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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type="text">설교</title>
      <updated>2012-02-05T22:10:23+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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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지금 어디에서 살고 계십니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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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김학중 목사</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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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지금 어디에서 살고 계십니까&lt;br /&gt;&lt;br /&gt;본문 : 빌립보서 3;17∼20&lt;br /&gt;“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lt;br /&gt;&lt;br /&gt;얼마 전 몇몇 웹사이트에서 한국에 살고 있는 주한미군들을 대상으로 “한국에 오래 있었다는 걸 알게 될 때”라고 하는 풍자글이 확산된 적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냉면 먹으면서 가위로 잘라주기를 바랄 때나,친구가 주차장에서 차를 뺄 때 ‘오라이 오라이’를 외치는 자신을 발견할 때나, 별 이유없이 일본이 싫어질 때와 같은 것들이 자기 자신이 한국에 오래 살았다는 느낌을 받을 때라는 말입니다.&lt;br /&gt;노래방에서 친구가 노래부를 때 자꾸 ‘아싸’ 하면서 추임새를 넣을 때에나, 소주 마시고 ‘캬아’하는 소리가 먼저 나올 때, 고향인 뉴욕에 갔다가 패스트푸드점 중 롯데리아를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자신이 미국인임을 깜빡 잊어버리는 경우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lt;br /&gt;이런 내용들은 전반적으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우리 한국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들은 습관처럼 몸에 밴 무수한 행동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면서 살아갑니다. 무심코 지나쳐버리는 수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이미 무의식적으로 진행되는 나의 행동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우리의 의식구조나 생활방식은 바로 여기에 기초해서 형성됩니다.그러나 여기에만 머무른다면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새로운 시민권자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의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의 영원한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lt;br /&gt;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고 천국시민권자인 이상 그것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천국 백성인 우리가 여전히 이 땅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야 합니까? 내가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천국 사람의 증표들이 나타나야 합니다.무의식중에 몸에 밴 천국의 냄새가 나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 2:15) 오늘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겠습니까? 오늘도 천국 백성으로 지배받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시다.천국의 무의식이 내 안의 세상 의식을 누르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시다.&lt;br /&gt;* 기도: 내 자아를 깨뜨려주소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자녀로서의 합당한 삶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lt;br /&gt;/김학중 목사(새안산교회)&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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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물, 물 좀 주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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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2-02-03T23:13:54+09:00</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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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허태수 목사</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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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물, 물 좀 주소! &lt;br /&gt;사 55:1-3, 요 7: 37-39 &lt;br /&gt;2009.7.19&lt;br /&gt;&lt;br /&gt;사람의 몸은 70%가 물입니다. 금식하는 사람들도 물은 마십니다. 사람이 한 달 이상 밥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물을 오래 마시지 않으면 죽지요. 생명 있는 존재에게 물은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물도 물 나름이죠. 우리가 말하는 ‘물’이란 오염된 물이 아니라 생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몸에 이로운 물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lt;br /&gt;&lt;br /&gt;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지 한 달 되어서 씬 광야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투덜거렸습니다. &lt;br /&gt;&lt;br /&gt;“너희는 애굽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우리를 이 광야로 데리고 나와 모조리 굶겨 죽일 작정이냐?”(출 16:3). 그들은 모세에게 거칠게 항의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만나와 메추라기로 허기를 메운 백성은 르비딤에 이르러 마실 물이 없자, 다시 모세와 아론에게 먹을 물을 내라고 들이대었습니다. &lt;br /&gt;&lt;br /&gt;“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데려 내 왔느냐? 자식들과 가축들과 함께 목말라 죽게 할 작정이냐?” 그들은 마치 모세를 돌로 쳐 죽일 기세였습니다. 모세는 야훼의 지시대로 호렙의 바위를 나일강을 치던 그 지팡이로 치자,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왔습니다(출 17:1-7). &lt;br /&gt;&lt;br /&gt;사람이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은 견딜 수 없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그러기에 살아남기 위해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깨끗한 생수는 절대적이라 할 것입니다. &lt;br /&gt;&lt;br /&gt;이사야와 요한복음 본문은 목마른 사람들을 ‘오라고’ 초청합니다. &lt;br /&gt;&lt;br /&gt;“너희 목마른 사람들아, 어서 물로 나오너라. 돈이 없는 사람도 오너라. 너희는 와서 먹되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지불하지 말고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 1-3). 그리고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lt;br /&gt;&lt;br /&gt;“목마른 사람은 다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에 이른 것과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처럼 흘러나올 것이다”(요 7:38). &lt;br /&gt;&lt;br /&gt;이 말씀들의 선포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lt;br /&gt;&lt;br /&gt;솔로몬 왕 이후에 다윗의 왕국은 남과 북으로 나뉘었는데, 북 왕국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앗시리아 제국에게 멸망당했고 남 왕국 유다는 주전 587년에 바빌론 제국에게 멸망당했습니다. 종교지도자와 귀족들을 포함한 대부분이 바빌론의 포로 신세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억압의 시대에 살게 되었습니다. 비파와 수금은 나무에 걸쳐 놓을 수밖에 없었으니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와 희망이었습니다. 이럴 때 이사야 선지자는 야훼가 주시는 희망을 선포했습니다. 바빌론 제국을 정복한 파사 왕 고레스가 주전 536년 즉 유대인의 바빌론 포수 생활 50년 만에, 유다 백성의 고국 귀환 칙령을 내린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이방인 고레스왕을 통해서도 당신의 구원의 역사를 펼치신 것입니다. 그것은 목마른 사람들에게 생수와 같았습니다. 좌절과 체념 그리고 절망의 유다 백성에게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선지자 이사야가 “어찌하여 너희는 돈을 쓰느냐? 고 외치고 있는데,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습니다. 많은 포로들이 바빌론의 주변의 환경에 적응해서 상당한 부를 챙기고 번영을 누리었지만, 그것은 이교도 바빌론 정복자들의 관습을 추종하고 그들에게 동화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사야에게는 그런 것들이 영혼의 굶주림과 갈증을 해결해 줄 것이 아니었습니다. 선지자는 진실로 참된 음료와 먹거리는 오직 야훼로부터만 오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지겹고 희망의 불꽃이 희미해진 상황에서 누구나 목마른 사람은 나와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외친 것입니다. &lt;br /&gt;&lt;br /&gt;초막절은 유월절과 오순절과 함께 유대인의 3대 명절에 속합니다.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조상들은 광야에서 집 없이 떠돌았던, 그 시절을 회상하려는 것이 초막절 의식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옛날처럼 지금도 초막절에 자기들의 집 마당이나 여행자는 호텔 주변에 천막을 치고 조상들의 떠돌이 광야생활의 기억을 되새깁니다.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은 초막절을 이레 동안 준수할 것을 요구를 했습니다(레 23:40). 바리새인의 요구대로 초막절에 성전제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좋은 나무에서 딴 열매를 가져오고 또한 가져 온 종려나무 가지를 제단을 향해서 흔들었습니다. 그 의식 전체가 하나님이 주신 물에 대한 감사요, 비를 기원하는 기도 행위요, 그들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목말라 할 때 바위에서 솟아난 물에 대한 기억입니다. 이런 초막절 절기 마지막 날에 예수가 목마른 사람들을 초청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처럼 흘러나올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여기 ‘그의 배’에서 생수가 흐른다고 했는데,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배를 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를 믿는 성도들의 배라고 할 수 있겠죠.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 안에 솟아나는 생수를 가질 것을 뜻합니다. &lt;br /&gt;&lt;br /&gt;요한복음 4장을 읽으면, 수가성 우물가에서 예수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합니다. 여인은 다섯 남자와 살았던 과거 때문에 그 사회에서 왕따 당하는 처지에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내적으로 영적으로 갈급한 처지에 있었을 것입니다. 마실 물(H2O)로 시작된 대화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물로 이어집니다. 예수는 여인에게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는 샘물이 될 것이다”(4: 14)고 말씀합니다. 이 물은 모세가 바위를 쳐서 솟아나게 한 물의 차원과 비교할 수 없는 물입니다. 생명수 입니다. 육의 목마름을 해갈시키는 것을 너머서 인간 전체를, 영과 육을 다 합한 인간 존재 자체의 갈증을 풀어주는 생명수입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길이고 진리며 생명입니다. 생명의 원천입니다. 그러기에 생수를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배에서 생수가 강처럼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는 광야에서 목말라 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을 솟아나게 한 바위와 예수님을 동일하게 여겼습니다. 바울 사도는 바위의 이미지를 그리스도에게 적용해서 “그들은 모두 똑같은 신령한 물을 마셨습니다. 그들의 동반자인 신령한 바위로부터 물을 마신 것입니다. 그 바위는 그리스도였습니다”고 합니다(고전 10:4). 어쩌면 요한복음 저자는 정화의 물줄기가 솟아나는 샘으로서 예수님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물 없이는 사람이 생명을 부지할 수 없듯이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은 살 수 없습니다. 왜냐면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깨끗하게 하고 생명을 활성화시키는 생수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그리스도가 주는 희망과 바른 삶의 가치를 포함한 인격적인 가치 일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다음으로 믿는 사람의 배에서 생수가 강처럼 흐른다고 하면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요한복음 본문 말씀(7:39)에서 그 해답을 발견합니다. &lt;br /&gt;&lt;br /&gt;“이것은 예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 믿는 사람들의 배에서 강처럼 흐르는 생수가 다름 아닌 성령이라 하였습니다. 주석가들은 초막절에 끌어 들이는 물을 성령을 끌어 들이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또한 생명수는 때때로 성령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의 배에서 생수가 흐른다는 것은 예수가 주시는 성령에 기인한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가 주시는 약속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생명을 주시는 성령 때문에 우리의 사상과 감정 그리고 우리 속의 탐욕 등이 순화되고 새로워져서 새 생명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가끔 ‘성령이 충만하다’는 표현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성령충만’의 현상을 마치 남들과 다른 힘과 그 흔적과 같은 것으로 이해들을 하고 있습니다. 전혀 틀린 것은 아니지만 꼭 옳은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이 임재한 그 자신의 인격적이고 가치관적인 변화와 그것에 따른 삶의 구현인 것입니다.&amp;nbsp;&amp;nbsp;&lt;br /&gt;&lt;br /&gt;세상 사람들은 항상 목말라 합니다. 그래서 어디 그 목마름을 해결할 물이 없을까 찾아다닙니다. 생수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원하는 생수와 예수님이 주시겠다는 생수는 엄연히 다릅니다. 물론 고리타분하지 않으면서도 오늘에 절실한 가치관을 심어 주는 사람이나 가치관의 혁명들이 여기 저기 있긴 하지만, 여전히 인간의 탐욕 분출은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그 인간들의 탐욕에 세상의 생수라는 것들은 항상 붕괴되고 맙니다. 그런데 다른 차원의 생수가 있습니다. 예수의 배 또는 믿는 이들의 배에서 흐르는 생수입니다. 성령이라는 생수입니다. 그 생수를 마시는 자마다 순화되고 새로워집니다. 새 생명으로 새 피조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lt;br /&gt;&lt;br /&gt;지금은 우리가 성령의 생수를 마셔 할 때입니다.&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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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행복의 관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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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2-02-03T23:13:54+09:00</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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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허태수 목사</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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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행복의 관건&lt;br /&gt;롬 8:31-39&lt;br /&gt;2009.7.12&lt;br /&gt;&lt;br /&gt;“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롬 8:31) &lt;br /&gt;&lt;br /&gt;여러분은 하나님이 누구 편이시라고 믿는가요? 하나님이 우리 편 또는 내 편이라고 믿는가요? 그렇다면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apos;하나님이 내 편&apos;이라는 말은 보편적인 선언의 뜻이 아니라 내가 고백하고 체험할 때 그렇다는 말입니다. 극심한 이기주의 신앙과 혼돈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고 머리로는 생각을 하면서도 실제로 믿음을 갖지 않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lt;br /&gt;&lt;br /&gt;“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32절) &lt;br /&gt;&lt;br /&gt;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주신 것이,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하고 예배한다면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받고 있고 하나님은 우리 편에 서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lt;br /&gt;&lt;br /&gt;이어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lt;br /&gt;&lt;br /&gt;“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소하겠습니까? 의롭게 하여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누가 감히 그들을 정죄하겠습니까?”(33-34절). &lt;br /&gt;&lt;br /&gt;외부의 공격이나 비난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이 정죄입니다. 남의 정죄를 받는 것도 견디기 힘든 것이지만, 더 무서운 것은 나중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정죄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하나님이 의롭게 하여 주신 사람을 그 누구도 정죄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lt;br /&gt;&lt;br /&gt;체면 문화가 발달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자신의 행복을 우선하지 않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워 왔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쉽게 정죄하곤 합니다. 우리는 자기희생적인 삶이 가장 모범적인 삶이라고 배워왔습니다. 버스차장이나 식모살이를 해서 번 돈으로 동생들을 대학에 보내는 것은 과거의 대표적인 미담이었습니다. 그런 희생적 삶이 숭고해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이 빠지면, 그것이 아무리 숭고하다 해도, 진정한 삶의 표준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lt;br /&gt;&lt;br /&gt;언젠가 어느 열녀비의 사연을 들었는데 남편이 위독하자 자기 허벅지 살을 떼어서 먹여서 살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전엔 그런 이야기에 감동을 받은 적도 있었지만, 최근에 그런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감동보다는 끔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과연 상을 줄 일인가. 그것은, 신하는 임금에게 여자는 지아비에게, 허벅지 살을 먹이면서까지 공경을 해야 한다는, 유교사회의 낡은 윤리일 뿐입니다. 그런 희생이 결코 아름다운 일이 아닌데도, 열녀비가 세워지면, 동네 사람들은 자랑스럽다고 하고, 보통의 여자들은 그것 때문에 열등감을 갖게 되고, 행여 재혼이라도 하게 되면 죽을죄라도 진 것처럼 수치스럽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유교 문화의 속임수가 우리에게 집단적으로 죄의식과 콤플렉스를 심어 주었습니다. &lt;br /&gt;&lt;br /&gt;그 외에도, 자신은 장남 또는 장녀이기 때문에 집안을 일으키려면 이런 저런 책임이 있고 부모와 형제에 대해 책임이 있다면서 힘들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집안의 모든 일이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하여 늘 자신에게 부담을 지웁니다. 요즘 부모들은, 옛날에 비하면 자식들에게 너무나 잘 대해주는 것인데도, 늘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고, 심지어 남들처럼 해외 유학을 못 시켜 주어 미안하다고 합니다. &lt;br /&gt;&lt;br /&gt;뿐만 아니라, 그들은 늘 자기 자신에게 미안해합니다. 늘 자기 몸을 해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술을 덜 먹어야 하는데, 담배를 끊어야 하는데, 운동을 더해야 하는데, 건강검진을 해야 하는데, 이러면서 늘 자신에게 미안해합니다. 그것이 필요하면 즉시 하면 됩니다. 그런데 하지는 않으면서 늘 미안해합니다. &lt;br /&gt;&lt;br /&gt;그들은 늘 외모에 대해서 콤플렉스를 갖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살이 쪄서, 말라서, 키가 커서, 작아서, 얼굴이 커서, 작아서, 길어서 짧아서 등등, 공연한 일들로 자기 자신을 열등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미남, 미녀만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자기를 받아들이고, 자신감에 넘치고,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택하시고 의롭다 하신 우리 자신을 자주 칭찬해 주어야 합니다. 가끔 거울을 보면서,“넌 참 멋있어! 나는 나의 이런 모습이 좋아! 나는 주님의 걸작이고 세상에 둘도 없지, 얼마나 멋진 일을 해낼지 기대하시라!”이렇게 말해 주어야 합니다. &lt;br /&gt;&lt;br /&gt;또 그들은 자기 시간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늘 끌려 다닙니다. 언제나“...해야 하는데”하면서 불안해합니다. 할 일이 있으면 즉시 하고, 오래 걸릴 일이면 계획을 세워 그때 가서 하면 됩니다. 그런데 늘 바쁘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별로 일을 하지 못하고 시간에 쫓겨 다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시간을 선물로 받은 우리는, 틈만 나면 나의 시간을 축하해 주어야 합니다.“야, 아주 잘했어. 오늘은 아주 멋진 날이야! 오늘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살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것이 축복이다. 나의 시간을 감사한다. 난 정말 행복하다”이렇게 늘 자신에게 말해 주어야 합니다. 아는 의사 한 분이 말하기를, 환자에게 어떤 약을 복용하라고 하면, 으레 사람들은“죽을 때까지 먹어야 하나요”하고 묻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는,“아닙니다. 