;/p&gt;&lt;/p&gt;&lt;/p&gt;&lt;/p&gt;&lt;/p&gt;&lt;/p&gt;&lt;/p&gt;&lt;/p&gt;&lt;/p&gt;&lt;/div&gt;</description>
                        <pubDate>Fri, 30 Dec 2011 22:26:1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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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새 것에 대한 참된 진실</title>
            <dc:creator>황부일목사</dc:creator>
            <link>http://cyw.pe.kr/xe/485739</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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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누구나 새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새것은 곧 낡아지는 것이요 지나가버리는 것이요 금새 식상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더욱 새것을 찾고 새로운 분위기로 꾸미며 새로운 문화나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합니다. 세상대부분의 연구자들의 목표와 노력이 여기에 있습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예전에 비하면 너무도 많은 새것들이 생겼고 못 보던 것 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음을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흐르는 시간과 시대의 흐름에 의해 또 옛것이 되고 세상은 옛것과 새것의 반복 속에서 왔다 갔다 하며 인생은 늙어가고 세상은 새것이 낳은 배설물로 점점 오염되며 혼탁해지고 헌 것과 새 것 사이에서 바쁘게 돌아갑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성경에 보면 해 아래는 새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미 있던 것이 다시 있고 이미 한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했고 우리가 새것이라 한 것이 이미 오래전 세대에도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전1:9-10)&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우리가 볼 때는 분명 옛적에는 없던 것이 생겨졌고 지금도 끝없이 새것이 발명되고 새것이 만들어져 나오는데 무슨 말씀인가 의문점이 생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 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6일동안 창조하신 것들을 바탕으로 꾸미거나 또 다른 것으로 변형시킨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옛 창조의 본질에서 벗어날 수 없고 아침이 오고 또 밤이 오는 반복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인생은 한 사람의 범죄로 죄가 들어오고 사망이 들어온(롬 5:12) 상태의 본질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주 먼 고대의 사람이나 오늘날 현대의 사람이나 죽음의 굴레는 벗을 수 없고 죄의 본질인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굴레도 절대로 벗을 수 없습니다. 죄로 옛 사람 되고 옛 세상에 살던 본질은 그대로 임을 알아야 합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수많은 새것이 생기고 새 시대가 열렸다고 지금껏 기대를 가져 보았지만 누구나 늙고 병들며 쇠퇴하고 낡아져 흙으로 돌아가는 슬프고 헛된 인생은 옛적 그대로 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인간의 죄로 함께 저주 받은 땅된 이 세상은 변함없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오히려 옛적보다 더 재난이 많고 무섭고 병들고 죄로 관영해져가며 무너진 옛 바벨탑 반복적으로 새롭게 쌓아갈 뿐입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문제는 현대교회들이 이런 세상의 새로움을 추구하고 도입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세상의 영리 단체나 기업체처럼 사람들이 원하는 새로운 시스템이나 프로그램을 주기적으로 바꾸고 도입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고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고 그보다 앞서는 것이 기독교의 발전이고 새로움의 상태로 나가는 것으로 압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오는 것을 새시대로 알고 금새 낡아지는 새로운 기대를 신년 메시지로 선포합니다. &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교회의 발전과 새로움을 새로운 건축 방식으로 교회당이 커지거나 보기 드문 특별한 형태를 갖추거나 그렇게 리모델링하거나 사람들이 공감하는 현대적 분위기가 문화 상태로 시스템을 갖추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새로움은 다원주의적인 신앙흐름에 빨리 적응하고 각자 기대로 세워진 비전을 실현시켜가는 것을 발전과 새로움으로 봅니다. 이런 것들은 한 마디로 새것에 대한 참된 진실을 모르는 무지의 소치요 발상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오늘날 현대교회들의 새로운 것에 대한 초점은 다수가 요구하고 공감하는 상태에 대한 탈바꿈이고 시대를 따른 발빠른 변화에 있습니다. 심지어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주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색다른 면모나 눈에 띄게 달라진 모습으로 바꿈에 있습니다. 이는 교회의 본질을 모르는 작태의 증거요 교회가 아니고 교회의 진실을 가지지 못하는 교회 이름을 빌린 세상된 모습의 증거인 것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성경이 증거 하는 참된 새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이름에 있습니다. 고린도후서5:17절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영원히 죄와 사망의 형벌된 존재와 삶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고 바뀌어 질 수 없었던 본질의 상태가 구원을 통해 새로운 본질로 변화된 것을 말씀합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다른 증거의 말씀을 찾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된 상태를 정리해 볼 것 같으면 죄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관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화평 하게된 새사람을 말합니다.(엡2:15) 또한 성령의 새롭게 하신 역사로 중생케 됨을 말합니다.(딛3:5) 또 보면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입게 되어 새롭게 하심을 입은 것을 말씀합니다.(골3:10)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으므로 죄의 사람은 그와 함께 장사 지낸바 되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된 것을 말씀합니다,(롬6:4)&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된 특징을 몇 가지 살펴볼 것 같으면 먼저 영원한 본질의 변화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원한 죄의 본질 상태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의의 본질로 새롭게 되어 이제는 결코 정죄함이 없게 된것입니다.(롭8:1-2) 그리고 그런 새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징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본질적으로 새것이 되었지만 그러나 실제에 있어 육신을 가진 우리의 모습이나 형편은 변한 것이 없는 옛 사람 그대로 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가진 중생한 자로서 본질의 모습을 따라 새로운 자다운 모습과 삶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을 이루어 가는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고 증거한 것입니다.(고후4:16)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자로서 합당하게 모든 것이 완성될 때에는 주의 재림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것에 대한 참된 진실은 구원을 통해 새로운 피조물이된 것이고 계속적으로 성도로 새롭게 된 그 본질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새롭게 된 본질의 실재는 죄인에서 의인됨이고 영원한 사망에서 영생을 가짐이고 어둠의 상태에서 빛의 자녀로 된 것이고(엡5:8-9) 죄로 사탄의 권세에 속해있던 상태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된 것이며 일시적이고 멸망으로 가는 세상에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옮겨진바 된 것입니다.(골1:13) 그러니까 교회의 실재 새로움은 바로 본질적으로 새롭게 된 의로운 상태와 빛된 모습과 천국된 모습으로 변화되는 점진적인 발전에 있는 것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하나님은 성도된 우리에게 주안에서 새롭게 된자의 모습과 삶을 요구하십니다. 에스겔서18:31절에 보면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찌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고 말씀했고, 로마서12:2절에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5:6-8절에 보면 우리는 유월절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하사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도록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고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된 교회가 아직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이 있어서 되겠냐는 것이며 진정한 새 덩어리 즉 새롭게된 교회다운 모습인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해 묵은 누룩을 버리라는 요구의 말씀입니다. 또한 에베소서4:17-24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안에서 증거 하노니 이제 부터는 이방인의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지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없는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 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찐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했습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분명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는 허망하고 방탕에 방임하며 욕심을 따라 사는 세상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가진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우리 실제 모습은 남아있는 육체의 소욕으로 말미암아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으며 살아가는 모습이 많은 것입니다. 때문에 그런 옛 사람의 모습을 버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지음 받은 새사람의 모습을 입으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된 자의 모습을 이루어 간다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약속대로의 은혜를 입어야 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따라 행하게 된다고 했습니다.(겔36:26-27) 때문에 우리는 이런 은혜의 약속을 믿고 기도하며 우리를 새롭게 하는 말씀이나 새로운 모습을 요구하는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하며 우리 속에 풍성히 채워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케 하시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복음의 능력에 있듯이 교회의 참된 새로움은 그 복음을 믿고 가까이 하는 자에게 실현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참된 교회의 새로움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세상의 새것이 교회의 새것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새것과 교회의 새것은 본질이 다르고 그야말로 하늘과 땅차이가 됩니다. 