살아계신 동안만 드십시오”하고 대답한답니다. 똑같은 날들을 살면서도, 어떤 사람은 감사하고 행복한 시간들을“살아가는”것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늘 죽음의 공포 속에서 조금씩“죽어가는”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시간을 정죄하지 말고, 선물로 받아들이고 축하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lt;br /&gt;&lt;br /&gt;이제 우리는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좀 더 자신감 있고 당당하게 살아야겠습니다. 나는 이 모습 이대로 온전히 주님께 받아들여졌고, 주님은 나를 가장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며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나는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자기주장을 할 수 있고, 이기적으로 살 수 있으며,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lt;br /&gt;&lt;br /&gt;우리를 의롭다 하는 이는, 전통도 체면도 사회적 통념도 아닙니다. 선생님도 부모님도 판사도 변호사도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 의해서는 그 어떤 일로도 정죄 받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 못하고 손가락질 하지만 주님 앞에서 의로운 일들이 많습니다. 나다나엘 호손의 &amp;lt;주홍글씨&amp;gt;라는 소설에서, 해스터 프린은 가슴에 A(간음)자를 새기고 살아가지만, 의로워 보이는 그 여인의 남편도, 그 교회 목사도, 그 누구도 그 여인을 정죄할 자격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 세상이 이해 못하지만 주님 앞에서는 의롭다 함을 받는 경험을 간직하며 삽니다. 그것만은 절대로 빼앗기면 안 됩니다. &lt;br /&gt;&lt;br /&gt;우리는 주님 앞에서 그냥 우리 이름일 뿐 어떤 직함도 지위도 신분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범생이어야 한다거나 효자, 효부여야 한다거나 의리가 있어야 한다거나 착해야 한다는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또는 매사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콤플렉스에서도 벗어나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런 것을 강요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때로 잘못할 수도 있고, 건방질 수도 있고,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잘못하지 않는 완벽한 존재를 만들려고 했으면 하나님은 하와가 선악과 따먹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완벽”보다 더 중요한“자유”를 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사이보그를 만들지 않으시고 잘못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 자유 때문에 선악과도 따먹었고 그래서 잘못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잘못을 할 수 있기에 인간이고 거기에 은혜가 있고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주님이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는데 감히 그 누가 우리를 정죄할 수 있겠어요.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lt;br /&gt;&lt;br /&gt;“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핍박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35-39절). &lt;br /&gt;&lt;br /&gt;이 우렁찬 승리의 선언의 핵심은, 우리에게는 그 무엇도, 핵 미사일도 꿰뚫을 수 없는 우리만의 거룩한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열거한 온갖 시련과 곤경과 불안과 공포 악의 권세 그 무엇으로도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 무엇도 우리를 이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신성불가침 영역입니다. &lt;br /&gt;&lt;br /&gt;우리는 늘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비난과 원망 하곤 합니다.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 노태우 정권에 대해 늘 군사정권만 사라지면 당장 정의 평화가 실현될 듯이 원망들을 했습니다. 김영삼 정권에 대해서도 IMF의 책임을 물었고, 김대중 정권에 대해서도 비슷한 원망들을 했습니다. 노무현 정권은 가장 많이 욕을 먹다가 어느 때 반전이 된 듯, 마치 영웅이었던 것처럼 불려집니다. 또 한 번도 경제가 어렵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 번도 기름 값이 올라가지 않은 적이 없었고, 실업이 심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또 북한의 위협이 고조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세계 10대 교역국이라고 하고 단군 이래 가장 잘 산다고 하는데도 뉴스를 보면 늘 어렵다는 얘기뿐입니다. 전쟁직후 1953년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67불이었고, 박 정권은 국민소득 1,000불만 되면 별천지가 올 듯이 선전했습니다. 지금은 무려 국민소득 20,000불 시대가 되었지만 별천지로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노태우 정권 때 곧 마이카 시대가 오면 보통사람들이 행복할 거라고 했지만 지금 차 두 대씩 갖고 사는 집도 많지만, 그리 행복한 것 같지 않습니다. 행복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셔서 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이지 절대로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lt;br /&gt;&lt;br /&gt;그런데도 우리는 경제 문제, 정치 문제, 사회적인 성공 등등으로 우리 자신을 너무 쉽게 또 자주 괴롭히고 침해합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못 사는 인도네시아나 필리핀 사람들이 행복지수가 높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너무 쉽게 우리만의 공간을 외적인 것에 내주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외적 조건에 의해서도 절대로 침해를 받을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고 살아야 합니다. 신앙을 갖고 산다는 것은 남들이 모르는 그런 시간과 공간을 간직하고 산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사도의 승리 선언처럼,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굶주림이나 죽음이나 삶이나 장래일이나 현재일이나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 거룩한 시간과 공간을 침해당하지 않고 간직할 수 있었기에 그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토록 위대한 하나님의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lt;br /&gt;&lt;br /&gt;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을 지키려면, 먼저 시간을 성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휴식이나 명상, 기도의 시간, 산책이나 여행 등, 자기 자신을 위한 시간을 사치나 낭비로 여깁니다. 헬렌 니어링 부부가 쓴 &amp;lt;조화로운 삶&amp;gt;에서 보면, 그들은 하루 일과에서 절반은 밭에서 일을 하고 나머지 절반은 꼭 휴식을 취하면서 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일과의 절반은 아니더라도 하루 한 시간이라도 일주일에 하루라도 꼭 자기 자신만을 위한 시간,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일에 주님 앞에 나오는 것도 시간을 성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소중하게 지켜야 우리도 이 세상 속에서 헛된 것들의 침해를 당하지 않고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습니다. &lt;br /&gt;&lt;br /&gt;바울이 그 무엇도“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한 점을 주목하세요. 우리가 절대 침해받아서는 안 되는 것은 주님과의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시간과 공간은 절대로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되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기도입니다. &lt;br /&gt;&lt;br /&gt;생명의 탄생 과정을 전자현미경으로 찍은 것을 보면 수억 마리의 정자가 난자에게 접근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난자와 만나 수정이 이루어지는 순간 보호막 같은 것이 쳐져서 다른 것이 들어오지 못하게 한답니다. 그렇게 해서 생명이 탄생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과 만나는 경험, 사랑하는 경험, 사랑받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 순간 우리 주위에는 보호막이 생기고, 이 세상의 그 어떤 근심도 불안도 그 무엇도 우리를 공격하지 못하고 우리의 믿음과 행복을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그것은 새벽기도만은 아닙니다. 어디서든 혼자 있을 때 기도하면 됩니다, 산책하면서, 집무실에서 일을 시작하기 전에, 차 안에서도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어느 때 어느 곳이든지 시간과 공간을 성별하여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분으로부터 받아들여짐을 확신하고 기뻐할 수 있는 훈련을 스스로 터득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속에 차오르는 기쁨이 있고, 남모르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뜻밖의 영감이 떠오르고 아이디어가 생깁니다. 자신도 모르는 능력이 내게 있음을 알게 됩니다. 신령한 비밀을 갖게도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그 어떤 외적인 것도 그를 침해할 수 없습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늘 승리하는 삶을 살고 행복한 생애를 살게 됩니다. &lt;br /&gt;&lt;br /&gt;이렇게 가장 소중한 것을 지켜서, 하루하루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시니 아무도 나를 대적할 수 없다는 자신감을 갖기를 바랍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셔서 내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받아들여주셨으니 이젠 세상 그 누구도 나를 정죄하지 못한다는 확신을 갖기 바랍니다.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거룩한 시간을 지키며 살기를 바랍니다. 세상 그 무엇도 침범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간직하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바울 사도처럼,“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고백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해요. &lt;br /&gt;&lt;!-- 내용이 끝나는 곳입니다.--&gt;&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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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잊혀진 이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교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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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2-02-03T23:13:54+09:00</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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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허태수 목사</name>
               </author>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잊혀진 이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교회&lt;br /&gt;막5:9&lt;br /&gt;2009.7.5&lt;br /&gt;&lt;br /&gt;그는 공동묘지에 살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손발을 묶어 놓아도 기어이 그것을 끊고 부수어 버립니다. 밤이고 낮이고 괴성을 지르며 돌로 제 몸을 마구 짓찧습니다. 오늘 본문 5장에 나오는 게라사 지방의 한 미친 사람에 대한 묘사입니다. 이것은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이해입니다. 한쪽 편 사람들의 눈에 그가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지, 실제 그가 그런 인물인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한쪽 편 사람들이 그를 그래서 &apos;위험한 존재&apos;로 취급하고 있습니다.&amp;nbsp;&amp;nbsp;&lt;br /&gt;&lt;br /&gt;왜 사람들은 그를 위험한 사람으로 보는 걸까요?&lt;br /&gt;공동묘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러는 건가요? 자기 몸을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묶지만 그것을 끊는 힘이 있어서 그런가요? 아니면 자기 몸을 마구 찧기 때문에 그런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할 것이라는 짐작 때문에 위험하다고 여기는 걸까요? 나는 이 원고를 쓰면서 얼마 전까지 우리교회 교우였던 진기씨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그녀는 위험합니까? 본문에 나오는 그 사람이 일반인들에게 위험할리는 없습니다. 당시의 공동묘지는 시신을 묻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버리는 곳이었습니다. 동굴이었습니다. 그는 거기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사는 동네하고는 완전히 차단된 그런 곳에 있었는데 그가 위험할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막연하게 그를 &apos;위험한 존재&apos;로 설정해 버린 것입니다.&lt;br /&gt;&lt;br /&gt;그러면 사람들은 이 인물에 대해서 뭘 알고는 있을까요? 얼굴은 자세히 보았을까요? 나이, 출생 관계, 살아온 내력은 알고 있을까요? 우리의 경험상 우리가 누군가를 나쁘게 말하거나 부정적으로 말하게 될 때 대체적으로 잘 알고 말하기 보다는 잘 알지 못하고 지레짐작으로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를 &apos;위험한 인간&apos;으로 판단하고 선언해 버립니다.&amp;nbsp;&amp;nbsp;성서 속에 나오는 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하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 피상적인 선입관인 것입니다. 요컨대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apos;거기 사는 그 사람&apos;은 없고 &apos;그 사람에 대한 어떤 자기 편견&apos;만 있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자, 그럼 오늘은 우리가 무덤에 살던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을 좀 해봅시다. 왜 그는 자해를 했을까요? 그것은 사람들에게 무서움을 주려고 하기 보다는 그 스스로 무서워서, 환경이 무섭고 자기를 격리시킨 사람들이 무서워서 그는 자기 몸을 해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짐작컨대, 사람들이 간혹 그를 어디선가 만나게 되었을 때 그는 아무런 해코지를 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붙들려 몰매를 맞고 쇠고랑에 채워졌을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그를 가둬 놓고 싶어 했으니까요. 혹시 모를 자신들의 불안한 사태가 현실로 일어날 것을 염려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공동묘지에 산다는 것보다 사람들의 그런 행위가 더 무섭지 않았겠어요? 그렇다면 그는 사람들을 만나면 본능적으로 두려워했을 것이고, 그래서 공동묘지로 그의 거처를 옮겼을지 모릅니다. 그곳으로 가야 무서운 사람들이 없으니까요. 그에게는 공동묘지라는 장소의 무서움보다 그를 경계하고 단정 짓고 행동하려는 사람들이 더 무섭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사람을 만나면 본능적으로 소리를 지르지 않았겠어요? 그리고 이리저리 뛰지 않았겠어요? 이른바 &apos;공동묘지의 미친 놈&apos; 입장에선 그를 그렇게 미치게 만든 귀신이 다름 아닌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들이 그에겐 귀신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amp;nbsp;&amp;nbsp;&lt;br /&gt;&lt;br /&gt;사람들은 이런 사연을 생각지 않습니다. 오직 눈에 보이는 그의 광폭한 행동만 주목합니다. 남에게 들은 이야기에만 신뢰합니다. 그리고는 그를 위험인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태도도 늘 이렇습니다. &lt;br /&gt;&lt;br /&gt;이런 그에게 이름이 있을리 없습니다. 직분, 사회적인 역할을 부여받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대신 &apos;위헌한 놈&apos;으로 그에게 딱지를 붙여 놓았습니다. 세상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세상에 있지 않은 이상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그저 &apos;게라사의 미친 놈&apos;인 것입니다. 사람들을 그를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했습니다. 그런 그가 무덤에서 살았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무덤]이란 살아 있었으나 죽은 자의 공간에만 갇혀 있는 존재들의 세상이 아닙니까? 거기 그가, 아직 죽지도 않은, 산 사람들의 공간에 있을 그가 죽은 자의 공간으로 쫓겨나 있는 것입니다. 누구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lt;br /&gt;&lt;br /&gt;그런 위험한 인물이 예수와 만났습니다. 만났다기보다는 마주친거죠. 그러나 사람들은 마주치는 것조차 꺼려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마주치자 피하지 않고 그에게 말을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요? 아닙니다. 이 상황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예수님의 모든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에게 말을 겁니다. &quot;당신의 이름이 무엇이요?&quot; 너무나 평범한 질문이라고요? 그럴까요? 그렇게 들리십니까? 아닙니다. 적어도 이 사람에겐, 그간 아무도 그를 향해 이렇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무엇보다 신기하고 놀랍고 기쁜 일이었을 것입니다. 아무도 그에게 예수님과 같은 인간애적인 관심을 갖고 얼굴을 마주쳐주거나 이름을 불러 준 적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에게 얼굴을 맞추고 말을 걸어오셨던 것입니다.&amp;nbsp;&amp;nbsp;&amp;nbsp;&amp;nbsp; &lt;br /&gt;&lt;br /&gt;그는 미처 대답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그에게 그런 일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있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에는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지껄입니다. 그러나 그는 곧 괴성을 지르거나 자기 몸을 해치지 않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자기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 말이 &quot;내가 예수를 따르겠다&quot;입니다. 그는 스스로 자기 생각과 말을 하는 사람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의해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 할 일과 가야 할 길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귀신에게서 풀려나는 순간입니다. &lt;br /&gt;&lt;br /&gt;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정신을 다른 곳에 둔 이들이 묻습니다.&lt;br /&gt;그러면 그 미친놈이 말했다는 &apos;군대 귀신&apos;은 뭐고 &apos;돼지 떼&apos;는 뭡니까? 이 표현은 유대나라의 군대나 게라사의 군대를 지칭하는 게 아닙니다. &apos;군단&apos;이라는 말은 오로지 로마군대 에서만 씁니다. 약 6천 명 정도 인데, 군사행동의 기본 단위가 바로 &apos;군단&apos;이었습니다. &apos;군단이 움직였다&apos;그러면 군대 전체가 동원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여기서는 &apos;전 로마&apos;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돼지 떼는 또 뭡니까? 대규모 돼지 사육장이죠. 그가 사는 근방에 돼지 농장이 있었던 겁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지만 로마군들과 그들을 비호하는 게라사 시민들은 돼지고기를 먹었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당하는 고통은 개인적인 장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한 개인의 죄거나 잘못에서 생긴 게 아니라 로마라고 하는, 국가라는 권력으로부터 비롯된 고통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구조거나 사회 또는 일반 사람들이 자기들의 이기주의를 위해 그를 삶의 공간에서 내 몰아서 생긴 불행이었습니다.&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lt;br /&gt;&lt;br /&gt;이제 우리는 여기서 지난 5월에 있었던 설교를 되짚어 생각하게 됩니다. 이 시대의 교회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결론짓기를, &apos;혈연과 이해관계의 가족주의를 떠나 그리스도를 한 아버지와 어머니로 모시는 이들의 새로운 가족개념&apos;을 세우는 것이 교회가 할 일이고, 이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뜻하시고 예수가 이루시기를 원하셨던 &apos;공동체&apos;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게라사 지방의 미친 사람을 대하는 예수를 보면서 우리는 오늘날 교회의 과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모두들 그를 잊은 채, 자기들이 규정하고 싶은 대로 그를 이야기하는데, 예수는 사람들에게서 망각되고 &apos;위험한 인물&apos;로 취급되는 그이와 마주대하고 말을 겁니다. 이름을 묻습니다. 세상과 사람들에게서 쫓겨나서 있으나마나한 사람, 심지어 그 자신에게 조차 잊혀졌던 이름을 불러줍니다.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없는 것과 진배없는 존재를 다시 있음으로 일으켜 세우는 분입니다.&amp;nbsp;&amp;nbsp; &lt;br /&gt;&lt;br /&gt;그러면 교회의 존재는 무엇인가? &apos;그들의 이름&apos;을 불러주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 망각 상황에 놓인 이들, 그래서 점점 자기 자신이 붕괴되어 가는 이들을 발견하고,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일이 교회가 해야 하는 일, 곧 전도인 것입니다.&lt;br /&gt;&lt;br /&gt;엊그제 어느 젊은 목사님과 점심을 같이 하는 자리에서 저는 아주 귀중한 이야기 하나를 들었습니다. 교회가 50년 이상 되면 그 교우들 중에서 칭찬받고 추천할 만한 시장 후보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을 키워 내지 못하면 그건 교회가 있어야 할 가치를 상실한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왜 여기 있어야 하는 겁니까? 우리 교회에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lt;br /&gt;&lt;!-- 내용이 끝나는 곳입니다.--&gt;&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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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거짓된 일상의 전복</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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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2-02-03T23:13:54+09:00</published>