다르게 말하면 세상의 새것은 일시적인 인간적 차원이고 교회의 새것은 영원한 하나님 차원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들은 세상의 새것을 도입하고 금새 옛 시대가 되는 세상의 흐름을 좇고 새 시대를 기대하며 금새 지나가 옛것이 되는 인간적 방식의 유행을 따르고 금새 낡아지고 헌 것이 되는 것으로 단장하고 그것이 새것이고 새로운 모습이라며 주기적으로 바꾸어 나갑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요즘의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교인들에게 뭔가 신선하고 확 느낌이 오는 새로운 것은 없을까 늘 전전긍긍하며 그런 프로그램이나 방식의 정보를 얻으려고 수없이 이곳저곳 이런저런 세미나나 성공한 모델을 찾아보지만 그것은 이미 남이 쓰던 것이었고 얼마쯤이면 뭔가 또 다른 것을 새로운 것으로 도입하고 바꾸어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 늘 고민합니다. 좀 나은 것 같은 자들은 문제는 사람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며 그런데 치중하여 교육하고 훈련시켜 보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고 기대에 못미치는 실제에 봉착하고 맙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예수님은 당시 문제의 현실이 뒤바뀌고 자기들이 기대하고 오래토록 꿈꾸어온 것들로 새롭게 되고 새 시대가 열려지기를 소망하며 메시야를 고대하던 유대 무리들에게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 되느니라”(마9:16-1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는 것이 새것에 대한 참된 진실입니다. 여기서 비유되는 새 포도주는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에 소속되고 그곳을 소망하며 그곳에 합당한 자의 모습을 현재적으로 가지며 거룩한 구원의 교회로 건설되어 갈 수 있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그릇된 부대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로 새 것이 된 죄인에서 의인으로, 어둠에서 빛의 자녀로, 세상에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로 그 나라로 옮겨지고 본질이 바뀌어진 성도를 말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나 그것은 본질의 바뀜이고 실제 성도의 모습에는 아직 옛 사람된 육신이 있고 그 본성이 있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된 모습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옛 육체의 소욕이 구하는 인간적 이고 세상적 차원의 새것을 새로운 것으로 기대하는 것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때문에 예수님은 새 포도주와 함께 잘 맞고 변질이 없이 보전되는 새 부대가 되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질적인 새 부대답게 그 모습도 새 부대가 되야 함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면 또한 계속 은혜를 입어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길은 오직 하나 우리를 구원에서 구원의 믿음으로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의가 담겨져 있는 순전한 복음의 은혜를 풍성히 입고 채워가야 합니다. 그래야 새롭게 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발전되어 가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새롭게 되는 구원의 약속이 있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피조된 모습과 삶으로 이루어지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p&gt;
&lt;p&gt;&lt;/p&gt;
&lt;p&gt;&lt;/p&gt;
&lt;p&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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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gt;&lt;/p&gt;
&lt;p&gt;&lt;/p&gt;
&lt;p&gt;&lt;/p&gt;&lt;/div&gt;</description>
                        <pubDate>Fri, 23 Dec 2011 16:44:38 +0900</pubDate>
                                </item>
                <item>
            <title>마음이 둔해져 가는 세대</title>
            <dc:creator>황부일목사</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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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성도의 신앙생활 속에 가깝고도 무서운 적은 믿음의 염려와 은혜의 느낌이 없도록 마음이 둔해져 가게 하는 형편이나 요소들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사도바울은 증거 하기를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6-7)고 했습니다. 성도라면 그 내면에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함께 서로 거슬리며 작용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성경은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 하리라”고 말씀합니다.(갈5:16-17)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성령은 우리에게 임하셔서 먼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중생케 하는 역사를 하시고 그 다음 부터는 우리를 점점 사로잡아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성취 하려고 역사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의 모습을 가지며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이루며 누리는 영생의 삶을 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원치 않고 거부하며 오히려 그 은혜와 반대가 되는 세상과 사망의 삶으로 가려는 육체의 소욕이 우리 속에 살아서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며 또 문제는 그런 육체의 소욕을 더욱 부추기며 충동 시키는 세속적인 환경이나 문화 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고 더 큰 문제는 성도가 그런 세속적인 것들을 자꾸만 찾고 점점 빠져들고 중독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됨으로 인해 산자이면서도 죽은 자의 모습을 가지게 되고 무서운 침체와 시험과 괴로움에 허덕이게 되는 것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호세아 선지자의 증거를 보면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호4:11)고 했고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하게 한다고 했습니다.(호5:4) 여기서 음행이나 음란함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바알 우상을 숭배함으로 영적간음이요 또한 실제 정욕적인 것이며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는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는 것들이 있음을 말하고 포도주는 우리의 육신을 취하게 하는 것들인 것입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 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21:34)고 경고하셨습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성도의 마음을 둔하게 하는 것들이 바로 육신적인 삶에 치우쳐 근심하고 번뇌하는 것이요 세속의 방탕한 것들에 맛들이고 빠져 취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고 증거한 것입니다. 즉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이 시대의 모든 흐름과 거기에 끌리는 우리 옛 사람된 육체의 소욕을 벗고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누리기 위해 진리로 인도 하시는 성령을 좇아 나를 굴복 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고 했습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지금 이 세대는 컴퓨터 문화나 텔레비전이나 영화나 오락이나 스포츠나 그 외에 모든 육신의 정욕이나 안목의 정욕이나 이생의 자랑으로 넘치는 풍조나 세상 인본주의에 빠져있고 현대 교회들은 하나님을 통해 그것을 더욱 기대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된 것입니다. 실로 돌아오기 어려운 상태에 처해져 있지만 그것을 죽이시고 회복 하시는 하나님의 언약만이 소망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예수님은 당시 유대의 보편적인 세대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마태 11:16-17)&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이 말씀은 당시대 유대인들의 신앙의 상태가 무감각하고 둔해져 있음을 비유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 아이들 놀이 가운데 장례식 흉내 놀이가 있었는데 서로 상대를 나누어 한쪽에서 애곡하면 반대편에서는 가슴을 치며 반응하는 것 이였고 잔치집 흉내놀이는 한편에서 피리를 불면 반대편에서는 춤추는 반응을 보이는 것 이였습니다. 그러나 그 놀이 관계가 상대의 무반응으로 잘 이루어지지 않음을 비유로 들어 당시 유대 무리들이 세례요한이 와서 회개를 촉구했지만 별 반응 없이 마음이 둔해져있는 상태를 지적했고 예수님은 천국의 실현의 기쁨으로 오셨지만 그 복음의 역사에도 무감각했던 당시 세대를 그렇게 비유지적 하신 것입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당시 유대사회는 어렵고 혼잡하고 절망적인 상황이 많아 유대 백성들은 선지자를 기다렸고, 무엇보다 메시야를 학수고대했는데 어찌 그들은 세례요한의 외침에 모여만 들었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정한 반응을 보이지 못하고 그렇게 고대하던 메시야가 와서 그 나라의 구원을 나타내며 복음으로 선포하는데도 결국 예수님을 대다수가 떠나고 외면하고 말았을까요?&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그들은 진실한 것에는 마음이 둔해져 있었고 인간적이고 헛된 것에만 예민해 있었던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무감각 무반응에 대한 실제적인 요인을 살펴볼 것 같으면 당시 유대인들은 본질적으로 그 복음의 역사를 들어도 모르고 보아도 알 수 없게 허락이 되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마 13:11-15)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그들 자신이 자기에 맞는 기대의 틀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맞고 그것을 해결하고 그 기대를 실현시켜 주는 메시야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반응은 실망이었고 예수님 말씀처럼 거룩한 것과 진주를 모르는 개돼지가 그것을 주는 자에게 무섭게 역반응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 7:6)&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오늘날 이 세상 세대는 인간의 도리와 양심과 도덕성에 대해서는 너무 둔해져버렸고 욕망적이고 요란하고 쾌락적인 감각으로만 예민해져 더 자극적인 것을 찾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되었습니다.&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문제는 현대교회 세대들입니다.&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현대 교회 세대들은 바른 교훈은 받지 않고 진리의 가르침에는 마음이 둔해서 진리에서 떠나 자기 사욕에 맞게 가르치는 선생들의 허탄한 이야기에만 좋은 반응을 보이며 좇는다는 것입니다. (딤후 4:3-4)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세상 적으로 크고 인간적으로 부유한 것에만 관심이 있어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벌거벗고 수치스러운 자가 되어 있음도 모르고 자신들이 영적으로 소경되어 가련한 상태가 되어 있음도 모르게 매우 둔해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안일은 자기를 퇴보 기키고 자기를 죽이는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라 했습니다.(잠1:32) 세상일에는 염려가 넘치나 믿음의 염려에는 무감각하고 특히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는 복음에 둔해져가는 이 시대의 교회들이 안타깝습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p&gt;&lt;/span&gt;&lt;/div&gt;</description>
                        <pubDate>Fri, 23 Dec 2011 16:41:38 +0900</pubDate>
                                </item>
                <item>
            <title>기쁨의 예배</title>
            <dc:creator>황부일목사</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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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gt;&lt;/p&gt;