      <updated>2012-02-03T23:34:42+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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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허태수 목사</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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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거짓된 일상의 전복&lt;br /&gt;마8:2-4&lt;br /&gt;2009.6.28&lt;br /&gt;&lt;br /&gt;예수님의 삶, 예수님의 실천과 가르침을 성경 말씀 속에서 한 구절을 찾으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사람마다 다양하겠죠? 그러나 비교적 객관적인 성경 구절은 &quot;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quot;일 것입니다. 여기서 &quot;가까웠다&quot;라는 때에 관한 지시어가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실천과 당시의 모든 유대인들이 바라마지 않았던 &apos;그 나라의 도래&apos;가 임박했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런 임박성 때문에 예수님의 선포는 메시아처럼 사람들에게 들렸습니다. &lt;br /&gt;&lt;br /&gt;그런데 문제는 여러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날, 그 때의 의미가 서로 달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외한 많은 사람들은 당시의 세상이 빨리 끝나기를 갈망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일상을 팽개치고 그 일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apos;이미&apos;도래했다는 것을 믿는 게 아니라 &apos;아직&apos;더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런 반면에 하나님의 나라가 와야 한다는 것은 동의 하지만 예수님의 그와 같은 선포에 대해서는 믿지 않는, 예수님을 미혹하는 사람처럼 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기득권자들이었습니다. &lt;br /&gt;&lt;br /&gt;이제 그 때를 자기 자신에게 받아들임에 있어서 어떤 이들은 아주 적극적인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마지막 때를 스스로의 노력과 수고로 쟁취하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군대를 쫓아내고 다윗의 나라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주 능동적인 사람들이었죠. 그러나 수동적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저 가만히 하나님이 그 때를 이룰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들 가운데 직면한 역사적인 현실을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삼는데 있어서 비슷한 듯하면서도 각기 다릅니다. 성서 속에도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갈등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갈등 주제는 다름 아니라 &apos;하나님나라가 도래하는 시간&apos;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lt;br /&gt;&lt;br /&gt;보리슬라프 페키치 의 [기적의 시간]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가 인용하는 성서 원문이 오늘 우리가 읽은 마8:2-4의 &apos;나병환자&apos;이야기입니다. 성서 본문에도 등장하지만 소설에도 일반 사람들이 거주하는 동네와 나병환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구별되어서 나옵니다. 이것은 불결과 정결의 대비된 상황연출이죠. 예수님은 환자들만 가득한 부정한 마을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한 문둥병환자를 만납니다. 시신을 씻는 일을 하는 여자였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에게 자신의 꿈에 대해서 말합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인은 오늘 우리가 아는 대로 깨끗해집니다. 정결한 동네로 들어갈 자격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여기까지는 성서를 읽는 우리의 눈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페키지라는 소설가의 눈은 여기서부터 우리와 다릅니다. 에글라 라고 하는 여인은 자신의 문둥병이 &apos;다 나았다&apos;고 알았습니다. 그러나 정결한 동네의 사람들은 &apos;아직&apos;이라고 생각했습니다. &apos;아직&apos;은 &apos;곧 나을 것&apos;이라는 뜻입니다. 그때를 &apos;끝없이 지연&apos;시키는 생각이죠. 에글라는 다시 쫓겨납니다. 여전히 그녀는 부정한 여자였습니다. 한 번 부정한 것은 영원한 부정이었습니다. 그녀는 다시 부정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로 돌아왔습니다. 그녀가 마을에 당도하자 이번에는 부정한 동네의 사람들이 그녀를 배척합니다. 부정한 자신들이 이미 정결해진 그녀를 맞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apos;신성모독&apos;이었기 때문입니다. &lt;br /&gt;&lt;br /&gt;페키지는 여기서 &apos;기적의 시간&apos;과 &apos;일상의 시간&apos;을 대립시킵니다. 일상의 시간이란, 우리 속에 관성처럼 존재하는 축복과 저주라는 인식론의 두 마을입니다. 그러나 페키지는 진정한 기적이란, 바로 이와 같은 두 종류의 시간 대립을 하나로 묶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이른바 페키지는 &apos;기적의 시간&apos;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lt;br /&gt;&lt;br /&gt;우리가 말하고 경험하고 절대화하는 일상의 시간, 누구나가 시간시간 하는 이 시간은 인간 개개인의 경험과 의식과 인식을 절대화하고 정당화합니다. 그래서 서로 자기가 옳다고 우기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의 시간 속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고집불통 또는 완고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pos;어떤 이들은 벽을 문이라고 우긴다&apos;고 할 때 그는 이런 일상의 시간 속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그 속의 사람들도 지속적으로 변화하는데, 그것들 중 어느 것은 절대 변해서는 안 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편견들이 지배하는 사람, 또는 그런 시간을 사는 사람이 바로 패키지가 말하는 &apos;일상의 시간&apos;인 것이고, 대부분의 인간들이 그런 시간, 개나 돼지나, 자연이나 우주만물이 맞닥뜨리는 그런 시간에 사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그러나 모름지기 예수를 바로 믿는 사람들은, 제대로 깬 사람은 그 &apos;일상의 시간&apos;을 넘어서서 &apos;기적의 시간&apos;속에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완고한 일상의 시간이 무너지는 것이 우선 기적의 시간입니다. 아니 어쩌면 완고한 일상의 시간 속에 그리스도가 침투하여 그것을 유연하게 바꾸는 역할이 바로 &apos;기적&apos;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속에 차이는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차이에 따라 &apos;분리&apos;되기도 하고 &apos;격리&apos;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변화 될 때 격리는 분리로, 분리는 차이로 회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서가 말하고, 페키지라는 소설가가 말하고 싶은 &apos;기적&apos;이고 그 시간들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차별화된 일상을 이렇게 전복시키는 일이 바로 그리스도의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그러므로 기적의 시간 속에 살려면 일상의 시간이 개개인에게서 해체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일상의 시간에 정복당해 살고 있습니다. 세속적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이 일상을 해체하고 붕괴시켜 기적의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음에도 우리는 그 기적의 시간을 일상의 시간으로 돌려놓았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욕망이 일상의 시간과 공모함으로 하나님의 시간이 정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예수님은 &quot;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회개하라&quot;고 하십니다. 그것은 일상의 시간을 뒤집어&amp;nbsp;&amp;nbsp;엎고 기적의 시간 속에 살라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lt;br /&gt;&lt;!-- 내용이 끝나는 곳입니다.--&gt;&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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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그대 삶의 경계너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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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2-02-03T23:13:54+09:00</published>
      <updated>2012-02-03T23:33:35+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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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허태수 목사</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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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그대 삶의 경계너머&lt;br /&gt;막1:43-45&lt;br /&gt;2009.6.14 &lt;br /&gt;&lt;br /&gt;엊그제 우리교회 목사님 중에 두 분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모른 척 하고 처음에는 그냥 지나쳤는데도 여전히 수군수군 무슨 이야긴가를 계속 하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이 뭔지 개인적으로 궁금하기도 하고 교회의 구성원이니 의당 알아도 되겠다 싶어서 가까이 가면서 내가 말했습니다. &quot;무슨 이야기야?&quot; 그랬더니 아주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quot;아실 필요 없어요. 빠져 주세요.&quot; 그러면서 나를 향해 손을 휘적 내어 젓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대화 밖으로 나가라는 뜻이었습니다. 자기들의 대화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금을 그으면서 들어오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금안에 들어와 있는 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내어 쫓는 것이었습니다.&amp;nbsp;&amp;nbsp; &lt;br /&gt;&lt;br /&gt;자, 여러분은 이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lt;br /&gt;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의 갈릴리의 어느 지역에서 &apos;나병환자&apos;를 고쳐주면서 생긴 이야기들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먼저 사제에게 가서 깨끗해졌음을 증명받으라고 권합니다. 그런데 이 일이 널리 알려지고, 이로 인해 예수님은 더 이상 사람들이 사는 동네로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이상한 일이지요? 심각한 질병을 고쳐주고 이제는 자기 스스로 살 수 있게 해 주었는데 되레 사람들은 그 사건과 사건의 주인공인 환자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apos;우리에게 끼지 말고 나가라&apos;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당시대의 모습이 수수께끼의 본질입니다.&lt;br /&gt;&lt;br /&gt;우선 &apos;나병&apos;이 뭡니까?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의학적인 이름의 &apos;나병 또는 한센 병&apos;이 아닙니다. 추정컨대 신체에 혐오스럽게 돋거나 혹은 전염성이 강한 피부질환과 관련된 신체적인 증상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표현도 너무 현대 의학적인 표현일지 모릅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나병]은 현대의학과 같은 지식으로 판명된 명백한 질명이라기보다는 그저 사람들의 경험에서 검진되고 종교적인 원인으로 해석되는 것이었습니다. 병리적인 원인에 의한 판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무나 자기 경험이나 지식으로 지껄이는 말이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하는 그런 방식 중에 하나입니다. &lt;br /&gt;&lt;br /&gt;아무튼 고대 이스라엘의 나병은 최악의 질병으로 여겨졌던 게 분명합니다. 따라서 이 병은 죽음에 비견되는 저주의 징표와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병환자는 공동체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사람들과 마주쳐서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보기만 해도 다른 사람에게 그 천형을 오염시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병 환자는 사람들이 사는 곳은 커녕 인적이 많은 도로 근방을 얼씬거려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혹시 멀리 인기척이 들리면 나병환자는 자신이 부정 탄 사람인 것을 소리쳐 알려야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사람들의 생활공간의 외부로 쫓겨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니 삶의 공간인 세상에서 격리된, &apos;살았으나 이미 와버린 죽음을 안고 사는&apos;사람들이었습니다.&amp;nbsp;&amp;nbsp;&lt;br /&gt;&lt;br /&gt;그런데 그런 사람이 예수님에게 다가와 자신을 고쳐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예수님이셨으니까 망정이지 보통 사람이라면 경을 쳐도 단단히 칠 일이었습니다. 과연 메시야를 자처할 만한 대단한 자부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징벌한 사람-천형을 받은-을 거리낌 없이 마주할 수 있는 그 분, 그 사회의 건강 관리체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분, 그분은 도리어 그이를 측은히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경계하고 쫓아내기는커녕 측은하게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lt;br /&gt;&lt;br /&gt;나병을 고침 받은 사람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제가 요즘 유행이라는 신종인플레인자에 걸렸다면 여러분은 나를 어떻게 대하실까요? 그리고 보건당국에 의해 보균상황이 끝났다는 통보를 받았다면 그 다음에는 거리낌 없이 평소처럼 나를 대할까요? 추정컨대, 그 나병환자는 분명히 사람들에게서 추방되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나병환자들 사이에도 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를 만난 일로 인해, 병을 고친 이유 때문에 이쪽에도 낄 수 없고 저쪽에도 들 수 없는 중간지대의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성서는 나병이 걸리면 그를 격리시키고, 그가 나으면 사제의 검진을 받은 후 다시 사회에 복귀 하라(레14:2-32)로 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렇게 된 경우는 없었습니다.&lt;br /&gt;&lt;br /&gt;배제, 금 밖으로 내 쫓으면 그를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관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에 대한 보상과 처벌이 있고, 사람들이 이 장치의 판정과 습관적으로 동일한 가치판단을 갖게 되는 것을 &apos;제도화&apos;라고 합니다. 인간 개인도 이런 습성이 제도화 되면 항상 그 사람은 금 긋는 일을 합니다. 이건 되고 저건 안 되고, 이 사람은 되고 저 사람은 안 되고 그럽니다. 그래서 이런 인격을 가진 사람은 애초에 다른 사람을 섬기고 돕는 자리에 세우면 안 됩니다. 나병은 하나님의 저주이기 때문에 그를 사회로부터 격리시켜야 한다는 사회정치적인 형벌이 내려졌고, 사람들도 그런 사람을 불결의 상징으로 여겨 피하는 것, 심지어 질병에 걸린 그 자신조차도 이런 사고에 종속되어 자기 자신을 저주하는 것, 바로 이것이 제도화된 나병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lt;br /&gt;&lt;br /&gt;그런데 나병이 나았다고 합시다. 그리고 사제가 그를 정결하다고 검증했다고 합시다. 이것은 형벌의 해제를 의미하겠지요? 하지만 사람들의 습성은 그를 여전히 포위하고 있습니다. 그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만약 사람들의 관성이 그를 쉽게 해제할 수 있다면,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정치적인 제도는 있으나 마나 한 게 아닙니까? 우리가 교회에서 예수를 믿고 따르면서 이런 관성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믿으나 마나 아닙니까? 법이 있으나 마나 한 것이나, 믿음이 있으나 마나 한 것이나 같지요. 그것은 어떻든 위반인 것입니다. 차라리 나병에 걸린 것이 더 낫습니다. 이것은 나병이라는 육체적인 질병보다 더 나쁜 병입니다. &lt;br /&gt;&lt;br /&gt;만약 치유 받은 나병 환자의 운명이, 삶이 나병에서 신음하던 그때와 다르지 않다면 그를 측은하게 여기던 예수님이 분명히 실수를 한 것입니다. 차라리 그대로 두었으면 나병환자들 속에는 끼어서 살 게 아닙니까? 어쩌면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의로움을 너무 앞세워서 한 개인이 당할 더 참혹한 정황들을 무시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이런 행위의 결과는 예수님 자신에게도 난처한 상황을 가져다주고 말았습니다. &apos;보아서는 안 되는 불경한 이를 만나 치료까지 해 주었으니, 그 작자야 말로 악령의 힘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자일거야&apos;,&amp;nbsp;&amp;nbsp;&amp;nbsp;&amp;nbsp; 아마도 사람들은 이렇게 예수님을 기억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배제당한 사람을 복권시키는 일, 받아들이는 일, 격리의 해제를 선포 하는 일, 그것은 정말로 근본적인 자기 회개와 변혁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엄격한 의미에서의 믿음입니다. &lt;br /&gt;&lt;br /&gt;예수님의 패기어린 치료행위는 사람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배제주의적인 관성에 도전함으로, 예수의 문제 제기로 인해서 배제된 이들의 자활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는 체제의 가학성, 인간 개인의 독한 성질이 폭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분명해진 것은 나병 환자가 진짜 나았는지 어쨌는지가 아닙니다. 그를 대하는 나, 당신이 유죄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그렇게 독한 인간 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독한 사회적인 관성 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병보다는 그 병,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적극적으로 내 생각이나 삶이나 대화의 밖으로 밀어내려는 그게 더 나쁜 병이라는 것입니다. 나병보다 더 나쁜 병, 그걸 알라는 것입니다.&amp;nbsp;&amp;nbsp;&lt;br /&gt;&lt;br /&gt;그런 점에서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리 교회의 어떤 두 목사님이 대화중에 나를 밀어낸, 그와 같은 배제주의적인 관성에 도전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걸 뿌리 뽑으려고 십자가 밑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 관성을 위반하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걸 덮어두고 헤헤대고 살랑댄다면 그것은 점점 더 어두운 골목으로 자신의 영혼을 몰아넣는 것이 됩니다. 그는 결국 그렇게 &apos;잘 믿어서 망하게&apos;됩니다. 이걸 알라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아, 나를 대화 밖으로 밀어낸 두 분 목사님이 누구냐고요?&lt;br /&gt;진짜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라 설교를 열기 위해 만들어 낸 설정입니다. &lt;br /&gt;만약 그런 목사가 있다면 그는 못된 관성에 항거하지 않는 무능한 지도자인 것입니다. &lt;br /&gt;&lt;!-- 내용이 끝나는 곳입니다.--&gt;&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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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가족의 재구성 3</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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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2-02-03T23:13:54+09:00</published>
      <updated>2012-02-03T23:32:38+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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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가족의 재구성 [3] &lt;br /&gt;막 3:31-35&lt;br /&gt;2009.6.7 &lt;br /&gt;&lt;br /&gt;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를 찾아와서 바깥에 서서 사람을 들여보내서 예수를 불러내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예수는 즉시 맞이하러 나오기는커녕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고 하였다지요? 이 말만 보면, 예수는 밖에서 기다리는 부모와 가족을 자기와 상관없다고 부인하고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예수는 왜 그렇게 말한 것일까요?&lt;br /&gt;&lt;br /&gt;먼저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를 찾아왔으면 바로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사람을 시켜서 불러내려고 한 것이 좀 이상합니다. 이런 의문은 앞의 21절을 보면 어느 정도 풀리는데, 거기에는 예수의 가족이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를 붙잡으러 나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그들은 좋은 마음으로 예수를 지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예수가 위험하거나 불순한 운동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말리러 온 것입니다. 마치 대학교 가서 데모에 참여하는 아들을 찾아온 부모가 데모 현장에는 들어가지 않고 교문 밖에서 아들만 불러내서 데리고 가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하겠습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한다면, 예수가 “누가 내 어머니며 형제들이냐”고 말한 것은 다소 냉정하게 들리기는 해도, 가족을 부끄러워하거나 부인하는 말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보다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다음 구절들에서 좀 더 분명하게 나타납니다.&lt;br /&gt;&lt;br /&gt;“그리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34-35절, 표준새번역).&lt;br /&gt;&lt;br /&gt;이 구절을 개역성경에서는 좀 달리 번역하였습니다.&lt;br /&gt;&lt;br /&gt;“둘러앉은 자들을 둘러 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34-35절, 개역).&lt;br /&gt;&lt;br /&gt;두 개의 번역을 비교해 보면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개역을 보면, 마치 둘러앉은 사람들은 그저 청중들일 뿐이고, 예수는 그들에게 이러저러한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 자기의 모친이요 동생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표준새번역을 보면, 예수는 둘러앉은 사람들을 가리켜서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자매들이다” 하고 선언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개역보다 표준새번역이 훨씬 더 정확한 번역입니다. 예수는 막연한 대상이 아니라 바로 거기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자신의 가족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lt;br /&gt;&lt;br /&gt;예수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헬라어 단어는 흔히 ‘무리’로 번역이 되는 오클로스(ochlos)입니다. 그들은 가난하거나 굶주린 사람들이며 일정한 거처나 직업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가 그들을 자신의 가족과 동일시한 것은, 혈연을 넘어설 뿐 아니라, 권위 중심, 재산 중심이던 당시의 가부장적 가족 구조를 단숨에 깨뜨려버리는 매우 파격적인 선언입니다.&lt;br /&gt;&lt;br /&gt;이것이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는 마태 기자가 이 구절을 변경시킨 데서 알 수 있어요. 마태 기자는 예수가 이 선언을 무리를 가리켜서 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가리켜서 한 것처럼 고쳤습니다. 그것으로도 안심이 안 되었는지 예수가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그 말을 했다고 하였습니다(12:49). 누가 기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보시며”라는 구절을 아예 삭제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예수가 무리를 가족과 동일시 했다는 논란 자체가 일어날 수 없게 하였습니다(8:21). 물론, 이처럼 파격적인 요소를 그대로 담고 있는 마가의 본문이 가장 역사의 예수에게 가까운 것입니다.&lt;br /&gt;&lt;br /&gt;학자들은 맨 끝에 나오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는 구절(35절)과 그 앞에 나오는 전체 이야기(31-34절) 사이의 관계에 대해 논란을 벌였지요. 요약하자면, 말씀을 중시하는 불트만 같은 학자는 끝 구절만이 예수의 말씀이고 앞의 이야기는 그 말씀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후대 사람들이 지어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를 따른다면, 어떤 조건을 제시하는 것 같은 끝 구절만 중요하고 무리들을 자신의 가족과 동일시한 파격적인 내용은 지어낸 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보다 일을 중시하는 디벨리우스 같은 학자는 앞의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난 일을 묘사하는, 중요한 것이고 끝 구절은 그것을 설명하거나 정리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디벨리우스를 따르면, 예수의 파격적인 선언과 실천이 중요한 것이고, 끝 구절은 부연 설명에 불과한 것입니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끝 구절(35절)은 ‘가르’(gar=왜냐하면)라는 접속사로 시작한다. 이는 그것이 앞에 나온 선언의 이유를 설명하는 맥락에서 나온 것임을 의미하며, 이런 점에서 디벨리우스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하겠습니다.&lt;br /&gt;&lt;br /&gt;그렇다면 위의 구절들이 의미하는 바는 이제 어느 정도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찾아온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정하는 냉정한 말도, 어떤 조건을 갖춘 막연한 대상을 가정하여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자신의 가족과 동일시하는 말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목자 없는 양 같이 떠도는 무리들을 자신의 가족과 동일시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의미의 가족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흔히 세상 사람들은 자기 부모라도 초라한 모습이면 모른 척하려고 하는데, 예수는 자기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초라한 무리들을 자신의 가족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죠. 바로 여기에서 새로운 가족이 탄생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다움입니다.&lt;br /&gt;&lt;br /&gt;당시의 로마법에서 가부장의 권위는 매우 강화되었다고 합니다. 로마 사회에서 家長은 흔히 세 가지 권위를 가졌습니다. 첫째는 자녀와 손자들 그리고 종들에 대한 권위요, 둘째는 그의 재산에 대한 권위요, 셋째는 그의 부인과 며느리들에 대한 권위입니다. 그들은 철저히 가부장적 구조 속에 있었고 그 정점에는 황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넓은 의미에서는 황제를 “주인”(kyrios) 즉 家長으로 모시는 “황제의 가족들”이었습니다. 가장은 생물학적 아버지를 의미하기보다는 가족의 권위자를 의미했습니다. 가족은 친족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존과 종속의 관계에 의해 규정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이미 그들도 혈연을 넘어선 가족을 생각한 셈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혈연을 넘어서는 사랑의 가족이 아니라 혈연을 넘어서까지 종속되는 더욱 철저한 가부장제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이런 종속적 가부장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족을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것은 사회에서 소외되고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부모로 받아들이고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는 전혀 새로운 의미의 가족입니다.&lt;br /&gt;&lt;br /&gt;바울은 예수의 이런 새로운 가족을 그대로 계승하여 새로운 가부장주의로 발전시켰습니다. 아마도 그는 초대교회가 현실적으로 당시의 가부장제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초대교회가 일반적 가부장주의에 머물지 않고 예수의 파격적 가족의 의미를 살리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황제를 가장으로 하는 “황제의 가족”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는 “하나님의 가족”을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함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갈 4:6). 이런 관계는 바울과 교회 사이에서도 적용이 됩니다. 바울은 신도들에게 “내가 여러분을 낳았다”고 하며,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이” 그들을 대한다고 말합니다(고전 4:15; 살전 2:11). 오네시모나 동역자 디모데를 자기의 아들이라고 말하며, 또 동역자의 어머니를 자신의 어머니도 된다고 말합니다(몬 10; 빌 2:22; 롬 16:13).&lt;br /&gt;&lt;br /&gt;바울은 가부장제라는 틀은 유지하면서도 다만 家長을 황제 대신 하나님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트뢸취라는 학자는 이것을 “사랑의 가부장주의”라고 부릅니다. 예수가 선포한 가족의 파격성은 가부장제라는 틀 속으로 들어와서 다소 완화되긴 했지만 그래도 그 핵심은 살아 있다 하겠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에게 바울의 교회는 하나의 모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근원적인 모델은 역시 예수의 파격적인 사랑의 가족이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사랑의 가족을 늘 새로운 상황에서 이룩해가는 모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가족을 새로 맞아들이는 것이 [전도]이고, 그런 가족들이 모여 사는 집이 [교회]입니다.&lt;br /&gt;&lt;br /&gt;오늘날 교회들도 가부장주의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성직자들은 대부분 권위 있는 아버지 상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바울의 사랑의 가부장주의나, 예수의 파격적 사랑의 가족을 계승하고 있는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바울의 교회나 예수의 공동체는 대개 20-30명을 단위로 하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신도들의 가정에서 모였기 때문에(고전 16:19; 롬 16:5) 평균 30명 정도 모였으며, 아무리 커도 100명이 넘지 않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오늘날 대형교회들은 수퍼마켓형, 할인매장형으로 변모해가면서 교인수가 보통 수천, 수만, 수십만 명이 된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초대교회나 예수의 사랑의 가족 속에서 느낀 것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이런 큰 교회에서는 한 주간 동안 경쟁사회에서 지친 심신을 위로받고 새로워지기는커녕, 다시 주일날도 주차 전쟁, 본당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을 해야 할 것입니다. 나중에는 천국 가는 것도 경쟁으로 들어간다는 생각을 갖게 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서울의 큰 교회들에서는 적어도 예배 시작하기 1시간 전에 가야 주차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인근의 학교 운동장들을 주차장으로 쓰는데도 그렇다고 합니다. 몇 번이나 교회 주변을 돌다가 자리가 없어서 불법주차를 하기가 일쑤이고 예배드리는 내내 딱지를 뗄까봐 정신이 없다고 합니다. 본당에서 예배를 드리려면 적어도 예배 시작 30분 전에는 도착해야지 정시에 가면 대개 비디오실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고요. 조금이라도 늦게 가면 그나마 비디오실도 자리가 없어서 다음 예배 시간에 오라고 한다지요? 사정이 그러다보니 예배를 한번만 하는 게 아니라 새벽집회와 저녁예배를 빼고도 보통 주일예배만도 7회 가까이 하므로 언제라도 가서 예배드릴 수 있도록 배려를 하고 있습니다. 일곱 번을 하면 혹 설교를 여러 분이 나누어서 맡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대개가 부목사들은 사회만 보고 담임목사가 일곱 번의 설교를 다 맡고 있습니다. 일곱 번을 다하는 교회도 있지만 어떤 교회는 그 가운데 절반 정도는 녹화된 테이프를 틀어주면서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을까요?&amp;nbsp;&amp;nbsp;어떻게 여기서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가 있을까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여기서는, 기업총수를 가장으로 하여 충성을 다하는 사원들과 같은 그런 기업형 가부장주의는 몰라도 예수의 사랑의 가족은 찾을 수 없습니다. &lt;br /&gt;&lt;br /&gt;우리가 따뜻함이나 고마움, 행복함을 느끼는 것은 언제인가요? 가족이 아닌 사람이 가족처럼 대해줄 때가 아닙니까? 우리가 “내 가족만!” 하는 가족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서, 나와 아무 상관없는 내 주위의 사람들을 형제자매로 대하고 내 부모 같이 대하고, 내 자식 같이 대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의 사랑의 가족을 이룰 수 있습니다. &lt;br /&gt;&lt;br /&gt;교회는 그것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lt;br /&gt;바로 그 사랑을 느끼고 경험하며, 연습하고 훈련하는 곳이 교회입니다.&lt;br /&gt;&lt;!-- 내용이 끝나는 곳입니다.--&gt;&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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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자녀들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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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2-02-03T23:13:54+09:00</published>
      <updated>2012-02-03T23:31:37+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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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허태수 목사</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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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가족의 재구성 [2]&lt;br /&gt;-자녀들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 &lt;br /&gt;막 7:24-30&lt;br /&gt;&lt;br /&gt;성서는 아이들이 귀신들에 사로잡힌 것으로 묘사하는 곳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도 악한 영에 사로잡혔다고 합니다. 마가복음 9장에도 간질병에 걸린 것으로 보이는 아이가 나오는데 역시 악한 영에게 잡혔다고 합니다. 그 귀신은“벙어리, 귀머거리 귀신”으로 불리기도 합니다(막 9:25). 요즘으로 말하면 병을 앓고 있거나 장애가 있는 아이가 되겠죠. &lt;br /&gt;&lt;br /&gt;집에 이런 아이가 있으면 온 가족이 고통을 받습니다. 제 밑에 여동생도 지체장애를 가진 딸이 있는데 모든 식구들이 거기 매달려 삽니다. &lt;br /&gt;&lt;br /&gt;요즘은 ‘옛날 귀신’에 들린 사람은 보기 힘듭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 맞는 귀신에 들린 자녀들은 너무 많습니다. 대학입시가 끝나면 성적을 비관해서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시험 발표를 보고 집단으로 죽은 아이들도 있습니다. 요즘 통계를 보면 40대 이상은 제1사망 원인은 질병입니다. 30대는 교통사고라고 합니다. 그런데 20대는 놀랍게도 제1사망 원인이 자살이 아닙니까? 원인이야 여러 가지이겠지만 크게 보면 가정불화, 빈부격차로 인한 절망감, 따돌림 등 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 원인일 것입니다. &lt;br /&gt;&lt;br /&gt;60년대는 가난을 이기기 위해 몸부림해 왔습니다. 지금 어느 정도 잘 살게 되니까 이제는 빈부격차가 문제입니다. 자녀들도 건강하지 않습니다. 가끔 학생들의 학교생활을 듣습니다.&amp;nbsp;&amp;nbsp;들을 때마다 놀랍니다. 예전 내 경험으로는 모두들 열심히 공부하겠거니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한글을 모르는 아이들도 있고, 고등학생이 음악시험을 애국가 가사 적는 것으로 대신 하기도 한답니다. 절반 이상이 공부를 포기한 상태고 선생님이 뭘 가르치든 관심 없이 잠을 잔다고 합니다. 그 원인은 대개 빈부격차에서 오는 것이 많습니다. 가난한 집 출신들은 자신들이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찍 자포자기하는 수가 많습니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오늘날의 의미에서 우리 자녀들을 사로잡는 악한 영이 아니겠어요?&amp;nbsp;&amp;nbsp;&lt;br /&gt;&lt;br /&gt;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리고, 자기 딸을 구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뜻밖에도 &quot;아이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아이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quot;(27절)고 하십니다. 그 여인은, &quot;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아이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quot;(28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lt;br /&gt;&lt;br /&gt;이 대답은, &lt;br /&gt;1) 예수님이 완전히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자녀들이 “먼저”라고 하신 데서 희망을 걸고, “먼저”가 아니어도 좋으니 “나중”이라도, 상아래 부스러기라도 먹게 해 달라고 적극적으로 말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lt;br /&gt;2) 겉으로는 예수님이 저렇게 말씀하셔도, 속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확신을 가지고, 문제는 예수님의 태도가 아니라, 자기 딸을 살려야 하니까, 모든 것을 불문에 붙이고 적극적으로 매달린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lt;br /&gt;&lt;br /&gt;후자가 현실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은‘예, 저는 강아지처럼 하잘 것 없는 여인입니다. 저는 개가 되어도 좋습니다. 그것으로 내 아이가 낫는다면! 말입니다’라는 말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lt;br /&gt;&lt;br /&gt;이것이 어머니의 심정입니다. 자기 자식을 고칠 수 있다면, 설사 자기가 개가 되는 수모를 당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어머니의 심정이 모든 걸 해결했던 것일까요?&amp;nbsp;&amp;nbsp;우리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귀신이 나간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이 어머니의 행동을 놓치는 수가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quot;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quot;(29절)고 하셨습니다. 이 어머니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칭찬하고 격려하신 것입니다. &lt;br /&gt;&lt;br /&gt;기적에는 재료가 필요합니다. 엘리야가 사르밧의 과부에게서 기적을 일으키기 전에 그 과부는 자기의 마지막 양식을 가져와서 엘리야를 대접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 어린아이가 가진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덩어리가 재료가 되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그러한 마음이 기적의 재료가 되고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마음]이란 뭘까요? 포기하지 않는 질긴 마음일까요? 오늘날도 어머니들이 그런 질긴 마음을 붙들고 있으면 죽어나자빠지는 아이들을 살릴 수 있을까요? &lt;br /&gt;&lt;br /&gt;마태복음에서는 이런 격려의 말씀이 조금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quot;여자야,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될 것이다.&quot;(마 15:28) 우리는 생각하기를, ‘여인이 포기하지 않은 것’이“믿음”이라고 칭찬하신 것이라고 여깁니다. 개가 되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딸을 구하기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을 높이 삽니다. 그러면 오늘날도 어머니들이 이처럼 하기만 하면 된단 말인 가요? &lt;br /&gt;&lt;br /&gt;요즘 우리나라도 청년 실업이 심각한 문제가 되고 빈곤층이 천 만이 된다고 합니다. 시골에는 노인들만 사는 가정이 많은데 대개 손자들을 키웁니다. 젊은 부모들이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이혼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녀들을 노부모에게 맡긴다는 것입니다. 어느 가정이나 집집마다 대개 한 사람 이상 실업자가 있습니다. 온갖 중독에 빠진 사람들도 많습니다. 과거에는 그저 술 담배, 투전 이런 것들이 중독의 재료였지만 요즘 아이들은 전혀 다른 중독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사회와 자녀들은 이런 악한 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경우에도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개가 되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기만 하면, 그런 자세로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해결이 될까요? &lt;br /&gt;&lt;br /&gt;아무리 믿음 좋고 포기할 줄 모르는 수로보니게 여인도 예수께서 그에게 다가오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그 이전에는 달리 어떤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당시로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는 그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에게 다가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단지 병 잘 고치는 능력 있는 사람이 그녀 앞으로 왔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그녀로 하여금 세상과는 다른 희망, 다른 관점, 다른 방식, 다른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까? 여인에게 예수님은 세상과 다른 길이었습니다. 이것이 기적의 본질입니다. 그저 예수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온갖 수치를 무릎쓰고 가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예수를 통해 다른 길을 보게 될 때 그때부터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인 것인지 그의 절절한 어머니로서의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개 어쩌고 ...]하는]문장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amp;nbsp;&amp;nbsp;&lt;br /&gt;&lt;br /&gt;예수는 이런 분입니다. 절망하고 자포자기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셔서 말을 거십니다. 수가성 우물가 여인에게“물 좀 달라”고 말을 거셔서 그 여인으로 하여금 새 길을 보게 하십니다. 그것이 그녀의 기쁨이었고 그 샘은 마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는 곳마다 그들이 문제를 갖고 나오게 만들고, 예수를 만난 다음에는 그 문제를 과거와 달리 보고 해석하는 눈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앞에만 오면 주눅 들었던 사람들도 똑똑해졌던 것입니다. 이것이 여자들의 기를 살리고, 일자무식에다가 구걸하던 눈먼 사람이 유창하게 된 이유입니다.&amp;nbsp;&amp;nbsp;&lt;br /&gt;&lt;br /&gt;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가정의 중요성을 말하고 자녀들을 위한 이런 저런 해결책들을 내놓습니다. 이제 와서 삼강오륜 가르치고 갓 쓰고 서당 체험을 하는 데도 있지요. 하지만 이미 오래 전에 수명을 다한 낡은 가치가 잠시 옛 것의 흉내를 낸다고 회복이 되겠으며, 가면 얼마나 가겠습니까? 낡은 가치나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가치와 방법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이 시대와는 다른 삶의 방식과 길을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이 시대에 조롱당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에게 달리 사는 법을 가르치면 세상 사람들은 그를 개처럼 여길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걸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amp;nbsp;&amp;nbsp;&amp;nbsp;&amp;nbsp;&lt;br /&gt;&lt;br /&gt;그러면 이 사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lt;br /&gt;대개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적 가치관을 따라갈 수밖에 없고, 가정도 그 틀 안에서 변화하면서 새 길을 모색하게 될 것입니다. 