&lt;p&gt;&lt;/p&gt;&lt;font size=&quot;3&quot; face=&quot;맑은 고딕&quot;&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예배에 기쁨이 없습니다. 기쁨으로 예배해야 되는데 안됩니다. 그래서인지 예배드리고 싶은 마음이 없어집니다.” 예배하러 잘 나오지 않는 교인들 중에는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현대 교회들은 이런 경우를 종식시키기 위하여 “즐거운 예배”, “축제적인 예배”, “모두 함께 기쁨이 넘치는 예배”로 만들려고 수단방법 안가리고 열심들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예배 의식의 지루함, 졸리는 설교들을 없애고 재미있고 마음에 감동이 넘치는 예배를 하려 합니다. 그것이 일명 열린 예배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은 노골적으로 열린 예배 한다고 하는 교회들 말고도 교인들 위주로 변화를 주고 그들에 맞추어 주는 결국 열린 예배가 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목적이 이끄는 교회”의 저자로 유명해진 릭웨렌(미국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새들백교회 담임)은 열린 예배, 셀목회를 강조하며 운영하는 자로서 예배에 대한 혁신적 갱신을 강조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해온 정통적 전통의 예배의 순서나 분위기를 과감히 포기하고 교인들이 편안하고 즐겁게 예배 하도록 모든 것을 바꾸게 합니다. 예배당 분위기, 의자, 특히 조명이나 음향은 최첨단 시스템으로 바꾸어야 하고 예배당 건물 내부 도 콘서트장 방식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가 축제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쁨과 즐거움의 예배를 위해 그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교인들을 고객으로 보며 고객의 기쁜 만족도를 끌어올리기 위한 예배로 과감히 갱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fareast-font-family: 굴림&quot; lang=&quot;EN-US&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오늘날 이 땅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새들백교회 방식을 도입하여 그대로 따라합니다. 마치 유행처럼 번져 있습니다. 이들은 “열광적 예배, 역동적 예배, 축제의 예배”란 용어를 잘 쓰며 그런 예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춤을 추게 한다는 궤변을 폅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어떻게 해서라도 교인들이 예배를 기다리게 하고 즐겁게 참석하여 감동과 뜨거움을 체험하게 하려 합니다. 그래야 예배를 교인들이 기쁨으로 잘 참석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중심의 예배를 그들은 기쁨의 예배라 합니다. 삶의 어려움과 낙심상태와 갈등과 슬픔과 문제와 아픔과 혼란등 모든 것을 잊고 즐겁게 예배 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인들이 치유 받고 생기를 얻고 열정을 가지고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시편95:1-2절을 보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라고 했고 시편100:1-2절을 보면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 찌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 찌어다”라고 했습니다. 이 두 내용은 같은 증거의 고백으로서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께 나가 예배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릭웨렌이나 사람 중심의 열린 예배를 추구하는 자들은 이 말씀을 인용하여 열정적인 예배, 축제적인 예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위의 말씀에 나오는 즐거움이나 기쁨의 경배를 인간이 만드는 기분적인 분위기나 흥분의 감정으로 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여흥적인 분위기를 만들려 하며 재미있게 꾸미려고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감사와 즐거움과 기쁨의 예배는 인간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기분 좋은 일의 연장으로 와서 함도 아니요 그 어떤 프로그램이나 그 어떤 시스템으로 조성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데살로니가전서5:16절을 보면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항상 웃으며 즐겁게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세상 어떤 상태에서도 항상 즐거울 수가 없음을 누구나 잘 알고 있을 줄 압니다. 또한 인위적으로 그런 분위기를 조성해 준다고 해서 항상 기쁠 수는 더욱 없습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이 말씀은 우리를 슬프게 하고 어렵게 하고 괴로움과 고통과 죄악과 영원한 형벌의 죽음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므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영원한 그 구원의 참 기쁨을 찾아가며 누리며 살아가라는 말씀인 것입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하박국 선지자는 공포를 주는 재앙의 소식 속에 과실수마다 열매가 없고 밭곡식에는 소출이 없고 우리에는 양이 없고 외양간에는 소가 없고 되는 것이란 하나도 없는 현실에서도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며 기뻐한다고 했는데(합3:16-19) 그것이 항상 기뻐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된 성도에게 실현된 구원의 기쁨이요 천국의 기쁨인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먹고 마심의 형편이나 그런 기분과는 전혀 상관없이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희락이 되는 것입니다.(롬14:17) 이 기쁨은 기쁨의 좋은 소식의 실체로 오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에게 구원으로 이미 실현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이 기쁨으로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기쁨의 예배는 인간의 감정이나 기분으로 될 수 없습니다. 더욱이 그런 분위기를 조성해서도 안됩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조성하는 흥겨운 분위기는 그야말로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입니다. 이런 교회들은 복음 안에서 구원의 원리와 성령의 교통하심의 예배를 외면하고 나아가 그 원리를 거스르는 잘못까지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교인들은 그것도 모르고 일시적인 즐거운 분위기에 젖어 점점 더 어리석음에 빠져 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는(호4:6)말씀과 같은 경우에 처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주일 아침에 부부끼리 다투었다고 예배하러 안 오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되는 일이 없고 마음에 괴롭고 상한일이 있어 안 오는 교인들도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밖에 근간에 자신의 행동과 삶이 부끄럽고 세속적인 것이 있어 도저히 예배하러 올 수 없다는 교인도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이런 상태로 기쁜 예배를 드릴 수 있겠냐는 것이며 그런 좋지 않은 상태나 마음으로 예배하면 하나님이 받으시겠냐는 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매사에 모든 일이 잘 되어 좋고 컨디션이 최상이고 갈등이 없어 기분 좋게 즐거운 마음으로 예배하러 오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시편51:1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 하시리이다” 이 말씀을 간략히 줄여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상한 마음으로 나와 드리는 것이라는 겁니다. 기쁨으로 예배가 아니라 아프고 슬픈 심령으로의 예배라는 것입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이 말씀은 다윗이 충성된 신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하나님 앞에 매우 악한 일을 저지른후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 그 죄악을 책망한 후에 고백한 것입니다. 어쩌면 다윗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악하고 못된 짓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는커녕 하나님을 슬프게 매우 화나시게 한 상태였고 오히려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는 짓을 한 것입니다.(삼하12:14)&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다윗은 상한 심령으로 통회하는 심령으로 주께 나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육체의 소욕에서 벗어날 수 없는 연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임을 다윗은 마음 아프게 깨달은 것입니다. 한 순간 죄악의 올무에 빠지고 하나님을 근심케 하는 존재밖에 안되는 자신이 슬펐고 마음이 괴로웠고 그래서 통회하고 상한 심령으로 주께 나간 것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우리도 상한 심령으로 주께 나와야 합니다. 툭하면 하나님 원망하고 현실의 상태와 형편과 기분에 치우쳐 구원의 감사와 기쁨을 잊고 예배를 하니 못하니 은혜가 있니 없니 하며 우리에게 맞는 여건과 분위기를 찾는 아직도 그런 어린 신앙에 머물러 있는 자신을 깨닫고 심령에 아픔을 가져야 합니다. 한없이 부족하고 연약하고 어리석은 그런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나가 그대로 토로하고 긍휼을 구하며 예배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인위적으로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는 예배는 성령의 교통하심의 은혜를 입을 수 가 없습니다.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 외식이고 이교적 요란한 종교행위에 불과하고 하나님께는 시끄러운 소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고 증거한 것입니다. (호 6:6)&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FONT-SIZE: 14px;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진정한 기쁨의 예배는 복음의 조명을 통해 우리가 진실 되게 발견되는 은혜의 시간을 자꾸만 가지는 것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게 하는 회복의 은혜가 우리를 사로잡을 때 우리는 세상형편과는 상관없이 기쁨의 참된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p&gt;
&lt;p&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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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gt;&lt;/p&gt;&lt;/p&gt;&lt;/font&gt;&lt;/div&gt;</description>
                        <pubDate>Fri, 23 Dec 2011 16:36:48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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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키프리안</title>
            <dc:creator>오명희 전도사</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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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quot; id=&quot;writeContents&quot;&gt;키프리안 &lt;br /&gt;&lt;br /&gt;교회를 어머니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일 수 없다 &lt;br /&gt;&lt;br /&gt;64년 네로의 박해로부터 250년에 이르는 시기를 ‘국지적인 박해’의 시기라 한다면 250년에서부터 313년까지의 시기를 ‘전반적인 박해’의 시기라 할 수 있다. 박해가 크고 작건 그것은 항상 혹독했지만 데시우스(249-251)황제의 박해는 가장 참혹했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기독교 자체를 멸절코자 했다. 특히 교회 지도자들을 배교 시키고자 온갖 방법을 동원하였다. &lt;br /&gt;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으며 교회는 분열될 위기까지 처하였다. 이러한 때에 끊임없는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리를 공식적으로 선포하여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혼신을 쏟은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북아프리카의 감독이자 최초의 순교자인 키프리안이다. 그는 3세기 때 서방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요 신학자였으며, 가톨릭 성직 계급제도의 창시자였다. 중세에서 근세에 걸쳐 어거스틴을 위시한 많은 신학자와 사상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으며, 뛰어난 라틴어로 구성된 65통의 편지가 남아있다. &lt;br /&gt;&lt;br /&gt;회심체험 &lt;br /&gt;3세기의 가장 위대한 감독이자 교부였던 키프리안은 주후 200년경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의 한 부유한 이교도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로마의 고관으로서 당시의 유력하고 명망있는 귀족집안이었다. 그는 부모의 신분에 어울리는 최상의 교육을 받았다. 문학, 수사학, 법률 및 행정능력에 뛰어 났으며 또한 학식과 웅변술로도 유명하였다. 그는 성공적인 수사학 교사이며 변호사로서 부와 명예를 다 갖추고 있었다. 그의 성격은 원만하고 겸손하였으므로 항상 많은 친구들이 따랐다. 그는 막대한 재산가였고 모든 화려함의 극치 가운데 생활했다. 그러나 키프리안은 자기가 속해있는 사회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 당시는 환락과 도덕적 부패로 가득한 사회였다. 이러한 타락한 사회에서 그는 날이 갈수록 더 심한 회의를 느꼈다. 그는 수사학자로서 당시 기독교 법률가인 터툴리안의 저서를 많이 읽었다. 그리고 친구인 장로 캐실리우스의 설교를 자주 들었으며 성서도 많이 읽었다. 그러면서도 중년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lt;br /&gt;그러던 246년(46세) 어느 날, 정원에 앉아서 성경을 읽다가 그는 회심체험을 하게 되었다. “하늘에서 오신 성령의 숨결을 통해 나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생활은 현저히 바뀌기 시작했다.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헌신하리라 결단하며 평생 독신으로 살기로 맹세했다. 자신의 직업과 사회적인 지위를 벗어버리고 고행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매우 소박한 차림새에 검소하게 살면서 오직 성경연구에만 몰두했다. 그의 미덕과 선행은 광범위하게 칭송되었고 곧 장로로 피택될 만큼 신앙적으로 많은 진보를 이루었다. &lt;br /&gt;248년, 회심한지 2년만에 그가 굳이 사양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공동체인 카르타고의 주교로 추대되었다. 그처럼 빠른 시일 안에 주교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로 그가 자신의 고향 교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를 잘 반영해 주고 있다. 그때부터 그는 정력을 다하여 교회를 섬기고 어려운 문제들을 능력 있고 지혜롭고 충성스럽게 소화하였다. &lt;br /&gt;키프리안은 동양사람인 터툴리안을 굉장히 존경하여 그를 가리켜 항상 ‘주’(The Master)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영웅인 터툴리안 보다 폭넓은 견해와 보다 실제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던 사람으로 행정관리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지혜롭고 기품 있는 주교로 일했다. &lt;br /&gt;&lt;br /&gt;은신처로 피함 &lt;br /&gt;그가 주교에 오른지 2년 후인 250년에 로마제국 전역에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핍박이 또다시 일어났다. 황제 데시우스(249-251)는 로마의 옛문화를 재생시키려는 의도로 기독교에 대한 범국제적, 조직적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인들에게 배교를 목적으로 갖가지 방법이 동원되었다. 박해는 특히 주교들에게 집중되었다. 지도자를 없애면 기독교를 제압하기가 훨씬 쉬워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든 시민이 일정한 날에 일제히 지방장관 앞에 나와서 희생제물을 드려야하며 제사드렸다는 증명서를 받아야 했다. 로마의 신들에게 희생제를 드리지 않는 자는 기독교인으로 인정되어 지위와 재산을 박탈당하고 감금되거나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버리고 이방신들 앞에 경배를 드렸다. 반면에 순교의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 감옥으로 달려가는 성도들도 있었다. 박해와 고통이 더욱 심하였을 때, 권력자들 앞에서 보여준 성도들의 신앙고백과 용기는 정말 명예스럽고 감동적이었다. 양자간의 대결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동시에 순교를 통한 신자들의 영광은 더욱더 높아져갔다. &lt;br /&gt;키프리안은 이 박해기간 중에 지하로 숨어 편지로 교회와 성도들을 위로하였다. 혹자는 이를 비난하여 당시 순교한 로마교회의 감독 파비안과 그를 비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의 사명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lt;br /&gt;이 박해는 251년, 데시우스 황제가 고트족과 싸우다 전사함으로서 끝이 났다. 키프리안은 도피생활을 끝내고 카르타고 교회를 재건하고자 하였다. 특히 ‘신앙을 저버렸던 사람들’을 교회로 다시 받아들여 주자는 안건을 어떻게 처리하느냐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비록 양떼들을 보살핀다는 이유이긴 했으나, 아무튼 핍박이 일어났을 때 도시를 떠나 피신해 있었던 관계로 교회의 질서를 회복하는데 굉장한 진통이 따랐다. &lt;br /&gt;키프리안은 중간노선을 취하였다. 배교한 크리스챤은 영원히 추방해야 한다는 노바티안 분파에 반대하였고, 변절자에 대한 용서를 하되 일정기간 동안 참회를 한 후에야 용서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이단에서 받은 세례의 무효를 주장하였는데 이 문제로 인해 그는 교황 스테판 1세와 대립하기도 하였다. &lt;br /&gt;키프리안은 출중한 인격과 권위있는 생활태도로 사람들에게 큰 감화를 주었다. 그는 겸손하고 경건하였으며 온화한 성품으로 사회적 신망이 두터웠다. 그는 자기의 관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선한 뜻과 충성된 마음으로 가르쳐서 많은 감화를 주었다. 데시우스의 박해가 끝나고 발레리안의 박해가 시작되기까지 약 6년 동안 열심히 교회를 위하여 일하였으며, 또한 교회 정치에 감독제도를 확립하기 위하여 열정적으로 활동하였다. &lt;br /&gt;&lt;br /&gt;순교의 본보기로 삼음 &lt;br /&gt;발레리안의 통치기인 252년, 역병이 카르타고에 번졌을 때 키프리안은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힘썼다.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헌신에도 불구하고 로마 정부는 이 역병을 기독교인 때문이라고 모함하였다. 드디어 257년 종교적 박해가 다시 시작되었고, 키프리안은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겁내지 않고 로마의 잡신에게 경배함으로서 그리스도를 배반하기를 단연 거부하였다. &lt;br /&gt;총독이 물었다. “그대가 키프리안인가? 그대는 우리 로마 신들에게 예배하지 않는 사람들의 감독으로 일해왔다. 그 일을 재고하라.” 키프리안이 대답했다. “당신의 그러한 요청을 재고하십시오. 이것은 재고할 필요가 없는 단순한 문제입니다.” 총독이 말했다. “로마의 신들과 그들에 대한 신성한 의식을 반대한 신성 모독자인 그대의 생명은 너무 길었다. 그대는 악질적인 범죄의 기수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대를 본보기로 삼아 그대와 사귄자들에게 교훈을 주고자 한다. 본 법정은 그대를 단 칼에 벨 것을 구형한다. 참수하라!” 키프리안이 말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lt;br /&gt;키프리안은 즉시 밖으로 끌려나갔으며 수많은 군중이 그 뒤를 따랐다. 이때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도 그와 함께 죽기를 원한다”고 소리쳤다. 그는 자기 손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금화 하나를 사형 집행자에게 주고, 무릎을 꿇고 기도 드리면서 사형집행을 받았다. 키프리안은 영웅적인 권위를 나타내며 258년에 북아프리카 교회 감독으로서는 최초로, 영광스런 순교의 반열에 들어갔다. 그는 심문당할 때나 처형당할 때도 인격의 고매함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lt;br /&gt;&lt;br /&gt;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lt;br /&gt;그의 신학은 성경에 대한 법률주의적 해석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는 또한 터툴리안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그와는 달리 신학적인 논쟁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단지 교회가 하나되기를 바랐고 주교들의 권위를 통해 분열된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고자 했다. 그의 글은 여러 개의 결정적인 교리의 근본을 형성했다. 251년 그는 카르타고 종교회의를 소집해 ‘교회의 일치에 대하여’라는 선언서를 낭독했다. &lt;br /&gt;이는 교회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획기적인 저서였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거룩한 기관이며 그리스도의 신부는 오직 하나일 뿐이다. 오직 교회 안에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고 교회 밖은 어둠과 혼란뿐이며 교회를 떠나서는 성례, 성직, 심지어 성경까지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을 통해 기독교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함으로 교회가 필요하다. 모든 주교는 베드로의 계승자이기 때문에 마땅히 주교에게 복종해야 한다. 교회를 어머니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길 수 없다.” 키프리안의 말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교에게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하게 만들었고 주교들은 그의 생각을 받아들임으로써 권위를 얻게 되었다. &lt;br /&gt;「배교자들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그는 박해로 인해 배교를 했던 사람들을 다루었는데, 그의 입장은 너무 쉽게 신앙을 버린 자들에게는 엄한 벌이 내려져야 할 것과 아울러 뉘우치는 자들에게는 일정기간을 통해 다시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lt;br /&gt;「이단자의 세례에 관하여」라는 책에서는, ‘교회 밖에서 행해진 모든 성례전적 행위는 무효이다. 마귀에게 사로잡혀 배교한 이들은 이미 성령의 은사를 잃어버린 자들이므로 그들은 성례전적 중재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들은 재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lt;br /&gt;키프리안은 10년 동안 주교로 일하면서 끊임없이 위협을 받았지만 그 시험들을 잘 이겨 나갔다. 또한 교회내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고 교회정치에 감독제도의 확립을 위해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았다. 그는 진정 서방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요 신학자이며 저술가로서 영광스런 순교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깊은 관심과 사랑으로 자기 양떼를 열심히 보살폈던 목자로 후대에 기억될 것이다. &lt;br /&gt;&lt;br /&gt;오명희&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quot;&gt; &lt;/span&gt;&lt;!-- 테러 태그 방지용 --&gt;&lt;/div&gt;</description>
                        <pubDate>Sat, 17 Dec 2011 20:08:5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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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저스틴 마터</title>