그 틀은 우리가 익숙한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취직하고 돈을 벌고 마음에 드는 사람과 결혼하여 집을 사고 차를 사고…… 이 사회가 제공하는 것을 누리면서 부모에게 (물질적으로) 효도하고 형제자매에게 우애 있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회는 그런 도식을 선전하기는 하지만,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함정이나 악마적인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TV를 켜면 그렇게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성공적인 가정이 늘 나오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물질이 충족이 되지 않으니까 자꾸 자녀들이 좌절하고, 부모를 원망하고, 가정이 깨지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자본주의적 가치는 사람들에게 꿈을 주는 데는 성공을 했지만, 꿈을 이룰 수 없는 사람들이 느끼는 좌절감에 대해서는 각자 알아서 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학생들이 대학교 가면 사회과학을 배우면서 배신감을 느끼고 또는 좌절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요즘은 논술이 발달되어서 고등학교 다니는 아이들도 플라톤을 읽고 박노자를 읽으면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도 비판하고 국수주의도 비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놀랍고 기특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대학에 가서 배웠고 그것도 정규 수업이 아니라 이른바 스터디로 배웠습니다. 그것은 비판적 사고를 키워주었지만, 우리는 그것으로 행복해지지는 않았습니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내 속에서는 돈을 벌고 싶고 부유해지고 싶은 욕망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고상한 가치를 주장하고 숭고한 학문의 경지를 말하는 학자, 성직자들도 결국은 좋은 집에서 좋은 차를 몰면서 사는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것을 보면서, 그 고상한 가치라는 것이 자본주의적 가치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가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lt;br /&gt;&lt;br /&gt;결국 전통적 유교 가정이 깨어진 다음에 그것을 대신한 것은 성공을 지향하는 자본주의의 물질주의적 가정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늘 부작용이 많아서 늘 자녀들과 배우자들을 악한 영에게 내어주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 모두를 물질의 풍요 속에 안주하도록 유혹하기도 합니다. 이런 세상 가운데서 우리가 이룩한다고 하는 이른바 자녀교육은&amp;nbsp;&amp;nbsp;마치 높은 두 빌딩 사이를 가로지른 쇠 파이프에 그네를 매단 것과도 같습니다. 언제라도 물질적 풍족이 깨지면 좌절하고 무너지게 된다는 뜻에서 그렇습니다. &lt;br /&gt;&lt;br /&gt;이미 물질의 풍족과 개인의 자유라는 자본주의적 가치를 맛본 사람들에게, 이제 너는 자식이니까 순종해라, 며느리니까 시부모 말씀을 들어라, 동생이니까 형님 말 들어라, 이런 전통, 유교 가치가 통할 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부모라도 돈을 주지 않으면 자식이 불순종하고, 아무리 부부 사이라도 돈이 없으면 불화하게 됩니다. 가정을 유지시키는 것이 돈의 힘이 아닙니까? 그런데 기껏 이 사회가 제시하는 해결책이 효 교육이니 서당체험이니, 군대 보내야 사람 된다느니, 교회에 열심히 나오라니 하는 것들이니 시대착오적이 아닙니까?&amp;nbsp;&amp;nbsp;&lt;br /&gt;&lt;br /&gt;물질주의적 가치관과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악마적인 것들의 공격으로부터 자녀와 우리 자신을 지키는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예수께로 나아가 새로운 방향성을 획득하듯이, 오늘도 이 시대를 거스르는 길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에게 바로 그 [길], 세상의 귀신에 끌려 살지 않고 똑바로 사는 법이 있는 것입니다.&amp;nbsp;&amp;nbsp;&lt;br /&gt;&lt;br /&gt;오늘날 산업화되면서 전통적인 가정 공동체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전의 대가족제도나 씨족사회가 갖고 있던 공동체 정신이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우리는 이미 그곳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핵가족 외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 또는 교회가 새로운 가능성이라고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습니다. 이제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으로 하는 새로운 가족, 형제자매들이 우리의 전통 공동체를 회복할 뿐 아니라 갈릴리의 밥상공동체를 회복해야 합니다. 개개인의 가정에서는 가질 수 없는 비전을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으로 가질 수 있고,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서로 위해 기도하고 일으켜주고 안아주고 사랑하는 가운데, 이전에 느끼지 못한 행복을 여기에서 맛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본주의 물질주의의 악령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신 [참된 인생의 길]에 있음을 믿고 자신을 버려야 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나는 없는 존재’처럼 취급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게 길인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amp;nbsp;&amp;nbsp;&lt;br /&gt;&lt;br /&gt;오늘날 중고등학생들이 너무나 바쁘니까 믿는 부모들까지도 잠시 교회는 쉬고 일단 대학부터 가라고 조언합니다. 좋은 대학만 가면 배우자가 줄을 서지만, 교회 열심히 나가다가 대학 떨어지면 아무도 안 돌아본다는, 아주 현실적인 코멘트까지 덧붙입니다. 하지만 이런 부모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이들입니다. 그렇게 자식을 기르면 지식과 재산은 있어도 영감과 비전은 없는 조무래기밖에 되지 않습니다. 학원에서 자란 사람과 공동체 속에서 자란 인물이 같을 수 없습니다. 자식에게 재산을 많이 물려주면 그것이 그를 무능하게 할 수도 있고, 재산 때문에 부모를 원망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신앙을 물려주면 자식들은 위대하게 되고 부모께도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가 자녀에게 돈을 물려줄 수도 있고, 집을 물려줄 수도 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수를 믿는 믿음, 즉 인생의 길이 예수에게 있음을 똑바로 알려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천금 같은 것입니다.&lt;br /&gt;&lt;br /&gt;다른 길을 보여 줘야 합니다. &lt;br /&gt;달리 사는 법을 알려 줘야 합니다.&lt;br /&gt;세상이 개처럼 여긴다고 해도 예수님의 그 길,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삶의 길을 가게 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귀신들린 세상에서 자녀들을 보호하는 길입니다. 그게 수로보니게 여인의 처신이었습니다. &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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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가족의 재구성 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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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2-02-03T23:13:54+09:00</published>
      <updated>2012-02-03T23:30:23+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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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가족의 재 구성 1&lt;br /&gt;마10:34-42 &lt;br /&gt;2009.5.17 &lt;br /&gt;&lt;br /&gt;땅거미 지고 하루가 저물 때면 사람들은 &apos;어디 가냐&apos;고 묻는 말에 대부분 &apos;집에 간다&apos;고 말합니다. 여기 집은 눈비를 피하고 함께 기거하는 공간 곧 house를 말하지만 그건 우리에게 함께 삶을 영위하는 공간, 곧 가정인 family를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apos;집에 간다&apos;고 할 때 거기에는 &apos;우리&apos;라는 한정사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집엘 가되 바로 &apos;우리 집&apos;에 가는 겁니다. 천지에 수많은 집들이 널려 있지만 내가 가는 집은 &apos;내&apos; 집 또는 &apos;우리&apos; 집입니다.&lt;br /&gt;&lt;br /&gt;여기에 숨어있는 매우 중요한 사실은 가정이란 그 가정의 구성원들에게는 무한히 따뜻하고 편한 곳이지만 이방인에게는 낯설고 불편한 곳이라는 겁니다. 즉 가정은 우리를 용납하는 자리이지 우리 아닌 타인에게 열려있는 자리는 아닌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가정의 두 얼굴이 있고 양면성이 있습니다. 가정은 가장 헌신적인 사랑이 있는 곳이면서 동시에 가장 배타적인 사랑이 형성되는 곳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apos;우리&apos; 라는 울타리가 둘러쳐진 곳이 바로 가정입니다.&lt;br /&gt;&lt;br /&gt;그건 아마 가정이 지닌 어쩔 수 없는 태생적 한계일 것입니다. 안식의 공간으로서의 가정은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태생적 한계를 인지하고 사느냐 않느냐에 따라 삶이 크게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속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줍니다. 자기 몸속에 알을 낳아 키워 새끼들이 자라면 자기는 껍질만 남아 논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논고둥처럼 자식들이 커갈수록 부모들은 초라하게 껍질만 남습니다. 누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부모들이 그걸 기꺼이 자원하고 자초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건 그 자녀들은 바로 &apos;내&apos;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apos;내&apos; 자녀이기에 그렇게 하는 겁니다. 부모의 헌신은 자기 자녀에게 국한됩니다. 자기 자식을 위해서는 못할 게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집 아이를 위해서는 어떻습니까?&lt;br /&gt;&lt;br /&gt;얘기가 180도 달라집니다. 다른 집 자녀들은 다 내 자녀의 경쟁자들입니다. 경계의 대상입니다. 부모들이 그렇게 사니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경쟁적이 되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인격을 키워가게 됩니다. 나라고 하는 울타리, 우리라고 하는 울타리가 그렇게 만들어져서 지연, 학연이라는 암덩어리들로 변종되어 배양되어 나가는 겁니다. 그 시작이 바로 그 사랑이라는 말입니다.&lt;br /&gt;&lt;br /&gt;이렇게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녀, 내 부모에게 집중되는 곳, 그래서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의 현장으로 전락될 위험을 안고 있는 곳이 바로 가정이고 집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플라톤은 그의 국가론에서 &apos;가족 해체론&apos;을 내세웠습니다. 혈통의 소속을 따라 제 자식을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양육하는 자연적 가족 개념을 배격했습니다. 그런 배타적 성격의 가족은 이상국가 공동체의 분열을 초래하는 파편적 요소라고 본 것입니다. 혈연은 사회구성의 기본요소를 이루며 수많은 다른 연들 그러니까 지연, 학연 등의 존립과 연대를 가능케 하는 일차원적 인간관계의 아성을 구축해왔습니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에게 그것은 끈끈한 인정과 사사로운 의리에 사람들을 묶어둠으로써 끼리끼리의 담합은 촉진했지만 그것이 한 사회의 공공이념을 도출해 내고 보편적 가치를 배양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부작용과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면이 없지 않다는 걸 우리는 압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병폐의 상당 부분이 여기서 비롯된 것 아닙니까? 줄과 빽, 출신 배경에 따라 시시비비가 얼마나 엇갈려 왔습니다. 이렇게 모든 세태의 저변에 가족이라는 이 유산이 한편으로는 유익의 자리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폐단의 자리로 도사리고 있는 겁니다.&lt;br /&gt;&lt;br /&gt;그럼 예수님은 가정을 어떻게 보았을까요? 그분께 가족은 보존과 극복의 양극적 대상이었습니다. 그분의 삶도 가정을 통한 삶이었습니다. 유다 지파 다윗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아 세상에 태어났고 그 가정의 울타리 속에서 부모의 사랑과 형제들과의 나눔을 통해 어른으로 성장해 갔습니다. 혼인을 존중하셨고 가족의 신성함을 인정하셨으며 사람이 장성하면 부모를 떠나 가정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며 이혼에 대해선 부정적일 만큼 가정의 소중함을 인정하셨습니다.&lt;br /&gt;&lt;br /&gt;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가정관의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한편으론 가정을 꾸리는 일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부합하는 복된 일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상당히 가정에 대해 비우호적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주님은 반가정적인 발언을 서슴치 않으셨습니다. &lt;br /&gt;&quot;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quot; &lt;br /&gt;&lt;br /&gt;이건 가정 파괴적인 발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lt;br /&gt;어디 그뿐입니까? 주님은 당신이 제자로 부른 한 사람이 부모님 장례를 치르고 따르겠다는 간절한 바람을 한마디로 잘라버리십니다. 자식의 마지막 도리를 막은 겁니다. 가족끼리의 불화를 조성하고 죽은 부모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마저도 거부한 주님의 가정을 향한 의도와 전망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요? 당신이 오신 목적이 가정에 평화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검을 주어 가족 간에 싸움을 붙이러 왔다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가정을 부인하신 겁니까? 인간 역사와 더불어 오랜 유산인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풍비박산 내시겠다는 것입니까?&lt;br /&gt;&lt;br /&gt;그러나 주님은 가정의 소중함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습니다. 가정은 가장 중요한 하부기본구조입니다. 그것의 해체가 매우 위험한 것이고 불가능한 것임을 주님이 왜 모르시겠습니까?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 인정의 덫일 뿐이었습니다. 육신 공동체, 혈연 공동체로서의 가정은 거듭나야할 중생이 필요한 자리라고 본 것입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가정은 어미의 자궁에서 태어나는 일차적 탄생을 지나 &apos;하나님의 나라&apos;라는 또 다른 관문에 들어섬으로써 거듭나는 이차적 탄생으로 나갈 때에만 적절한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혈통적 차원에서의 가정은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 장애가 되는 것임을 주님은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apos;누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냐&apos;는 주님의 물음 속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lt;br /&gt;주님은 가정이 태반과 자궁에 기초한 가족의 일차원적 성격에 머물 때 그 가정을 올바른 가정으로 보질 않았습니다. 성이 같고 피가 같은 자들의 사랑 놀음을 대견하게 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건 짐승들도 하는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pos;당신 어머니와 형제가 찾아왔다&apos;는 말에 &apos;누가 내 형제며 자매며 어머니냐&apos;고 반문하시면서 &apos;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자가 바로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apos;이라고 대답하셨던 겁니다. 사람들에게 혈통상의 가족 개념을 혁파하는 충격적 일갈로 들렸던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은 가족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입니다.&lt;br /&gt;&lt;br /&gt;주님은 낳아주고 기른 정만으로 진정한 의미의 어미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같은 태반과 자궁에서 잉태되고 출산되어 한 어미의 젖을 먹었다고 그것이 형제의 전부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재 정의한 가족의 기준은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를 가장으로 하는 모든 사람들의 가족화, 형제화가 그분이 추구하는 새로운 가족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apos;그를 밴 태와 그를 먹인 젖이 복이 있는&apos; 게 아니라 &apos;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기 초월적 결단과 구체적인 실천이 있는 자가 오히려 복이 있다&apos;고 하십니다. 가족이라는 제도적 틀 속에 매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보지 못하는 자는 살아 있는 것 같지만 &apos;죽은 자&apos;라고 말씀하십니다.&lt;br /&gt;&lt;br /&gt;주님은 이렇게 기존 개념의 가족을 해체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자폐적 성채와 배타적 울타리로 기능하는 수많은 가족의 경계에 대해 도전하셨습니다. 혈통적 가족 제도가 그 일차원적 연대의 울타리 안에 머문 채 공공의 가치를 창출하지 못할 경우 야만스런 짐승의 수준으로 퇴락할 위험을 주님을 그 가정이라는 틀 속에서 보고 계셨던 겁니다. 그래서 참사랑을 실천하려는 이들은 가정을 꾸리지 않거나 가정을 떠났습니다. 불가의 승려들이 그렇고 천주교의 사제들이 그렇습니다. 한국교회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을 위한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어떤 이들은 혼자 살았고 어떤 이들은 해혼하기도 했습니다. 결혼이란 혼인을 묶는다는 뜻이고 해혼이란 결혼을 푼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정을 이기심의 근원이라고 보았고 적어도 도를 닦는 데 있어 걸림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lt;br /&gt;&lt;br /&gt;가정에 바로 이런 측면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 수입되어 개봉되면서 많은 논란을 낳았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apos;그리스도 최후의 유혹&apos;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픽션이긴 합니다만, 거기 보면 주님께서 받은 최후의 유혹은 막달라 마리아와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자녀들을 키우며 꿈같은 일상에 빠져드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혼절한 채 이 강렬한 유혹에 둘러싸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광야에서 온갖 종류의 유혹을 다 떨쳐낸 주님이셨지만 이 마지막 유혹에 흔들리는 모습을 그립니다. 사명자에게 가정이 어떤 곳인지를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이 서른에 출가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lt;br /&gt;&lt;br /&gt;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오늘 나에게 있어 가정은 어떤 존재입니까? 가정이 필요하지만 가정에 묶이지 않아야 하는 이 딜레마는 핵가족화 되어가는 현실 속에서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가정이 가진 폐쇄적이고 이기적인 측면들이 가동되지 않도록 경계하며 살아야 합니다. 가정이 열린 가정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lt;br /&gt;주님께서 &apos;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apos;라는 새 가정의 강령을 선언하신 후 이스라엘 속에 하나의 깊은 틈이 갈라지면서 가정들이 쪼개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반목과 대립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단순한 폭력과 불효를 말하는 게 아니라 재래의 가족구조가 지양되고 상대화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기존의 경계선을 깨뜨리고 진정한 공동체를 지향하는 개방된 새가정의 구조가 모범적으로 드러나는 하나의 창조적 과정이 일어납니다. 그게 바로 초대교회입니다.&lt;br /&gt;&lt;br /&gt;초대교회 교인들은 한마디로 가정을 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quot;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quot; 저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 자기 가정을 오픈하고서 성도들을 초대하고 영접하면서 진정한 형제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들의 집은 공동체 생활의 구심점이 되었고 주님의 제자들과 교회를 지원하는 받침점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가정은 &apos;하나님 나라&apos;의 새로운 길을 위해 떠나야 할 극복의 대상인 동시에 그 떠남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 지속되어야 할 현실의 토대였던 것입니다. &lt;br /&gt;&lt;br /&gt;그러므로 주님이 추구한 가정은 전통적 가족의 파격적 해체나 폐기, 곧 다 헐고 다시 짓는 게 아니라 리모델링, 재구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가족의 전통적 가치를 깡그리 부인하지 않으면서 가족과의 인연을 자유롭게 통제할 수 있는 내성을 갖게 하셨는데 그것은 혈통상의 가족 굴레를 넘어서 하나님 아버지를 정점으로 하는 가부장적 위계를 지녔으면서도 아버지의 일방적인 굴림과 통제가 아니라 대화와 소통의 관계로 이루어진 열린 가족이었던 것입니다. &lt;br /&gt;&lt;br /&gt;여러분은 어떤 가정을 꿈꾸고 있습니까?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식, 내 부모의 가정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의 가정입니까? 가정을 여시기 바랍니다. 가정을 여는 것은 그리스도인 된 우리가 해도 되고 안 해도 괜찮은 그런 것이 아니라 꼭 해야만 하는 신앙적 과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apos;영접&apos;이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하십니까? &apos;냉수 한 그릇의 영접이라도 상을 잃지 않는다&apos;는 말씀은 영접이 있는 열린 가정을 꾸리는 일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연적인 것인가를 강조하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믿음안에서 이뤄야 할 [가족의 재구성]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더딘 것은 아마도 우리 속에 이와 같은 [가족의 재구성]이 미뤄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amp;nbsp;&amp;nbsp;&lt;br /&gt;&lt;!