            <dc:creator>오명희 전도사</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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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quot; id=&quot;writeContents&quot;&gt;저스틴 마터 &lt;br /&gt;&lt;br /&gt;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당하는 것 밖에는 원하지 않습니다 &lt;br /&gt;&lt;br /&gt;저스틴 마터(Justin Martyr 100-165년경) &lt;br /&gt;교회의 상황과 활동배경 &lt;br /&gt;주후 2. 3세기에는 교회사에 있어서 &apos;영웅적인 시기&apos;였다. 초대교회는 약 3세기 동안 지속된 로마제국의 잔혹한 박해로 인하여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렇지만 모진 고문과 죽음의 위협도 결코 그리스도인을 굴복시키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부활에 대한 확신과 임박한 재림의 주를 기다리는 강인한 믿음과 대속의 주(Lord)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lt;br /&gt;어느 종교가 그렇게 오랜 기간을 유대인과 다른 종족과 로마의 권력 아래서 견디어 왔던가. 과연 어느 집단이 도덕적이고 영적인 힘만으로 승리를 쟁취해냈던가. &lt;br /&gt;이처럼 철저하게 진행되었던 박해 속에서도 기독교는 급속히 확산되어 갔다. 이것을 보고 놀란 이교도 학자들과 정부의 관리들은 정치적이나 군사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억제하려고 하는 동시에 문서로도 이 신앙을 반박하려고 하였다. &lt;br /&gt;기독교를 반대하려는 자들의 논증과 중상이 잇달아 나오자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를 변호하기 위한 문서를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변증가들은 문서로서 기독교 신앙을 억제하고 반대하려는 불순한 이론적인 도전을 끊게 하였으며, 기독교 사상을 밝히고 신앙심을 깊게 하며 또한 교회의 교리적인 신조를 체계화하는데 일익을 감당하였다. 변증가들은 로마 황제들이나 정부 관리들에게 기독교인은 무신론자가 아니며, 부도덕한 정치적인 집단이 아님을 밝히면서 기독교에 대한 관용을 호소하였다. 다른 한편 이교도 학자들의 중상적인 악평에 대해서는 기독교를 이교와 대비시켜 그 우월성을 밝히고, 더 나아가서는 기독교의 신앙으로 그들을 정복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lt;br /&gt;2세기에 가장 중요한 변증가로서 기독교의 우월성과 무해성을 주장하며 글로서만이 아니라 자기의 생명을 바치기까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키고 증거한 저스틴 마터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교훈을 얻고자 한다. &lt;br /&gt;&lt;br /&gt;출생과 회심 &lt;br /&gt;2세기에 가장 대표적인 변증가로서 철학자이며 순교자로 불려지는 저스틴은 주후 100년경에 고대의 사마리아 세겜에 있는 한 이교도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이교도인 그의 부모는 그에게 훌륭한 교육을 받게 했고, 저스틴은 총명한 학생이었다. 그는 젊어서 여행을 많이 했으며 당대에 유행하던 온갖 철학을 열정적으로 섭렵하면서 지적인 방황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진리를 찾아 고뇌하는 젊은 철학도의 영혼의 갈망을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절실한 의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스토아주의(Stoisism), 아리스토텔레스 사상(Aristotle&apos;s Thought), 피타고라스주의(Pythagoreanism), 플라톤주의(Platonism)를 차례로 타진했다. &lt;br /&gt;그가 32세 되던 어느 날, 세상의 혼잡을 떠나 조용히 한적한 해변을 걸으면서 파도소리를 듣고 있었다. 전도서 1:2에 있는 솔로몬의 말은 바로 그의 기분을 묘사한 것이었다. &quot;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quot; 그러다 그날 바닷가에서 나이 지긋한 그리스도인 노인을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이 노인은 저스틴의 일부 플라톤 사상들을 논박한 다음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었다. 그날 이후 저스틴의 삶은 완전히 변했다. &lt;br /&gt;저스틴은 이 노인과 대화하는 중에 지금까지 가진 모든 인간적인 지혜에 대한 신뢰성이 무너지고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예언한 히브리 예언자들의 교훈에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그는 구약과 신약의 연구를 통해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확신함으로써 진리의 참 근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하여 저스틴 자신이 말하기를 &quot;그때 내 마음속에 불이 붙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예언자들과 그리스도의 친구 되었던 사람들의 사랑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믿을 수 있고 가치 있는 유일한 철학임도 알았다.&quot;고 했다. &lt;br /&gt;저스틴이 기독교의 진리를 확신하게 된 또 하나의 요인은 순교자들이 보여준 용기였다. &quot;나 자신이 또한 플라톤의 철학을 흡족해 하였고 기독교인들을 비방하는 소문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죽음이나 온갖 무서운 일에 직면하면서도 용감하게 행동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악하고 육신적인 일에 몰두하여 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쾌락을 즐기거나 절제가 없는 사람, 또는 육신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라면, 자기 욕망의 대상을 빼앗아갈 죽음을 환영하지 못할 것이며 행정관의 눈을 피하여 살려고 애쓸 것이며, 죽을 것을 알면서 스스로 교인이라고 고백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quot;(제2변증). &lt;br /&gt;&lt;br /&gt;활동 &lt;br /&gt;청년시대에 회심한 이후로 저스틴은 기독교 단체를 찾아다니면서 열심히 기독교 신앙에 대한 역사와 교리를 배웠다. 그는 회심 이후 30여년 동안 온 힘을 다하여 기독교 신앙에 헌신하고 이를 옹호하며 널리 전파하였다. 그리스도만이 우리 마음과 정신을 만족시켜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기독교를 분명하게 변증했고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했다. 그는 성직자로 안수 받지는 않았지만 틈만 나면 설교하였다. 이후에 철학자의 옷을 입고 일정한 거처도 없이 각지방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고 저술활동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나중에는 로마에 도착하여 학교를 세우고 기독교를 변증하며 가르쳤다. &lt;br /&gt;한편 그가 살던 2세기는 핍박기였을 뿐만 아니라 이단들이 준동하던 때였다. 그는 초대교회의 대표적 이단자인 말시온을 로마에서 만나 논쟁하였는데, 말시온은 신약성경이 구약성경과 모순된다고 주장한 반면 저스틴은 신약이 구약의 성취라고 역설했다. &lt;br /&gt;&lt;br /&gt;그의 변증서들 &lt;br /&gt;저스틴은 8권의 책을 저술했지만 현재 3권만이 남아 있다. 「제1변증서」,「제2변증서」, 그리고 「유대인 트리포와의 대화」이다. 그의 글은 2세기 기독교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는「제1변증서」에서 황제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us Pius)에게 기독교에 대한 부당한 핍박에 대해 항의했다. 구체적인 범죄행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을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처벌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방종교들 및 이방철학(플라톤주의)과 기독교 사이에 형식적인 유사성이 있다고 보았다. 「제2변증서」에서 저스틴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당국의 잔인한 핍박에 대해 항의하고 기독교에 대한 이방인들의 오해, 죽음의 유희를 즐기는 자들이라는 비난 등에 대해 해명했다. 「유대인 트리포와의 대화」는 유대인들을 향한 기독교 변증서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트리포가 기독교를 건전하고 합리적인 믿음이라고 생각해야 할 이유들을 훌륭하게 설명했다. 이 책에서 그는 유대인의 반대에 대한 기독교의 변호로서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메시야이심을 믿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구약의 예언들이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으며 기독교인들이 새 이스라엘이요 하나님에 의해 참으로 선택된 자들이라고 주장했다. 변증론에 있어서는 대단히 지혜롭게 대처하였다. 철학자에게는 철학자가 되어서,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의 관점에서 대화하며 기독교를 변증하였다. &lt;br /&gt;저스틴의 저서는 대단히 중요하고 흥미가 있는 것들이다. 샤프는 말하기를 &quot;저스틴의 저서들은 교회가 아직도 작은 종파에 지나지 않을 때에 경멸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죽음도 달게 받던 모습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의 저서는 어느 것에 있어서나 저스틴의 정직함과 열심, 기독교에 대한 열성적인 사랑, 조금도 두려움이 없이 밖에서의 공격과 안에서의 곡해(曲解)에 대하여 힘있게 변호하였음이 여실히 나타난다. 그의 저서는 또한 공중예배와 성례집행에 관한 신뢰할만한 문서로서 가장 처음 나온 것이다. &quot;만일 로마황제들이 그들에게 보낸 이 변호론을 읽었다면 그들은 필연코 깊은 감동을 받아 적어도 저스틴이 얼마나 정직하며 그리스도인들이 무죄하다는 것을 알았으리라.&quot; 저스틴의 변증서들은 이후의 변증가들 곧,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 테오필루스(Theophilus), 터툴리안(Tertullian), 펠릭스(Minucius Felix)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lt;br /&gt;&lt;br /&gt;순교 &lt;br /&gt;로마에서 가르치는 동안 그는 크레스켄스라는 견유학파(Cynic) 철학자와 대중 앞에서 논쟁을 벌이곤 하였는데 크레스켄스는 덕이 삶의 유일한 목표하고 주장했다. 그 논쟁에서 저스틴에게 완전히 패하여 화가 난 그는 저스틴을 무신론자라는 죄목으로 로마인 장관에게 고발했다. 즉 로마의 신들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lt;br /&gt;A.D 165년경 &apos;명상록&apos;으로 잘 알려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통치 초기에 6명의 성도들과 함께 로마의 장군 루스티쿠스의 재판정에 끌려가서 태형과 참수형을 선고받고, 목베임을 당하는 순교를 하였다. 그는 죽는 순간에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기쁜 얼굴로 기독교 진리와 자기의 믿음을 고백하였다. &lt;br /&gt;&quot;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당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세상사람이 장차 모든 것이 나타날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자리에서 구원함과 기쁨을 줄 것이 이 고난이기 때문입니다.&quot; &lt;br /&gt;&quot;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quot;(마5:10-12). &lt;br /&gt;저스틴은 분명 교부 중에서 박식한 초기 기독교 사상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으로, 현대의 학자들도 그의 겸손, 정직, 용기에 감명을 받아왔다. 그는 글로써만이 아니고 죽음으로까지 자신의 믿음을 지키고 그리스도를 증거한 2, 3세기 순교자의 대열에서 가장 큰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버나드(L.W. Bernard)에 의하면 그는 &quot;기독교의 일반적 요소를 파악했으며 전 문명사를 그리스도 안에서 종합, 완성한 사도 바울 이후의 최초 사상가&quot;였다. &lt;br /&gt;오명희&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quot;&gt; &lt;/span&gt;&lt;!-- 테러 태그 방지용 --&gt;&lt;/div&gt;</description>
                        <pubDate>Sat, 17 Dec 2011 20:07:5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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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터툴리안</title>
            <dc:creator>오명희 전도사</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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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quot; id=&quot;writeContents&quot;&gt;터툴리안 &lt;br /&gt;&lt;br /&gt;정열과 용기에 찬 라틴신학의 아버지, 터툴리안 &lt;br /&gt;&lt;br /&gt;순교자의 피는 교회 성장의 씨앗이다 &lt;br /&gt;교회의 중심지는 초대교회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시를 거점으로 이루어졌다. 2,3세기의 초대교회에 가장 영향력이 컸던 대도시는 로마, 카르타고, 알렉산드리아였다. 이 3대 도시는 사상적으로 크게 구별되는 두개의 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카르타고와 로마는 서방학파로 라틴적인 성격의 제도적이며 실제적인 특성을 가졌고, 알렉산드리아는 동양학파로 희랍적 성격의 사색적이고 철학적 관점이 높았다. 서방 기독교 신학의 창시자인 터툴리안은 고대 기독교 인물 중 뛰어난 사람으로 라틴신학과 신학용어의 원조이며 라틴문학을 건설하는데 공헌이 큰 북아프리카의 저명한 저술가 중에서 당대 일인자였다. &lt;br /&gt;&lt;br /&gt;성도들의 순교를 통한 회심 &lt;br /&gt;아프리카의 라틴신학자이며 도덕론자인 터툴리안은 155년경 현재 북아프리카의 튀니스인 카르타고에서 태어났다. 로마 총독부의 백부장인 부유한 부모 밑에서 그는 그 시대에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헬라어와 라틴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역사와 철학서적들을 많이 읽은 그는, 법률을 공부하여 로마에서 변호사로 일하며 점점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매사에 열정적이고 강렬했던 그의 천성은 생애 초기 우상숭배와 방황가운데 보냈다. &lt;br /&gt;로마의 법정에서 변호사로 일하던 195년경 어느 날,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당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죽임을 당하는 극심한 상황 속에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는 그들의 영웅적인 모습을 보고, 그는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으며 곧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회심 후 그는 타고난 열정과 의지로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장로로 선출되었다. &lt;br /&gt;그는 기독교와 그 문헌연구에 전념하면서 법률에 관한 탁월한 자신의 지적 능력을 활용하여 새로 믿게된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살던 시대는 우상숭배와 이교적 요소가 교회와 신앙을 혼탁하게 하던 때였다. 진리를 향한 그의 열정은 더욱 활활 타올랐고, 이교도와 유대인 그리고 이단자들을 대항하여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는 일과 엄격한 도덕생활을 추구하며 권장하는 데 자신을 아낌없이 바쳤다. &lt;br /&gt;&lt;br /&gt;우리는 죽음을 정복합니다 &lt;br /&gt;당시 북아프리카 전역에 있는 교회들은 코모두스 황제(180-192)의 통치 아래 비교적 평온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 셉티미우스 세베르스(193-211)가 기독교를 대적하여 누구도 기독교나 유대교를 믿지 말라는 칙령을 내렸다. 기독교인들은 무조건 엄벌에 처하도록 하였으며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도 법률로 금했다. 이것으로 인해 또다시 박해의 해일이 북아프리카를 덮쳤다. 이교도들은 기독교인들의 예배를 방해하고 거리에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시위를 하면서 기독교는 사회의 악이라고 소리 질렀다. &lt;br /&gt;이때 장로 터툴리안은 기독교 신자라면 누구나 숨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순교에 직면하게 될 때 확고하게 설 것을 권면했다. “우리는 죽음을 정복합니다. 죽어 정복당하는 그때가 바로 승리하는 때입니다. 고난을 두려워하는 자는 고난받으신 분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로마서 8:17에서 사도바울도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겠다는 그 사형선고에 대하여 우리는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사람의 성품이 서로 반대되는 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정죄받을 때에는 하나님께로부터는 용서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lt;br /&gt;그는 기독교가 결국 승리할 것을 알았다. 그리고 순교자들의 죽음이 불신자들에게 강력한 효력을 발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사실 그가 주님을 믿게된 것도 바로 순교자들의 증거 때문이었다. 순교자들은 교회를 파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 신자들에 대한 존경심을 불러 일으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련기간 중에 터툴리안은 그렇게도 열망하던 순교를 하지 못하고 살아남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체포되어 카르타고에 있는 원형 경기장에서 처형되었다. &lt;br /&gt;“당신들이 우리를 많이 죽이면 죽일수록 교회는 더욱 풍성한 추수를 거두게 될 것이다.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성장의 씨앗이다” &lt;br /&gt;&lt;br /&gt;그의 열심이 교회를 떠나게 하다 &lt;br /&gt;어느 시점에서인가 터툴리안은 교회를 떠나 몬타누스파로 불리는 한 금욕주의적 이탈그룹에 가입하였다. 이 파는 대체로 정통교리를 신용했지만 광신적으로 교리와 생활에 엄격하였다. 202년경 그곳 신자들이 가혹한 박해를 당하던 상황에서 몬타누스파들이 보인 용기와 열정을 터툴리안은 보았다. 또한 그의 도덕적인 성품과 엄격한 도덕생활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그로 하여금 규율이 해이해지고 모든 것이 형식으로 흘러가는 교회에서 자연히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신은 결코 정통적인 기독교의 교리와 생활에서 떠나지 않았다. 교회에서는 몬타누스파를 정죄하였지만 이 위대한 인물을 따르고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격려와 원조를 받았다. &lt;br /&gt;샤프는 말하기를 “터툴리안을 한 신학자로 볼 때에는 광신적인 분리파라 하기에는 거리가 먼 것이었으며, 그의 저서는 분명히 어느 사람의 것보다 교회에 필요하고 감화를 주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lt;br /&gt;노년에 터툴리안은 몬타누스파들과 결별하고 몬타누스파와 카톨릭파의 중간입장을 취하는 독자적인 분파를 창설하였다. 이 터툴리안파는 그의 사후 200년 이상 존속하다가 어거스틴의 감화와 설득에 의해 마침내 기독교 주류파로 다시 합류하였다. &lt;br /&gt;그는 신학 특히 라틴 기독교 신학에 기여한 바가 컸기 때문에 그가 만약 몬타누스파에 들어가지 않았었다면 분명히 당대의 ‘성인(聖人)’으로 기독교 전승 안에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향한 그의 뜨거운 열심과 정열이 빚어낸 것이었으니, 그가 청교도적인 입장이 짙은 몬타누스주의에 들어간 것도 어찌보면 이해할 수 있는 모순이라 할 수 있다. &lt;br /&gt;&lt;br /&gt;정통을 고수한 불같은 변증가 &lt;br /&gt;터툴리안은 2세기때 아프리카 교부들 가운데 헬라어 대신 라틴어를 쓴 최초의 교부로서 현재 36권의 저술이 남아있다. 그는 대단한 열심과 열정을 가지고 글을 썼는데 ‘불같은 터툴리안’이라는 칭호를 얻을만큼 그 저작 스타일이 공격적이다. &lt;br /&gt;그는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법률적 접근을 통해 이해하였다. 그에 의하면 복음은 새로운 법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위대한 법률 제정자이며 재판관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교훈과 법에 충실해야할 뿐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주어진 그 법을 통하여 도움을 얻어야한다. 그는 성서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명확히 성서를 인용했으며 그런 연유로 교회 전체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깊이있는 주석가가 되었다. &lt;br /&gt;그의 글의 특징은 짧지만 재치있고 생생하고도 직관적인 표현으로 가득차 있으며 지나치게 논쟁적이어서 노골적인 표현도 서슴치 않았다. 그의 언어가 거칠고 통속적인 면이 있지만 거기에는 고상한 임무의 위엄과 참되고 진지한 존엄성이 있었다. 그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 모든 것은 현실적인 세계를 목표로 삼고 있었으며 실천적인 결단에 집중되었다. &lt;br /&gt;변증서로서는 회심 초기에 「순교자에게」를 썼고, 변증적 작품인 「여러 민족에게」와 「변증서」를 썼는데, 변증서에서 그는 이방 종교의 비합리성을 지적하기 위하여 이방종교를 해부하였다. 197-200년경에는 「영혼의 증거」를 썼다. 이 책은 심리적 증명에 의한 유신론 변증서로서. 이 책에서 그는 인간 내면의 종교성을 말하였는데 사람의 영혼은, 한 분 하나님만을 알고 있으며 영혼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또 마귀의 권세로부터의 보호를 하나님께 호소하고 싶어한다고 믿었다. 212년에는 「스카풀라」를 썼는데 이것은 아프리카 총독 스카풀라가 기독교를 박해하는데 대한 일종의 경고였다. &lt;br /&gt;교리논쟁서로서는 200년경에 쓴 「이단규정에 대하여」, 206-211년 사이에 쓴 「헤르게네스논박」, 「마르시온논박」, 「그리스도의 육신에 대하여」는 모두 영지주의를 논박하는 글들로서, 이단들에게는 성경상의 어떠한 권리도 기독교 전승을 공유할 권리도 없다고 주장한다.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신앙고백에 일치해서 성서를 이해하는 것으로 족하다. 이런면에서 사도신경은 교회공동체에 의무를 부과하는 ‘신앙의 규칙’으로서 요약되어 혼동없이 전승되었다. 또 그의 「프락세아스 논박」은 단일신론을 논박하는 글로서 이 글로 그는 삼위일체론에 지대한 공헌을 했고, 이 책을 통해 서방에서 기독론적, 삼위일체론적 논의를 위한 표상과 개념을 각인해 놓았다. 교회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은 그의 교리가 아다나시우스, 어거스틴, 다른 교부들, 니케아 회의(325년), 칼케톤 회의(451년) 등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에 있다. &lt;br /&gt;여기서 그의 힘차고도 강력한 메시지를 들어보자. &lt;br /&gt;&lt;br /&gt;“이제는 만민이 시인하고, 이제는 높은 자리에 계시고, 이제는 승리하신 우리 주님이 속히 재림해 오시는 저 장관을 보라! …나는 말할 것이다. 이분이 너희가 유다에게 돈받고 산 분이다! 이분이 너희가 갈대와 주먹으로 치고, 침을 뱉어 모욕을 주고, 쓸개즙과 신포도주를 마시게 한 분이시다!” &lt;br /&gt;&lt;br /&gt;장차 재림하셔서 죄악세상을 심판하시고, 당신의 공의로 죄인들을 심판하실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한 그의 설교는, 당시 박해받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되었다. &lt;br /&gt;&lt;br /&gt;오늘날 흔히 사용되고 있는 신학 용어들 중에는 터툴리안이 처음 사용한 것들이 많이 있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 낸 사람도 터툴리안으로, 그는 “한 본체 안에 세 위격이 연합되어 계신다”는 교리를 공식화하였다. 또한 성례전, 부활, 참회, 신약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도 터툴리안이다. &lt;br /&gt;그의 신학은 대체로 당대에 전형적이었으며 몬타니즘의 영향으로 심하게 변질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의 작품은 상당히 균형잡혀 있으며 그 작품의 상당수가 서방 사상에 근본적으로 중요하게 남아있던 교리적인 체계를 재구성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는 진정 위대한 초기교부들 가운데 한사람이며 라틴 기독교 신학의 선구자이며 서구 정통교회의 옹호자였다. &lt;br /&gt;그의 삶은 오늘날 신자들에게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난 도덕적인 빛을 삶 가운데서 실천하도록 하나의 도전을 던져준다. 그의 생애는 이교 철학과 사회와 교회에 만연한 부패를 개혁하려고 일생을 헌신한 생애였다. 또한 교회를 박해하던 어려운 시기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저술활동을 할 수 있었는지 그의 저술에 대한 정열과 용기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폭넓은 그의 사상은 라틴 신학의 아버지로서, 오늘날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lt;br /&gt;&lt;br /&gt;오명희&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quot;&gt; &lt;/span&gt;&lt;!-- 테러 태그 방지용 --&gt;&lt;/div&gt;</description>
                        <pubDate>Sat, 17 Dec 2011 20:06:4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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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찰스 그랜디슨 피니</title>
            <dc:creator>최용우</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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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quot; id=&quot;writeContents&quot;&gt;찰스 그랜디슨 피니 &lt;br /&gt;&lt;br /&gt;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그 &apos;온전함&apos;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lt;br /&gt;&lt;br /&gt;뉴잉글랜드에서 시작된 영적부흥운동은 남부와 서부를 거쳐 1800년에는 테네시와 켄터키의 서부 개척지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종교적인 논쟁이 일어나고 국가의 정세가 험악해지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19세기 미국은 영국에서 갓 독립된 나라였다. 독립된 나라의 헌법은 국가와 종교의 분리를 강조했고, 따라서 종교는 개인의 자유에 속했으며 자유주의자들은 아예 종교를 버리려했다. 도덕은 땅에 떨어졌고 곳곳에 불법이 성행했다. 불신앙적인 문학이 홍수처럼 범람했으며 종교는 정지상태에다가 교회는 날로 쇠퇴해 갔다. 청교도들이 처음에 아메리카에 상륙한 이래로 기독교가 이처럼 쓰라린 시험을 받은 적은 없었다. 