-- 내용이 끝나는 곳입니다.--&gt;&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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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십자가를 따르는 치맛바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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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2-02-03T23:13:54+09:00</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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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허태수 목사</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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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워너비 재키]와 [살로메] -십자가를 따르는 치맛바람-&lt;br /&gt;마20:20-28&lt;br /&gt;2009.5.10&lt;br /&gt;&lt;br /&gt;[세배데의 아들들의 어머니, 살로메]를 묵상 중에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이었고, 선박왕 오나시스의 부인이기도 했던 [제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를 무지무지하게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가정과 아이들을 위해 오나시스와 결별한 이야기, 마침내는 책을 만드는 출판인으로 일생을 끝마친 그녀의 삶을 통해 [세배데의 아들들의 어머니]를 볼 수 있었습니다. 모든 여자들이 재클린 처럼 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모든 여자들이 재클린처럼 &apos;등대 같은 표정과 빛나는 지성, 상대를 기죽이지 않는 품격 있는 에티튜드를 겸비&apos;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그리고는 재클린을 비난만 하고 있습니다. 마치 [세배데의 아들들의 어미]가 비난 받아 마땅한 여자인 줄 아는 것처럼 말이죠. 부득불 이번 주 설교도 길어서 파행을 자초 할 듯싶습니다.&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워너비 재키], 웅진 윙스- &lt;br /&gt;&amp;nbsp;&amp;nbsp;&lt;br /&gt;&lt;br /&gt;자식들을 위한 &apos;어머니들의 치맛바람&apos;은 예나 오늘이나 다를바 없이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부정적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17-28절에 나오는 &apos;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apos;도 바로 그런 의미에서 &apos;치맛바람&apos;을 일으키며 다니던 여인이었을까요? 아마도 우리말 개역 성경을 번역한 사람은 그렇게 생각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 역자는 본문에 나오는 &apos;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apos;를 격하시켜 &apos;세베대의 아들의 어미&apos;로 지칭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도합니다. &quot;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quot;(마 20:20-21). &lt;br /&gt;&lt;br /&gt;학자들은 &apos;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apos;가 예수께 와서 간청한 시간은 예수가 수난의 장소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수난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던 바로 &apos;그 때&apos;(마 20:17-19)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때에 자기 아들들을 예수의 좌 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한 이 여인의 간청이 얼마나 세속적인 탐욕에 가득 찬 것이며, 잘못된 것인지에 관해 역설합니다 . 또 많은 설교자들은 예수가 이 여인의 간청을 묵살하고, &quot;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quot;라는 말로 여인을 꾸중한 것으로 취급해 버리고 맙니다. &lt;br /&gt;&lt;br /&gt;그런데 &apos;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apos;로 지칭되는 이 여인은 어디에서 살던 누구인가요? 그녀는 어떻게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신이 수난 당할 것을 예언하는 그 순간에 갑자기 아들들을 데리고 나타나서 그런 간청을 한 것인가요? 실제로 그녀의 간청은 예수에 의해 한마디로 거절당하고, 그녀의 일생은 아들들을 위해 치맛바람을 일으키며 다니다가 예수로부터 꾸중들은 것으로 끝나고 말았는가요? &lt;br /&gt;&lt;br /&gt;마태복음보다 훨씬 먼저 쓰여진 최초의 전승인 마가복음 에는 예수의 좌 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간청한 사람이 &apos;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apos;로 지칭되는 여인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인 &apos;야고보와 요한&apos;(막 10:35-45)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이 보도되기 전에, 마가복음에는 예수의 &apos;수난 예고&apos;와 관련하여 그 &apos;제자들&apos;의 행태가 상세히 보도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를 따르면서도 예수가 &apos;인자&apos;로서 아버지의 &apos;일들&apos;을 수행하고, 마지막으로는 &apos;예루살렘에 가서 수난 당하고 십자가의 죽임 당해야 한다&apos;는 것을 말할 때 이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가 이 사실을 제일 처음 &apos;드러내놓고&apos;제자들에게 말했을 때, 베드로는 예수를 따로 모시고 만류하다가 예수로부터 &quot;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quot;(막 8:33)하고 꾸중 받지요? &lt;br /&gt;&lt;br /&gt;그 후, 예수가 수제자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만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 그 세 사람은 예수의 변화하는 모습을 보고, 또 구름 속에서 &quot;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quot;는 음성을 듣지만, 산에서 내려올 때 예수가 &quot;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quot;것을 말하자 &quot;그 말씀이 무슨 뜻인가? 하고 서로 반문&quot;할 뿐, 예수의 말을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막 9:2-13). 예수가 갈릴리에 가서 다시 &apos;제자들&apos;에게 &apos;인자의 수난과 부활&apos;에 대해 알려주었을 때에도 &quot;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했고 묻기조차 두려워했다&quot;(막 9:32). 제자들은 그 일이 있은 직후 가버나움으로 가는 길에서 서로 &quot;누가 더 높으냐?&quot;는 문제로 다투다가 예수로부터 &quot;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맨 마지막이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quot;(막 9:35)는 말로 꾸중을 듣습니다. &lt;br /&gt;&lt;br /&gt;그 후, 예수는 수난의 현장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다시 한번 제자들에게 자신이 &quot;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가서 이방 사람들의 손에 넘겨 질 것&quot;이라고 말합니다. 이 때 예수의 수제자에 속하는 &apos;야고보와 요한&apos;이 예수께 가까이 가서 &quot;주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도록 해 주십시오&quot;(막 10:37)하고 요구합니다. 예수는 그들을 향해 &quot;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모르는구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quot;하고 반문합니다. 그들이 &quot;할 수 있습니다&quot;하고 말하자 예수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quot;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 편과 왼 편에 앉게 하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누구를 위해 마련되었든지 그들이 차지할 것이다&quot;(막 10:40). &lt;br /&gt;&lt;br /&gt;이렇게 볼 때 예수로부터 꾸중을 들은 것은 분명히 수제자를 자처하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위시한 예수의 &apos;제자들&apos;입니다. 베드로는 예수가 가야할 수난의 길을 만류하고, 제자들은 예수의 수난 예고를 들으면서도 서로 누가 높으냐는 문제로 다투었으며,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가 영광을 받을 때 그의 좌우편에 앉게 되기를 요구합니다. 이 야고보와 요한의 요청은 &apos;제자들&apos;모두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 것 일 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가 &apos;다른 사람을 섬기며 목숨을 주기 위해 왔다&apos;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단지 자신들이 받을 영광을 기대하면서 예수를 따라다녔을 뿐입니다. &lt;br /&gt;&lt;br /&gt;마태복음 기자는 마가복음의 전승을 받아들여 예수의 수난 예고와 관련한 본문들은 모두 보도합니다. 그런데 그는 마가복음이 강조하고 있는 제자들의 무지에 대한 구절을 변형하여 상당히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베드로는 마가복음에서처럼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을 만류하다가 꾸중 받기 전에, 예수를 &apos;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apos;로 고백함으로써 천국의 열쇠를 부여받습니다. 예수가 변화 산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apos;인자의 죽음과 부활&apos;에 관해 말했을 때 마가복음에서는 세 제자가 예수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지 못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가 &apos;엘리야가 이미 왔고 인자가 고난받을 것&apos;을 말하자, &quot;그 때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 깨달았다&quot;(마 17:13)는 것으로 변형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길에서 &quot;누가 높으냐&quot;는 문제로 다투었다는 마가복음의 보도는 생략되고, 제자들이 예수에게 &quot;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quot;하고 질문하자 예수가 그 질문에 대해 마가복음과 동일한 답변을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lt;br /&gt;&lt;br /&gt;결정적인 변형은 마지막 수난 예고와 관련하여 일어났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apos;열 두 제자&apos;를 &quot;따로 불러서&quot;, 인자의 죽음과 부활 사건에 대해 말해 줍니다. 바로 &quot;그 때에&quot;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 수 없는 &apos;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apos;가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무언인가를 간청합니다. 예수는 그 여인에게 &quot;무엇을 원하느냐?&quot;하고 묻자, 그녀는 &quot;저의 두 아들을 당신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오른 편에 하나는 주의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quot;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는 복수형으로 &quot;너희는 자기 자신이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겠느냐?&quot;라고 묻습니다. &lt;br /&gt;&lt;br /&gt;학자들은 마태복음 기자가 마가복음의 전승을 받아들이면서 의도적으로 야고보와 요한 대신, 그들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간청한 것으로 변형시키고, 거기에 맞춰 몇 가지 점을 변형시켰다고 말 합니다 . 그들은 마태복음 기자가 이 과정에서 단지 인물만을 대체시키고, 마가복음의 사화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이 사화를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즉, &apos;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apos;의 요청에 대해 예수가 그녀에게 대답하지 않고, 복수형으로 &quot;너희가 무엇을 구하는지 모르고 있다&quot;고 답한 것은 마가복음의 보도를 변형시키지 않고 그대로 연결한 데에서 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마태복음에서는 마가복음과 달리 야고보와 요한이 아니라 &apos;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apos;가 예수께 간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마가복음에서와 마찬가지로 다른 &apos;열 제자&apos;가 &quot;두 형제에 대해 분개했다&quot;고 보도합니다. 이와 같은 점을 근거로 우리는 마태복음 기자가 본래의 전승이 전하는 야고보와 요한 대신 그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위해 예수께 간청한 것으로 변형시켰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lt;br /&gt;&lt;br /&gt;위와 같은 결론 앞에서 이제 우리는 다음 문제들에 직면하죠. 마태복음 기자는 왜 본래의 전승을 변형시켜 야고보와 요한 대신, &apos;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apos;가 예수께 간청한 것으로 보도하는가? 이것은 마태복음 기자가 복음서를 쓴 시기인 주후 90-110년 경, 예수의 제자들이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활동하던 것을 염두에 두고 그 제자들의 입장을 난처하지 않게 하기 위해 전승을 변형시킨 것일까? 혹은 이미 초대교회 공동체 안에 부활의 목격자인 여인들이 복음의 사역자로 활동하며 교회를 세우고 지도적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서 여성들의 치맛바람을 문제시하려는 것인가? 이것을 위해 마태복음 기자는 &apos;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apos;로 지칭되는 한 여인을 창작해 내고 있는가? &lt;br /&gt;&lt;br /&gt;마태복음 기자가 언급하고 있는 &apos;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apos;는 실제의 인물입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야고보와 요한이 갈릴리 호숫가에서 그물을 깁고 있다가 예수의 부름을 받고, 그들의 아버지인 세베대와 삯군들을 배에 남겨두고 곧 예수를 따라갔다(막 1:19-20)고 보도합니다. 마태복음에서 &apos;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apos;로 지칭되는 여인은 바로 &apos;세베대의 아들들&apos;인 &apos;야고보와 요한&apos;의 어머니입니다. 학자들은 마가복음 15장 40절에 근거해서 이 여인의 이름을 &apos;살로메&apos;라고 말하기도 하며, 요한복음 19장 25절에 나오는 예수의 이모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이 여인의 이름은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녀는 요한복음에 명시된 &apos;글로바의 아내&apos;나 누가복음에 나타난 &apos;헤롯의 시종 구사의 아내 수산나&apos; 처럼, 한 번도 어느 누구의 &apos;아내&apos;로 명시된 적도 없습니다. 그녀는 철저히 &apos;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apos;로만 존재합니다. &lt;br /&gt;&lt;br /&gt;일부 다처제의 유대사회 에서 살던 그녀는 &apos;세베대의 아내&apos;로 불리 워질 수 없던 처지에 있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정말로 &apos;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apos;로 불리워질 정도로 오직 자식들에게 자신의 전 생애의 목표와 가치관을 걸고 살아가던 여인이었기 때문인가요? 그녀는 도대체 어떤 상황에서 살고 있던 여인이었을까요? 우선 우리가 추정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로마의 통치 아래에서 동족인 남쪽 유대 사람들로부터도 멸시 당하던 지역인 갈릴리 지방에서 살고 있었으며, 갈릴리 호수 가에서 배를 가지고 있고 삯군을 부릴만한 처지에 있던 &apos;세베대&apos;의 &apos;아들들&apos;을 낳은 여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갈릴리에서 살고 있던 이 여인은 어떻게 예수와 그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현장에 나타나서 자기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의 좌 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요청할까요? &lt;br /&gt;&lt;br /&gt;누가복음 기자는 예수와 제자들이 도시와 마을로 두루 다니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복음을 전할 때 &quot;막달라 마리아와 헤롯의 시종 구사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와 그 밖의 여러 다른 여인들이 그들의 재산으로 예수의 일행을 섬겼다&quot;(눅 8:1-3)고 증언합니다. 최초의 전승인 마가복음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임종할 때 &quot;여인들이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quot;고 말하면서, &quot;그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 따르며 섬기던 여인들&quot;(마4 15:41)이라고 밝힙니다. 또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을 때, &quot;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른 여인들이 예수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었다&quot;고 말하면서, &quot;그 여인들 가운데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있었다&quot;(마 27:56)고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lt;br /&gt;&lt;br /&gt;그렇다면 &apos;세베대의 아들의 어미&apos;로 불리 우던 여인은 예수가 갈릴리에서 사역하던 처음 시기부터 예수를 따르며 섬기다가, 지금, &apos;갈릴리로부터 예수를 따라온 여인들&apos; 속에 섞여서 예수와 그 제자들을 동행하고 있던 것이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20장 17절에서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quot;열 두 제자를 따로 불러서&quot; 인자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말해주었다는 보도는 &apos;열 두 제자&apos; 외에 &apos;갈릴리로부터 예수를 따른 여인들&apos;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음을 암시해 줍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아들들을 위해 예수께 간청하는 &apos;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apos;는 갈릴리에서 그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아버지 세베대와 삯군들과 배를 버리고 예수를 따라나선 바로 그 때, 그녀 역시 고향과 남편과 집을 뒤로하고 아들들과 함께 예수를 따라 나선 여인임이 분명합니다. &lt;br /&gt;&lt;br /&gt;&apos;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apos;는 어찌되었건 그 고향과 남편과 집을 뒤로 하고 아들들과 함께 예수를 따르며, 예루살렘의 수난 현장에까지 올라간 여인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직전, 길에서 예수가 &apos;열 두 제자&apos;를 따로 불러서 자신이 당할 수난에 대해 얘기하던 바로 그 때, 이 여인은 다른 &apos;열 제자&apos;가 그녀에게 퍼부을 비난에 대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께 나아가 꿇어앉아 절하며, 그녀의 두 아들을 &apos;주의 나라에서&apos; 예수의 좌 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녀는 아직 예수의 모든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와 함께 &apos;수난의 잔을 마시는 것&apos;이 주의 좌 우편에 앉게 되는 영광의 길임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에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quot;주께서 영광을 받을 때에 우리를 하나는 주의 오른 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도록 해 주십시요&quot;(막 10:37)하고 말하면서, &apos;영광 받는&apos; 문제를 생각하는 반면, 이 어머니는 &quot;주의 나라에서&quot;(마 20:21) 일어날 일을 생각하며, 아들들을 위해 간청하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마태복음에 나타나는 &apos;어머니들&apos;은 자식들을 위해 자신의 온 몸을 내던지며, 그 자녀의 행복을 위해 끈질기게 예수에게 간청하는 여인들로 부각됩니다. 마태복음에서 귀신들린 딸을 가진 가나안 여인은 마가복음에서 보다 더 끈질긴 여인으로 증언되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큰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의 제자들을 괴롭히고, 두 번 씩 이나 예수에게 자신의 딸이 얼마나 고통당하는지에 관해 큰 소리로 호소하며 고쳐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녀는 예수가 &quot;아이들이 먹을 떡을 집어 개에게 던져 주는 것이 옳지 않다&quot;고 말했을 때에도 모든 자존심을 내동댕이치고, &quot;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먹습니다&quot;하고 말함으로써 마침내 예수로부터 &quot;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quot;는 칭찬까지 받고, 그 딸을 살려내죠(마 15:21-28). &lt;br /&gt;&lt;br /&gt;이렇게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와 제자를 괴롭히며 간청한 가나안 여인을 칭찬한 예수가 아들들을 위해 간청하는 &apos;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apos;는 꾸짖고 말았을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예수는 &quot;여인아, 너는 너의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quot;고 말하면서 이 여인을 꾸짖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복수형으로 묻고 있습니다. &quot;너희는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너희는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quot; 예수가 &apos;마시려는 잔&apos;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는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apos;수난의 잔&apos;입니다. &lt;br /&gt;&lt;br /&gt;예수는 처음 제자들을 부르면서부터 이 십자가의 길로 &quot;나를 따라 오라&quot;고 부른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지금, 수난의 현장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단지 자기 자신의 영광과 자녀를 위해 간청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묻고 있습니다. &quot;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고, 십자가의 길을 따라오려는가?