이런 시대적인 요청에 복음을 새롭게 해석하고 새로운 방법으로 영적 대각성을 일으켰던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19세기 근대 부흥운동의 아버지’로 불렸던 찰스 그랜디슨 피니이다. “진정한 부흥운동은 기존의 가치개념이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체계가 등장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가치관의 혼란을 일으킬 때 새로운 예언자가 등장해서 전통적인 가치를 새롭게 해석해 줌으로서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안토니 윌레스) &lt;br /&gt;&lt;br /&gt;어린 시절 &lt;br /&gt;‘근대 부흥운동의 아버지’ 찰스 그랜디슨 피니는 1792년 8월 29일, 코네티컷주 리차드 카운티 위런에서 실베스티 피니와 리베커 라이스 피니의 7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코네티컷 주가 점점 땅이 부족해지고 땅값이 오르자 찰스의 가족은 그곳을 떠나 뉴욕주 오네이다 카운티의 하노버(지금의 커클랜드)에 정착하였다. &lt;br /&gt;피니는 1912년 예일대학에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반대를 받자 2년동안 뉴저지에서 교사생활을 거쳐 해밀턴 오네이다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18년 뉴욕 아담스 대학에서 법률공부를 하면서 벤저민 라이트 판사의 법률 사무소에 도제로 들어가 일하면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그후로 그는 정기적으로 아담스 지방의 법원에서 소송사건을 다루었다. &lt;br /&gt;&lt;br /&gt;회심 &lt;br /&gt;법률서적에 인용된 성경문구들을 접하면서 성경에 끌리게된 피니는 성경을 읽는 한편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 후 강렬한 내면의 갈등을 겪으며 열심히 기도하던 중에 1821년 10월 10일 자신이 근무하는 법률사무소에서 기도하다가 회심을 경험하게 된다. 그는 환상가운데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났다. “나는 주님의 발 앞에 쓰러져서 나의 영혼을 주님 앞에 쏟아 놓았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울면서 목 메인 소리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회개를 다하였다. 나는 주님의 두 발을 나의 눈물로 다 적시어 놓았다. 갑자기 성령이 나에게 임하셔서 마치 내 몸과 영혼으로 뚫고 들어오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마치 전류가 내 몸뚱이를 통과하는 것 같았다. 정말 성령은 사랑의 물결이 엄습해 오듯 내게 밀려왔다. 성령의 파도가 계속 밀어닥칠 때 나는 감당할 수 없어 죽을 것만 같았다…” &lt;br /&gt;이러한 피니의 회심 체험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빛과 음성을 듣고 땅에 엎드러지는 현상으로 이어졌다. 어느날 아침, 교회 기도회에 참석했을 때 돌연히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신비한 모습으로 그를 두루 비추었다. 그는 땅에 쓰러졌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자신의 편에 서서 변론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lt;br /&gt;이런 영적체험 후 피니의 복음전도 사역은 화산처럼 폭발하기 시작하였으며 그는 전도 유망한 변호사직을 사퇴하고 설교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lt;br /&gt;그가 고향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아버지가 문 앞에 나와 그를 맞으며 건강에 관해서 묻자 “아버지, 전 괜찮습니다, 그런데 우리집에서 기도하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그 말을 듣고 아버지는 말했다. “들어오너라 찰스. 네가 기도해 주렴.” 이렇게 시작된 기도의 회복은 찰스의 부모님과 여러 남매들을 회심케 하였고, 나아가 그 마을에 신앙의 불을 일으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lt;br /&gt;찰스는 세인트 로렌스 장로회의 배려로 신학을 공부하여 1824년 7월1일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로부터 50년동안 미국, 영국, 스코틀랜드 등지를 다니면서 부흥회를 인도했다. 힘찬 음성을 지닌 그의 설교는 법률적인 경향이 많았다. 그는 마치 배심원들 앞에서 변호를 하듯 명쾌하고 분명한 어조로 그리스도를 위한 변론을 제기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인의 인격적 성화를 강조하며 당시의 사회를 크게 변화시켰다. &lt;br /&gt;&lt;br /&gt;목회와 개혁활동 &lt;br /&gt;부흥사로서 큰 사랑을 받은 피니는 여러해 동안 많은 도시를 순례하며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제퍼슨 카운티, 세인트 로렌스, 에번즈 밀즈, 앤트 워프, 브라운 빌, 구버너 등지에서 일련의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825년에는 웨스턴, 트로이, 유티카, 로움, 오번까지 퍼져 나갔다. &lt;br /&gt;1826년 겨울에서 봄에 이르는 동안 유티카 지방에서 인도한 부흥회에서는 회심한 사람이 3,000명에 달했다. 그는 일단 부흥회를 시작하면 한 도시에서 일년이상 계속 집회를 인도하였다. 뉴욕에서는 7년 동안 대집회를 가졌다. 1831년. 피니가 뉴욕시의 로체스터에 있는 제3장로교회에서 6개월 동안 주도한 부흥회는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설교로 10만명이 회심했는데, 그 중에는 그 도시의 지도층 인물들도 꽤 포함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피니의 집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상점의 문을 닫고 술집들은 폐업했다. 극장은 마차 대여소가 되었고 범죄율은 2/3로 감소되었다. 그후 2년 동안 그 도시의 감옥은 실제로 텅텅 비었다고 한다. 로체스터에서의 집회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신앙운동’이라고 불려졌으며, 1831년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적각성의 해’였다. 그때 이후로 부흥회는 미국 도시사회의 한 특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lt;br /&gt;1832년, 피니는 뉴욕에 있는 제2장로교회로 옮겼지만, 극단적 칼빈주의를 신봉하는 교회측과 사사건건 부딪치다가 1834년 친구들이 그를 위해 특별히 지은 브로드에이 장막교회라는 회중교회로 자리를 옮겼다. &lt;br /&gt;피니는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다른 목사들과는 달리 자유로운 형태의 설교를 했으며 개인의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해 주었다. 맨 앞줄에 ‘통회의 자리’라는 좌석을 따로 마련해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이 와서 기도를 요청할 수 있게 했다. 여자들도 공개적으로 회중 앞에서 간증과 기도를 하게 했으며, 사람들이 울며 부르짖는 것을 비롯해 여러 가지 감정 표현을 할 수 있도록 했다. &lt;br /&gt;피니는 부흥회의 준비과정과 기도를 중요시했다. 부흥회를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그 지역 목사와 평신도를 소집해 기도모임을 조직했다. 그리고 회심한 사람들을 돌보고 훈련시킬 것을 가르쳤다. 그래서 부흥회가 끝난 뒤에는 새로운 회심자들의 가정을 방문해 그들을 교회로 인도하게 하였다. 이러한 피니의 ‘새로운 부흥운동’은 반노예운동, 남녀차별철폐, 형무소개혁, 교회내에서의 빈부차별 반대, 금주와 절제운동 등 많은 사회적인 개혁운동을 수반했다. &lt;br /&gt;피니의 부흥운동은 기존질서를 옹호하는 보수주의 운동이 아니라 기존사회를 성서적인 원리로 변화시키려는 개혁운동이었던 것이다. &lt;br /&gt;&lt;br /&gt;장로교와의 갈등 &lt;br /&gt;피니의 새로운 방법의 개혁운동에 반대한 코네티컷 주의 아사헬 냇틀튼 목사와 다른 목사들은 정통적인 전통을 고수하려 했다. 반대세력은 피니에 대해 거짓 풍문을 퍼뜨렸으며, 방해공작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온 교회가 그에게 강단을 허락하지 않을 정도의 반대도 있었다. 피니는 일생을 통하여 많은 반대와 조롱을 받았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 그는 방해공작이 심할수록 더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영적체험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의 부흥운동은 더욱 거대한 불길이 되어 거세게 타올랐다. 그를 반대하는 세력은 약해지고 반면에 그를 지원하는 세력은 강해졌다. 미국 콜롬비아 노회에서는 거짓 송사만을 믿고 특별위원회를 구성했지만 피니의 설교를 듣고 오히려 그의 복음 전하는 일에 협조했다. &lt;br /&gt;1932년 재발성 호흡기질환과 콜레라로 인해 여행을 할 수 없게된 피니는 뉴욕시에 있는 제2장로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1835년 오하이오에 있는 오벌린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고 16년 후에는 총장이 되었으며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서 복음전파 뿐 아니라 성결운동을 펼쳐나가 현대부흥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그는 ‘대학은 죄인들을 회심하게 만들고 성화에 이르게 하고 이것에다 모든 교육적 기능들을 종속시켜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오벌린 대학은 그 후 곧 세계적인 기독교 영향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lt;br /&gt;&lt;br /&gt;완전성화는 하나님의 명령 &lt;br /&gt;피니는 전통적인 신학의 틀을 버리고 성서로 돌아가서 성서적 기독교를 재건하려 했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잊어버리지 않으면서 인간의 책임도 충분히 강조했다. 이런 그의 신학은 성결에 대한 강조로 이어졌다. 그는 말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그 ‘온전함’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그가 보기에 성령은 완전한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신자가 복종하기만 하면 모든 분야에서 그리스도의 힘을 발휘하게 돕는 분이었다. 이것은 회개와 중생과는 다른 것이다. 신자라 하더라도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과 안받은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산다고 주장했다. 즉 성령세례를 받은 이는 죄로부터 벗어나 권능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그후 ‘성령세례‘는 미국 성결운동의 주요 요소가 되었다. &lt;br /&gt;피니는 일생동안 여러 가지 책과 설교집, 부흥 강연집, 자서전, 그리고 논문들을 썼다. 그 중에 중요한 것은 ‘신앙부흥운동강의’(1835)로서 부흥운동을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가에 대한 일종의 교범이다. 또 그의 ‘조직신학강의’(1846)에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논하였다. 그가 말하는 성화는 ‘하나님의 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으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하나님처럼 완전함’을 의미했다. 피니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이 하나의 의무이며 이세상에서 도달할 수 있는 영적수준 뿐만 아니라 실천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믿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체험을 의미한다. 완전성화는 하나님의 명령일 뿐만 아니라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된 약속이다.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명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완전성화는 각 개인의 책임이므로 인간의 노력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또한 그의 ‘회고록’(1876)은 19세기 전반기의 대부흥운동에 참여했던 그의 남다른 행적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lt;br /&gt;&lt;br /&gt;찰스 피니는 19세기 미국 기독교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어떤 학자들은 피니의 중요성이 남북전쟁 당시의 링컨과 비견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하며,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서 19세기의 미국 기독교의 전형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교회사가들은 그가 평생 회심시킨 사람이 50만명이나 된다고 추산한다. 그의 위대한 공적은 기독교 역사상 결코 허물 수 없는 금자탑을 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사용한 혁신적인 새로운 방법 등은 무디, 빌리 선데이, 빌리 그래엄 등과 같은 후대의 복음 전도자들을 위한 길을 닦아주었다.&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Gulim; FONT-SIZE: 14px&quot;&gt; &lt;/span&gt;&lt;!-- 테러 태그 방지용 --&gt;&lt;/div&gt;</description>
                        <pubDate>Sat, 17 Dec 2011 20:05:2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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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황혼을 아름답게 사는 은퇴 목사님 부부 이야기</title>
            <dc:creator>최용우</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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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lt;img src=&quot;http://www.cyw.pe.kr/xe/files/attach/images/24236/489/483/8e3317b63365102118fa35689e84a8bd.jpg&quot; alt=&quot;1299900225287_1.jpg&quot; title=&quot;1299900225287_1.jpg&quot; width=&quot;640&quot; height=&quot;18000&quot; style=&quot;WIDTH: 640px; HEIGHT: 18000px&quot; /&gt; &lt;/p&gt;