&quot; 예수의 물음에 대해 &quot;마실 수 있습니다&quot;하고 답변한 것은 예수께 간청했던 &apos;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apos;가 아니라 복수형으로 된 그들, 말하자면 야고보와 요한을 위시한 &apos;제자들&apos;입니다. 그들은 &quot;마실 수 있습니다&quot;하고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lt;br /&gt;&lt;br /&gt;그런데 예수가 십자가의 길을 갈 때, 예수를 따르겠다고 장담하던 야고보와 요한을 위시한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수난의 잔을 함께 마셨습니까? 복음서 기자들은 한 결 같이 제자들 중 어느 한 사람도 예수가 가는 십자가의 길을 따르지 않았다고 보도합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를 배반하여 팔아넘기고, 베드로는 세 번 씩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으며, 제자들 중 남아있던 한 사람마저 발가벗은 채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따라다니며 예수가 행하는 &apos;일들&apos;을 보았음에도 예수의 십자가의 수난 앞에서 모두 예수를 버리고 떠나 버렸습니다. 그들이 그때까지 예수를 따른 것은 예수를 통해 자신들의 열망이 이루어지고, 영광을 받으며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lt;br /&gt;&lt;br /&gt;바로 이 점에서 예수는 &apos;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apos;의 간청을 들은 후, 복수형으로 제자들을 향해 &quot;너희는 자기 자신이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quot;(마 20:22)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는 &apos;열 제자&apos;가 듣고, &apos;두 형제&apos;에 대하여 분히 여기는 것을 보고 , 제자들을 불러서 말해준다. &quot;이방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립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중에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한다.&quot; 또 예수는 자신이 &quot;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 물로 자기 목숨을 내어주러 왔다&quot;(마 20:28)는 점을 밝히며, &apos;참 제자&apos;가 되려면 자신과 가족의 안일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을 섬기며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오라고 요구합니다. &lt;br /&gt;&lt;br /&gt;앞에서 밝힌 대로, 예수의 십자가의 수난 앞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위시하여 예수의 제자들은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모두 도망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자기 아들들을 위해 간청하다가 예수의 제자들과 함께, 예수가 알려주는 말을 듣고 있었던 &apos;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apos;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마태복음 기자는 27장 55-56절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도합니다. &quot;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좇아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quot; 이 보도에 근거해 보면, &apos;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apos;는 아들들을 위해 간청한 후에도 계속해서 예수를 따라 다녔음이 분명합니다. 그녀는 예수의 남자 제자들이 모두 예수를 배반하고 부인하며 도망쳐 버린 상황에서, 그리고 자신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도 처음에는 따라가지 못한 십자가의 현장에까지 다른 여인들과 함께 예수를 따라간 것입니다. &lt;br /&gt;&lt;br /&gt;사실 복음서 기자들의 증언에 근거해 보면 &apos;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apos;는 &apos;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인들&apos; 중에 섞여서 예수의 무덤을 찾아갔으며(막 16:1, 마 28:8, 눅 23:55), 부활한 예수로부터 사도들에게 부활소식을 전하라는 사명을 부여받고(마 28:9-10), 이 소식을 사도들에게 전했음이 분명합니다 (마 28:11눅 24:10). 마태복음 기자는 이러한 사실을 증언하면서도 무덤을 찾아가서 부활한 예수를 만난 과정에서는 복수형으로 &apos;여인들&apos;이 그 일을 수행했다고 말할 뿐, &apos;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apos;의 이름을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apos;세베대의 아들의 어미&apos;가 예수가 간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서 그 죽음을 지켜보았다는 점만은 분명하게 밝힙니다. 유대인으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자로서, 유대사회의 가부장적 가치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던 마태복음 기자가 이 사실을 보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lt;br /&gt;&lt;br /&gt;당시 유대사회에서 &apos;여자&apos;와 &apos;아이들&apos;은 &apos;사람&apos;으로 간주되지도, 사람의 수에 들지도 않았습니다. 이러한 유대사회의 가부장적 가치관을 반영하듯이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가 굶주린 사천 명을 먹인 이야기를 보도하면서 여자와 아이를 숫자에 넣지 않고, &quot;먹은 사람은 여인과 아이들 외에 남자가 사천 명이었다&quot;(마 15:38)고 말합니다. 유대사회에서 &apos;여자&apos;는 한 인격체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단지 아버지나 그 남편의 소유물로 존재했으며, 성적 대상으로 간주되었을 뿐입니다. 여인들이 대문 밖을 나가지 않는 것이 미덕으로 간주되었고, 부득불 여인들이 바깥출입을 해야 할 경우에는 면사포로 그 얼굴을 가려야 했습니다. 여인들은 율법을 배울 수도, 회당에 나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을 가르치거나 남자들에게 말을 붙인다는 것은 모두 금지 되었습니다 . &lt;br /&gt;&lt;br /&gt;이러한 유대 사회에서 살았던 유대 남자인 마태복음 기자의 눈에 이 &apos;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apos;는 어떤 여인으로 비쳤을까요? 아마도 그가 전통적 유대사회의 가부장적 가치관에 고정되어 있다면, 아무리 예수를 따른다 할지라도 &apos;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apos;는 그렇게 내놓고 칭송할 여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라! 그녀는 가정과 남편을 버려둔 채 , 집밖으로 나돈 여자가 아닌가? 더욱이 그녀는 여자로서 예수의 남자 제자들과 함께 예수를 따르며, 갈릴리로부터 시작하여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각 지역과 마을을 두루 돌아다닌 여인이 아닌가요? 유대인과 로마가 공모하여 예수를 죽이고 그 제자들도 잡으려 한 무시무시한 그 때에도 그녀는 치마를 입은 여자의 몸으로 십자가의 처형 장소까지 따라가서 예수의 처형을 지켜본 여인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당시 가부장적 사고를 가진 유대 남자의 눈에 이 여인은 남편과 집을 내버려두고 나돌아 다니는 부도덕하고 &apos;정신 나간 여인&apos;으로 비취지 않았겠습니까! &lt;br /&gt;&lt;br /&gt;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 기자는 &apos;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apos;로 지칭되는 여인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 된 &apos;갈릴리로부터 예수를 따른 여인들&apos;의 무리 속에 있었으며, 예수의 십자가를 따라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역사적 예수의 주변에는 예루살렘의 수난과 부활 현장에 이르기까지 &apos;갈릴리로부터 예수를 따르며 섬긴 여인들&apos;이 있었으며, 이 여인들에 대한 증언을 본래의 전승으로부터 전해 받은 마태복음 기자가 그것을 그대로 묵살해 버릴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당시에 실제로 예수를 따른 여인들이 가부장적인 전통과 규범을 깨치고 나오며, 예수의 수난과 부활을 증언하는 제자로 활동함으로써 터져 나오는 새 역사의 위력을 눈으로 목격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lt;br /&gt;&lt;br /&gt;그러나 다만 이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비록 가부장적 사고를 가진 유대남자였지만 마태복음 기자는 &quot;형제나 자매나 아버지나 어머니나 자식이나 땅이나 집&quot;(마 19:29)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며, &quot;다른 사람을 섬기는&quot; 사람만이 참 제자가 된다는 예수의 말을 인식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 &apos;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apos;에 대한 증언을 통해 수난의 현장에서 남자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도망쳐 버렸으나 도리어 당시 사회에서 멸시 당하고 있던 &apos;치마 입은 여인들&apos;이 세상 적으로 집착하던 모든 것을 버리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갔으며, 다른 사람을 섬기는 &apos;참 제자직&apos;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증언하게 된 것입니다. &lt;br /&gt;&lt;br /&gt;우리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가부장적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의 눈에 한낱 무모한 &apos;치맛바람&apos;을 일으키다가 예수로부터 꾸중들은 여인으로 취급당해 왔던 &apos;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apos;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 여인은 본래 유대사회의 가부장적 사회 규범 속에서 단지 &apos;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apos;로만 존재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당시 민족의 수난의 역사 속에서, 갈릴리 사람들이 로마 뿐 아니라 동족으로부터도 멸시와 억압을 당하는 수난의 현장 속에서, 당시의 관습에 맹종하여 집 문 밖을 나가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면서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우고 물건처럼 집안에 앉아있던 유대여인도, 남편의 소유물과 성적 대상 이상의 취급을 받지 못하며 노예처럼 생활하던 &apos;아내&apos;의 자리에 안주해 있은 여인도 아닙니다. 또한 그녀는 끝까지 아들들만을 위해 예수께 간청하다가 &apos;꾸중&apos; 들은 채 생을 마친 여인도 아닙니다. &lt;br /&gt;&lt;br /&gt;그녀는 그 엄청난 가부장적 사회에서 당시의 규범을 깨뜨리고 고향 갈릴리와 집과 남편을 뒤로하고 아들들과 함께 예수를 따라나섰으며, 예수와 제자들을 &apos;섬김&apos;으로서, 억압받는 자들을 구원하는 &apos;복음&apos;의 사역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가장 집착했던 그 아들들조차 십자가의 길 앞에서 다른 제자들과 함께 도망쳐 버린 그 순간에도 그녀는 아들들을 따라가는 대신 그녀 스스로 결단하여 끝까지, 고난 받는 자를 위하여 걸어간 예수의 십자가의 길을 따랐습니다. 이리하여 그녀는 예수와 함께 수난의 잔을 마신 &apos;참 제자&apos;가 되었으며, 예수가 약속한대로 &apos;주의 나라에서 예수의 좌 우편에 앉게 된&apos;장본인이 된 것입니다. &lt;br /&gt;&lt;br /&gt;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이 점을 올바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의 십자가를 따라가서 지켜 본 여인들이 &quot;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긴&quot;(막 15:41) 여인들이라는 보도를 들으면서도, 여인들의 그 &apos;섬김&apos;이 예수가 말한 참된 제자직의 모범으로 제시된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의 남자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복음을 전하고, 여인들은 단지 예수와 제자들의 &apos;시중을 들었다&apos;는 식으로 번역하고 해석하면서18) 여인들의 &apos;섬김&apos;을 격하시키고 있습니다. &lt;br /&gt;&lt;br /&gt;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apos;섬기는 사람&apos;을 멸시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예수의 제자로 자처하는 자들이 앞장서서 &apos;높은 자리&apos;를 탐내며, 누가 높으냐는 문제로 다투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의 증언에 입각하여 분명하게 말합니다. 민족의 수난과 고난의 현장에서, 자신이 받을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버리고 십자가의 길을 따르며, 그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섬긴 여인, &apos;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apos;로 불리우던 그 여인이야말로 예수를 따른 참 제자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lt;br /&gt;&lt;br /&gt;그런데 복음서 기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apos;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apos;로 지칭되던 이 여인의 행위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녀는 &apos;갈릴리로부터 예수를 따른 여인들&apos;의 한 사람으로서, 무덤을 찾아가서 부활한 예수를 만났으며, 예수로부터 직접 남자 제자들에게 부활 소식을 전하라는 사도직을 부여받고 그 일을 수행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십자가의 길을 배반하고 도망쳤던 예수의 남자 제자들이 돌이켜 수난의 현장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예수의 &apos;부활&apos;소식을 전하게 됨으로써, &quot;모든 사람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은 나누며 서로를 섬기는&quot;(행 2:43-47) 새 역사의 회오리바람을 일으킵니다 . &lt;br /&gt;&lt;br /&gt;사도행전 기자는 이러한 과정을 자세히 보도해 주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는 &quot;요한의 형 야고보가 헤롯의 칼에 맞아&quot;(행 12:2) 예수의 제자들 가운 데 가장 먼저 순교했음을 언급합니다. 파피아스의 증언에 의하면 야고보의 동생인 요한도 초대교회 안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하다가 순교했다고 했습니다 . 이렇게 볼 때 &apos;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apos;가 예수께 와서 자신의 두 아들을 &apos;주의 나라에서 예수의 좌 우편에 앉게 해 달라&apos;고 간청한 것은 결국 성취된 것이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apos;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apos;였던 여인이 자기의 아들들에 대한 집념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apos;참 제자&apos;가 되어, 자식들의 안일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으로 전환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lt;br /&gt;&lt;br /&gt;이러한 소식을 들으면서 이제 우리는 &apos;여인들의 치맛바람&apos;을 무조건 비난하면서 여인들에게 가부장적 가치관과 침묵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 사회에도 &apos;세베대 아들들의 어머니&apos;처럼 단지 자식들의 안일을 위한 &apos;세속적 치맛바람&apos;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민족의 수난과 고난의 현장에서 &apos;십자가를 따르는 치맛바람&apos;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멸시와 억압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섬김으로써 생명과 부활의 새 역사를 일으키고 있는 &apos;치맛바람&apos;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러한 여인들의 &apos;치맛바람&apos;이야말로 그 자녀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며, 비겁함과 침묵 속에서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헛된 탐욕에 집착하는 우리의 무지를 일깨워 십자가를 따르며 다른 사람을 섬기는 &apos;참 제자&apos;의 길로 안내하기 때문입니다. &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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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기독교 신앙과 이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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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2-02-03T23:13:54+09:00</published>
      <updated>2012-02-03T23:27:42+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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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허태수 목사</name>
               </author>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기독교 신앙과 [이혼] &lt;br /&gt;마5:31-32&lt;br /&gt;2009.5.3 &lt;br /&gt;&lt;br /&gt;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오늘날 우리네 &apos;가정&apos;이라고 하는 것이 예스럽지 않습니다. 다문화, 홀 부모, 재혼가정 등등 그 양태는 실로 다양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apos;가정&apos;의 문화를 이해하는 접근방식 또한 과거와 전혀 다릅니다. 저는 이제 한 달 동안 이처럼 다양해진 &apos;가정&apos;에 대한 기독교적 물음과 답을 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로 &apos;세 쌍 중에 한 쌍이 이혼 가정&apos;이라는 현실에서 ‘이혼은 과연 죄인가?’라는 물음에 답하고자 합니다.&amp;nbsp;&amp;nbsp;&amp;nbsp;&amp;nbsp; &lt;br /&gt;&lt;br /&gt;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본문은 &apos;이혼불가&apos;의 헌장인 줄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본래 마태복음의 그 본문에서 예수는 결코 새로운 이혼 법을 제정한 것도, 절대적으로 이혼을 죄악시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이혼 금지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니라는 것을 성서 본문에 대한 역사비판학적 해석을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lt;br /&gt;&lt;br /&gt;사실상 지금까지 교회 전통에서는 대부분 마태복음 19장 3-9절의 진술과 5장 31-32절을 해석하면서 예수는 &apos;음행한 경우&apos;는 이혼을 허락했지만, 원칙적으로 이혼을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일어나는 간음으로 규정하고 이혼을 금지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카톨릭 교회는 교리와 법으로 이혼을 간음죄에 해당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사회법으로까지 이혼 금지법을 제정해 놓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일들이 예수의 선포에 근거해 있을까요? 예수는 정말 이혼 자체를 간음으로 간주하며, 이혼금지법을 제정했을까요? 아니면, 성서는 근본적으로 &apos;이혼&apos; 자체를 죄악시하며 금하고 있는 것일까요? &lt;br /&gt;&lt;br /&gt;오늘날 &apos;이혼&apos;에 대한 정의를 보면 &apos;어느 쪽이든 한 배우자가 혼인에 관한 법률적인 관례를 해소하여 서로 갈라서는 것&apos;을 의미하며, 현행 상으로는 협의 이혼과 재판상의 이혼이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에 &apos;이혼&apos;은 여자 편에서는 전혀 제기할 수 없었고, 오직 남편 쪽에서만 제기할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협의 이혼과 같은 그런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남자가 자기 아내를 집에서 &apos;내어보내고&apos;, &apos;버리는 것&apos;으로서의 이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서 잘 드러나듯이 당시 남자들은 여러 명의 아내와 첩을 둘 수 있었고, 그것은 전혀 죄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사회에서 여자들은 단지 남자의 소유물과 성적 대상으로서만 존재할 뿐이었습니다.&amp;nbsp;&amp;nbsp;&lt;br /&gt;&lt;br /&gt;이러한 일과 관련하여 말라기와 같은 예언자들은, 소싯적 아내를 &apos;내어버리지 말라&apos;고 명령합니다(말 2:13-16). 구약성서에서 &apos;이혼&apos;을 금하는 경우는 바로 이렇게 남자 쪽에서 일방적으로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일과 관련해서 나타나는데, 신명기 저자는 남편이 아내를 취하여 동침한 후 처녀가 아니라고 누명을 씌어서 내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신 22:13-19), 그리고 약혼하지 않은 처녀를 강간한 경우 그 여자를 내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명령합니다(신 22:28-29). 그러나 이와는 달리 구약성서에는 이혼에 대한 금지가 아니라, 도리어 이혼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강요하는 내용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lt;br /&gt;&lt;br /&gt;예언자 에스라는 이방여인을 아내로 삼은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합니다. &quot;너희가 범죄 하여 이방 여자로 아내를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이제 너희 열조의 하느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 뜻대로 행하여 이 땅 족속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버리라.&quot;(스 10:10-11). 말하자면 여기에서 에스라는 종교상의 이유로 이스라엘 남자들이 아내로 취한 이방여자를 &apos;내어버리라&apos;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남자들은 이 명령과 법령을 시행하기 위해 이방여자와 결혼한 사람을 3개월 동안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 17명, 레위인 10명을 포함한 많은 이스라엘 남자들이 이방인 아내와 그 자식들까지 내어버렸습니다. &lt;br /&gt;&lt;br /&gt;신약성서에서도 아내를 내어버리는 일은 결코 일방적으로 비난을 받는 요소나 금지된 행위가 아닙니다. 도리어 누가복음 18장 29절을 보면 남편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행위는 보상과 영생을 받는 조건입니다. 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quot;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식을 버린 사람은 이 세상에서 여러 갑절로 보상을 받을 것이고, 또한 오는 세상에서 영생을 받을 것이다.