&lt;p&gt;&lt;img src=&quot;http://www.cyw.pe.kr/xe/files/attach/images/24236/489/483/174eeeb4c80d61a24f8e5d7d193aa470.jpg&quot; alt=&quot;1299900225287_2.jpg&quot; title=&quot;1299900225287_2.jpg&quot; width=&quot;640&quot; height=&quot;18000&quot; style=&quot;WIDTH: 640px; HEIGHT: 18000px&quot; /&gt;&lt;/p&gt;
&lt;p&gt;&lt;img src=&quot;http://www.cyw.pe.kr/xe/files/attach/images/24236/489/483/b062b16733307832aef67b69d6c6bcef.jpg&quot; alt=&quot;1299900225287_3.jpg&quot; title=&quot;1299900225287_3.jpg&quot; width=&quot;640&quot; height=&quot;18000&quot; style=&quot;WIDTH: 640px; HEIGHT: 18000px&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src=&quot;http://www.cyw.pe.kr/xe/files/attach/images/24236/489/483/3f2cf12837d2e367c31d03fc300ac8c7.jpg&quot; alt=&quot;4.jpg&quot; title=&quot;4.jpg&quot; width=&quot;640&quot; height=&quot;19800&quot; style=&quot;WIDTH: 640px; HEIGHT: 19800px&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 &lt;/p&gt;&lt;/div&gt;</description>
                        <pubDate>Fri, 16 Dec 2011 10:33:29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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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세상 행복을 말하는 현대 교회들</title>
            <dc:creator>황부일목사</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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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행복은 모든 인간의 바램입니다. 누구나 다 삶에서 부족한 것이 없이 만족을 느끼고 기쁨과 &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흐뭇한 상태가 되기를 원합니다. 행복 추구가 모든 인간들의 공통적인 삶의 목표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이는것 같으면서도 잡을 수 없는 무지개 같은 것입니다. 잠시 느끼는것 같으면 어디론가 사라지고 열심히 쫓아가 잡으려 하면 또 멀리 가버리곤 하는 것입니다. 더 말할것 없이 세상엔 만족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모두는 본질적으로 불행의 형벌을 영원한 굴레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문제는 오늘날 교회들이 행복을 많이 말하고 그것을 하나님을 통해 얻고 누릴 수 있다고 말하는데 대부분 보면 사람들이 기대하는 상태의 행복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 것이 우리가 갖기 어려운 좀처럼 실현되지 않는 행복을 기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룰 수 있고 얻을 수 있다고 교회들이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거짓 선지자들이 평강이 없는데 평강이 있는 것처럼 미혹하며 사람들이 그 말대로 이루어지기를 굳게 바라게 하는 것과 꼭 같은 경우가 된것입니다.(겔13:6,10)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오늘날 수많은 교회가 있지만 그 많은 교회들 중에 교회 모습이 본질적으로 안되는 것이 있는데 기독교 신앙을 인간들이 바라는 조건이나 형편을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은혜로서 채워주고 해결해 준다고 열심히 전도하고 불러 모아놓고 그렇게 믿도록 한다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세상적인 허구의 행복을 말한다면 거기에는 기독교 이상주의나 이교도처럼 기적 중심의 잘못된 신앙과 거짓 신앙만 있을 뿐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참 교회는 행복의 진리를 진실하게 말하며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나라들의 기대적 행복과 약속된 하나님 나라의 행복의 차이를 복음으로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미 그렇게 행복해진 교회의 증거요 구원의 실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획이 언약된 그대로 성취되어 이루어진 거룩한 교회는 신령한 복인 하나님 나라의 행복을 본질로 가지고 구원을 이루는 삶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신 행복자 이스라엘에 대한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 리로다”고(신33:29) 말씀했습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여기서 행복자란 세상에 그 어떤 좋은 여건이나 형편이나 소원성취나 기대하는바 즐거움을 더 가진 자가 아니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고 살아가는 자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가르치는 행복은 구원에 있고 그 구원을 누리며 살아감에 있음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너는 행복자로다”했고 이렇게 하나님 백성이 행복한 조건은 세상에서 그 어떤 여건이나 형편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에 있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우리가 알다시피 당시에도 수많은 족속들이 있었지만 이스라엘만이 하나님 백성으로 선택을 입었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과 언약하신 대로 애굽에 내려진 심판에서 유월절 사건으로 살리시고 건져내어 언약의 땅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거룩히 구별되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로 된것입니다. 이 구원이 바로 이스라엘을 행복자로 만든 근원이고 영원한 조건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들을 돕는 방패시요 영광의 칼이 되심으로 대적이 굴복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3:15절에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언약의 성취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바 “네 씨가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창22:17-18)는 말씀의 성취인 것입니다. 이것은 오실 메시야 안에서 사탄의 권세가 짓밟히고 언약의 후손들이 그 권세에서 벗어나는 구원의 복을 얻을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일한 것이 없이 은혜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은 행복한 자라고 증거한 것입니다.(롬4:5-8)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인류의 불행은 사탄의 미혹을 통해 범죄한 인간이 된것이고 그리고 그 죄의 형벌을 영원히 받아 진노의 자식이 된것에 있는 것입니다. 즉 죄와 허물로 죽고 마귀에게 속하여 그 지배를 따라 헛된 욕망을 좇으며 영원한 사망의 형벌의 삶을 살아가는 진노의 자식이 된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죄로 불행해진 인생에 대해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은 아무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이것도 폐단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가 무엇이 유익하랴 일평생을 어두운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느니라”(전5:15-17)고 증거한 것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때문에 인간은 세상에서 그 어떤 부귀영화로도 참된 행복을 조금도 맛볼 수 없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육신의 즐거움과 인생의 행복을 얻고 누려 보려고 온갖 것을 다 갖추며 많은 보화와 많은 첩까지 가져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었고 무익한 것이라 했고 미친짓이었다(전2:1-11)고 고백했습니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인생은 죄의 형벌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이나 또한 구원받아 의롭게 된 성도를 향해 너는 행복자로다 너같이 구원 받은 자가 어디 있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은혜로 받은 구원의 행복을 살며 이루어 가는 것만 남았습니다. 그것은 이제 우리의 구원의 삶인 행복을 위해 우리에게 명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살아감에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모세는 증거 하기를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 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언약적 요구의 말씀 속에 이미 구원받아 본질적으로 행복해진 성도들이 그 구원의 행복을 살아가는 진실한 조건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것을 정직하게 증거하고 그 모습을 이루도록 성령의 가르침에 의지해야 합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인간의 불행한 요인과 영원한 고통으로 가는 상태는 거짓의 아비요 처음부터 살인자된 사탄에게서 였습니다. 사탄은 행복한 낙원을 이루며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된 인간을 시기했고 거짓으로 미혹했습니다. 연약했던 하와에게 접근하여 먹으면 정녕 죽을 선악과를 따먹게 했습니다. 그것을 먹으면 낙원보다 더 이상적인 하나님처럼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낙원에서의 행복을 보지 못하게 미혹한 것입니다. 하와가 그 순간 선악과를 볼 때 먹음직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여겨졌습니다.(창3:6) 하와는 그 선악과를 따먹고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한 것입니다. 그것을 먹으면 정녕죽고 영원한 불행과 형벌의 고통에 빠지는 선악과가 오히려 그것을 먹으면 더 행복해 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욕망이 생긴 것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지금도 사탄은 끝없이 인간들을 거짓된 행복으로 미혹하고 있습니다. 욕망적 행복을 육체의 본성으로 심어 놓은 것입니다. 그 소욕의 기대에 맞추어 예나 지금이나 거짓 선지자들은 세상에 행복된 평강이 없는데 평강이 있다며 그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탄의 종이요 거기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의 약속된 하나님 나라의 행복을 왜곡하고 보이는 세상나라에 우리의 행복이 있는 것처럼 항상 감언이설로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보이는 풍속이나 문화나 좋은 형편이나 자기 기대성취에 행복이 있는 것처럼 강조하여 끝없이 원하게 합니다. 누구도 이 거짓된 행복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 일시적인 거짓된 행복을 하나님을 통해 간절히 바라보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볼 때 사탄의 권세아래 있는 거짓된 교회들의 모습이든가 아니면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사데교회처럼 교회 모습을 이루는 복음이 없고 육체의 소욕을 따라 주를 좇는 잘못된 교회일 것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굴림; mso-hansi-font-family: 굴림; mso-ascii-font-family: 굴림&quot;&gt;참 교회는 성도를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 거짓 행복을 좇는 욕망의 권세를 진리로 이기고 하나님 나라의 약속된 구원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이 있는 거룩한 교회인 것입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
&lt;p class=&quot;바탕글&quot;&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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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09 Dec 2011 22:33:1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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