&quot; &lt;br /&gt;&lt;br /&gt;예수의 사후 그리스도교가 헬라 세계에 전파되면서, 신앙의 문제로 부부간에 많은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바울은 과감하게 이혼을 권유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quot;믿지 않는 쪽에서 헤어지려고 하면, 헤어지게 하라&quot;고 말하고, &quot;이런 경우에는 얽매일 것이 없다&quot;(고전 7:15)고 선언합니다. 물론 이 경우, 바울의 주된 관심은 독자적인 &apos;이혼&apos;의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어떻게 주 안에서 남자와 여자, 주인과 노예가 모두 &apos;평화롭게&apos; 살아갈 것인가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당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남편과 아내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배우자의 입장에서 그들이 헤어지기를 원하면 헤어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quot;하느님이 모든 사람을 평화롭게 살게 하려고 부르셨다&quot;(고전 7: 15)는 사실을 분명히 하면서, 남편과 아내가 이혼을 통해서라도 쌍방간에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이룩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구약성서는 물론 예수의 경우도 오늘날과 같은 이혼에 관해서는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오늘날 일어나는 다양한 이혼 문제에 대해서 예수로부터 그 해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의 근거로 삼고 있는 마태복음 19: 3-9절과 5장 31-32절에 상응하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본문을 살펴보면 실제로 예수가 이혼 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를 찾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각 복음서들은 그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면서, 전승된 예수의 말을 첨가, 삭제, 변형시키고 있기 때문이죠. 이것들을 표준새번역 성경전서(대한성서공회, 1993)에 의해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lt;br /&gt;&lt;br /&gt;마태복음 19장 3-9절 &lt;br /&gt;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그를 시험하려고 물었다. &quot;무엇이든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quot;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quot;너희는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 하시기를 &apos;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어야 한다&apos; 하신 것을 아직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quot; 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quot;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 주고 아내를 버리라고 명령하였습니까?&quot;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quot;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해 준 것이지, 본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음행한 까닭이 아닌데도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드는 사람은 간음하는 것이다.&quot; &lt;br /&gt;&lt;br /&gt;마태복음 5:31-32절 &lt;br /&gt;&quot;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는 사람은 그에게 이혼 증서를 써 주어라&quot;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quot;음행한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사람은, 누구나 그 여자를 간음하게 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은 간음하는 것이다.&quot; &lt;br /&gt;&lt;br /&gt;마가복음 10:2-12 &lt;br /&gt;바리새파 사람들이 다가와서, 예수를 시험하려고 물었다. &quot;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quot;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quot;모세가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quot; 그들은 &quot;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quot;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quot;모세는 너희의 완악함 때문에 이 계명을 써서 너희에게 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quot;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이 말씀을 두고 물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quot;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드는 남자는, 아내에게 간음하는 것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면, 간음하는 것이다.&quot; &lt;br /&gt;&lt;br /&gt;누가복음 16:18 &lt;br /&gt;&quot;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드는 남자는 간음하는 것이요,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남자도 간음하는 것이다.&quot; &lt;br /&gt;&lt;br /&gt;우선 마태복음 5:31-32절에 상응하는 마가와 누가의 진술을 살펴보면, 누가는 가장 간단한 내용으로 &apos;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남자&apos;와, &apos;버려진 여자에게 장가드는 남자&apos;를 겨냥하여 그 둘을 모두 간음했다고 말합니다. 마가복음은 &apos;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남자&apos;를 문제 삼으면서, 그는 &quot;아내에게 간음을 행한다&quot;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른 두 복음서에는 없는 내용을 보도하는데, 마태와 누가와는 달리 여자 쪽에서 먼저 &apos;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는&apos; 것을 간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마가복음 기록 당시 헬라 여자들이 여자 쪽에서 먼저 남편을 버리거나 죽이기까지 하면서 다른 남자와 재혼하여 부와 권력을 취하고 있었던 것을 문제 삼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마태복음은 &quot;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quot; 이라는 말을 첨부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마치 예수가 음행의 경우 아내를 버릴 수 있도록 허락한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이 말은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마가와 마태의 신학적 내용이 담긴 구절을 제외하고 본다면 실제로 이들 본문에서 예수가 관심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과 같은 이혼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유대 남자들이 이혼증서를 써 주고 마음대로 조건을 붙여 아내를 버리고 있던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19장 3-9절의 내용에서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어요.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시험하면서 &quot;무슨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되는가?&quot;하고 질문합니다. 이러한 물음은 당시 가부장적 유대사회에서 남성 위주로 일방적으로 자행되던 이혼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래 구약 신명기 법(신 24:1-2)에는 남자가 그 아내를 취하여 동침한 후에 마음대로 내어보내거나 학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조건을 달아 놓았습니다. 그것은 그녀에게 &apos;수치 되는 일&apos;이 발견되는 한에 있어서만 아내를 내어보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lt;br /&gt;&lt;br /&gt;본래 이 &apos;수치 되는 일&apos;은 신명기에서는 여성의 성적 순결의 문제에만 관련되어 있었습니다(신22: 13-22). 신명기 저자는 아내를 취한 후 처녀가 아닌 경우 돌로 쳐죽이던 유대법을 완화시키고, 이혼장을 써 주어 내어보내는 것으로 그 여인의 생명을 보호했습니다. 그리고 이혼장을 가진 여자는 다시 여러 번 재혼할 수 있도록 법으로 그녀의 인권을 보호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당시 유대교의 힐렐파와 샴마이파는 신명기에 기록된 &apos;수치 되는 일&apos;을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했습니다. 샴마이파는 &apos;간음&apos;을 이혼의 사유로 규정하고, 힐렐파는 우리나라의 칠거지악보다 더 한 규정을 만들어서 아내가 요리를 할 줄 모른다거나 남편이 보기에 다른 여자보다 더 밉다든지 하면 이 모든 것을 아내가 &quot;남편에게 수치 되는 일&quot;을 저지른 것으로 간주하여 이혼증서를 써 주고 그 아내를 쫓아내었습니다. &lt;br /&gt;&lt;br /&gt;마태복음 19장 2절에서 예수는 바로 이러한 유대 남자들의 불의를 문제 삼으면서, &quot;창조주가 처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고, 남자는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으므로, 이제는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니 하느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quot;고 말합니다. 예수는 이 말을 통해 결혼 자체를 &apos;하나님이 짝 지워주신 것으로서 사람이 갈라놓을 수 없는&apos; 신성한 것임을 강조하려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시험하려고 &quot;무엇이든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되는가?&quot;하고 묻는 그 물음 자체가 불의한 것임을 폭로하려는데 그 뜻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기에서 창세기의 두 가지 창조기사 중, 여자를 남자의 갈비뼈로부터 만들었다는 창조 기사를 인용하지 않고, &quot;창조주가 처음부터 동등하게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다&quot;는 창조기사를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제는 둘이 한 몸&quot;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일방적으로 남편이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일을 금합니다. 누가 누구를 버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amp;nbsp;&amp;nbsp;&lt;br /&gt;&lt;br /&gt;마태복음 5장 31-32절의 진술이 들어있는 산상복음의 가르침은 형식상으로는 &quot;옛 사람에게 말한바 너희는 ...라고 들었다. 그러나 나 자신은 너희에게 말한다&quot;라는 법조문의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상 그 언어의 지향성은 법조문이 아니라 율법을 내세우면서 불의를 자행하던 유대 남자들의 그것을 폭로하며 고발하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apos;이혼&apos;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는 마태복음 5장 31-32절의 본문에서도 예수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마음대로 이유를 붙여 자기 아내를 내어버리고 있던 유대남자의 불의입니다. 이런 경우에 한하여 예수는 이혼을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마가의 경우는 달라진 사회 풍조 속에서, 남편만이 아니라 아내 쪽에서 먼저 부당하게 남편을 버리는 행위도 문제 삼고 있지요. &lt;br /&gt;&lt;br /&gt;이혼의 문제와 관련하여 사람들이 가장 큰 관심을 보이는 것 중 하나는 적어도 배우자가 성적으로 음행을 저지르거나 간음을 했을 경우만은 예수도 이혼을 허락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5장 31-32절에서 예수가 &apos;음행한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사람&apos;을 문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마가와 누가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이렇게 물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마태는 &apos;음행&apos;의 경우, 이혼의 조건이 된다고 보았단 말인가? 정말로 그는 이 본문을 통해 ‘이혼’을 말하고 있는 걸까요?&amp;nbsp;&amp;nbsp;&lt;br /&gt;&lt;br /&gt;그런데 우리말 번역에서 &apos;음행한 경우를 제외하고&apos;, 혹은 &apos;음행한 연고 없이&apos;로 번역하고 있는 구절은 희랍어 원문은, &apos;음행의 말도 없이&apos;, 혹은 &apos;음행의 말 외에&apos;라는 뜻입니다. 마태는 이 구절을 &apos;음행한 경우&apos; 에는 이혼을 해도 된다든지,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된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32절이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여기에서 문제 삼고 있는 것은 &apos;다른 여자를 보고 욕심을 품고&apos; (마 5:27-28), 음행하지도 않은 아내를 버리는 남자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별다른 상황 증거도 없이 남자가 일방적으로 ‘아내가 음행했다’고 지껄이며 아내를 버렸던 것입니다. 그런 남자들을 향해 &quot;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quot;이야말로 간음한 자이며(마 5:28), 음행하지도 않은 아내를 버리는 남자야말로, &apos;그 아내를 간음하게 하는&apos; 불의한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역전입니다. 예수 당시 유대사회에서 음행이나 간음은 전적으로 여자들에게만 적용되었습니다. 남자들은 여러 명의 아내나 첩을 두어도 그것은 간음으로 간주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문제가 되는 때가 있는데, 그것은 다른 남자의 소유물로 간주되었던 여자, 즉 다른 남자와 약혼하거나 결혼한 여자를 취했을 때에는 간음죄로 간주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남자의 재산을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처녀라는 징표가 없을 때나, 아무 죄도 없이 남편으로부터 의심을 사는 경우, 모두 음행과 간음을 한 것으로 간주되어 돌로 쳐죽임을 당하거나 의심의 법에 따라 독한 물을 먹고 결백을 검증 받아야 했습니다. &lt;br /&gt;&lt;br /&gt;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는 당시에 다른 여자를 취하기 위해 실제로는 아무 죄도 짓지 않은 자기 아내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 내어보냄으로써 그 아내로 하여금 &apos;간음을 하도록 만드는&apos; 남자들의 불의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마태의 이러한 진술은 마태복음이 기록되던 주후 90년 당시 유대사회에서의 여성의 비참했던 삶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여성들은 유대 전쟁 이후 로마의 지배와 유대사회의 가부장적 문화 전통 속에서 그 어느 계층의 사람들보다 더 극심한 고통과 차별을 받아왔습니다. 여성들은 전혀 인격적 주체가 될 수 없었고 단지 남성들의 재산과 성적 소유물일 뿐이었습니다. 그 여인들은 남편에 의해 하루아침에 버림을 받게 되면, 오늘날처럼 직장을 갖거나 자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여인들은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다른 남자를 찾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될 경우 유대교의 법률에 의해 &apos;남편이 있는 여자가 재혼했다&apos;는 이유로 간음한 여자로 취급받았습니다. &lt;br /&gt;&lt;br /&gt;그런데 마태복음 저자는 자신의 신학적 관점에 따라 당시 유대적 관점에서 &apos;죄인&apos;으로 규정하던 사람들에 대해 전혀 다른 판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가 볼 때, 사실상 유대인들에 의해 &apos;죄인&apos;으로 규정 당한 사람들은 실제로는 굶주림과 헐벗음에 허덕이며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야 할 사람으로서, 유대인들이 만들어 놓은 법 체제에서 &apos;죄인&apos;이라는 무거운 멍에를 지고 신음하는 사람들일 뿐이었습니다. 아니, 그가 볼 때 사실 그들은 &apos;아무 죄도 없는 무죄한 사람&apos;으로서, 유대인들이 만들어 놓은 법 체제 아래에서 가난 때문에 &apos;걸려 넘어지게 된 사람&apos;들이었습니다. 마태가 볼 때 죄인은 사실상 하느님의 율법을 불법으로 이용해 힘없는 사람들을 멸시하고 차별하고 착취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apos;걸려 넘어지게 한&apos;(죄짓게 한)율법학자와 권력자들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는 마태복음 18장 6-9절에서 &quot;작은 사람들 가운에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quot;이야말로 죄가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apos;손이나 발이 그 사람을 죄짓게 하거든 잘라 버리라&apos;는 무서운 비유를 통해, 그들이 먼저 회개하고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죄짓게 만드는 요소를 철저히 없애라고 명했습니다. &lt;br /&gt;&lt;br /&gt;이러한 신학적 관점 아래 마태는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탐하여 재혼하는 남자들의 불의한 행동을 철저히 금하기 위해서 &apos;여자를 보고 욕심을 품는 것&apos;을 이미 &apos;간음한 것&apos;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리고 신명기법으로는 버림받은 여자가 재혼하는 것이 법으로 허락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는 &apos;남자가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것&apos;을 &apos;간음&apos;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마태 역시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apos;이혼&apos; 행위 자체를 &apos;간음&apos;으로 규정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또 그는 &apos;음행&apos;의 경우에도 이혼을 허락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lt;br /&gt;&lt;br /&gt;마태복음에서 바울은 &apos;버림받은 여자&apos;와 &apos;재혼하는 남자&apos;를 문제 삼았지만, 실제로 이혼 당한 여자의 재혼 자체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거나, 재혼의 문제를 독자적으로 거론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대 남자들의 불의를 폭로하며, 그들이야말로 힘없는 자들과 여자들을 &apos;걸려 넘어지게 하는&apos; 불의를 저지르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우리는 앞에서, 오늘날 이혼 문제와 관련하여 갈등하는 사람들이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 답하기 위해 관련되는 성서 본문을 고찰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본문들은 사실상 이혼문제를 독자적인 주제로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 이혼으로 인해 제기되는 많은 문제들에 대한 지침서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성서본문이 말하고 있는 내용을 근거로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apos;이혼&apos;한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며, 또한 그들이 부딪치고 있는 문제들을 어떻게 함께 풀어가야 할 것인지를 모색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이 문제를 조금 더 좁혀서, 어떤 이유로든지 이혼한 여자들(그들이 남편에 의해 부당하게 버림받았든지, 혹은 마가복음에서처럼 그녀들 스스로 먼저 남편을 버렸든지 간에)의 경우를 가지고 말해 보려고 합니다. &lt;br /&gt;&lt;br /&gt;오늘날 우리 사회는 아무리 이혼의 사례가 늘어나고 있어도 여전히 이혼한 여성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곱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이혼한 여자는 무언가 문제가 있는 여성으로, 혹은 가정과 자녀를 잘 돌보지 못한 덕이 없는 여성으로, 나아가서는 죄인으로까지 매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lt;br /&gt;&lt;br /&gt;예수가 볼 때 결코 이혼 자체가 &apos;죄&apos;는 아닙니다. 또 &apos;이혼&apos;은 &apos;간음죄&apos;에 해당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서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는 이혼했다는 이유만으로 이혼한 여자를 간음자로 못 박거나 정죄한 적이 없습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는 형장에서 간음죄의 죄명으로 끌려나와 돌로 쳐죽임을 당하려던 여자가 아니라, 여자를 죽이려고 둘러 쌓아있던 유대 남자들의 불의를 폭로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서를 통해 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예수가 실제로 이혼한 여자를 자신의 복음 사역의 동역자로 삼았으며, 그 여인들은 다른 어떤 제자보다 더 참되게 예수를 따르며 섬겼다는 사실입니다. &lt;br /&gt;&lt;br /&gt;마태복음은 결혼 여부를 알 수 없는 많은 &apos;갈릴리의 여인들&apos;이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까지 예수를 따라갔으며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고 보도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apos;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apos;로 불리던 여인이 갈릴리에서 배와 종들을 가지고 있던 부유한 남편 세베대와 그의 집을 떠나서, 아들들과 함께 예수의 복음 사역의 길에 동행하며 예루살렘의 수난과 부활의 현장까지 예수를 섬기고 따랐다는 사실을 말합니다(마 20:20, 27:55-56, 막 1:20). 또 누가복음에 의하면 &apos;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 요안나&apos;(눅 8:3)라는 여인은, 예수가 성과 마을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할 때 자기의 재산으로 예수와 일행을 섬기며 함께 동행합니다. 그리고 요안나도 예수의 무덤을 찾아가서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고 다른 사도들에게 예수 부활의 첫 소식을 전하는 여자들의 무리에 들어있습니다(눅 24: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 교회 전통에서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로 불리던 여인과 요안나는 성화 그림에서도 뒷 배경에 위치할 뿐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녀가 남편을 둔 주부이면서 가정과 남편을 떠나 예수를 따랐다는 것이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못내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2세기에 한 여성 선교자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여 저술된 [바울과 테클라의 행전](Acts of Paul and Thecla)을 보면, 많은 헬라 여인들이 개종한 후 집을 떠나 복음 사역에 앞장섰으며, 특히 테클라는 바울에 의해 개종한 후 금욕의 맹세를 했기 때문에 약혼자와 가족에 의해 박해를 당하다가, 바울에 의해서 &apos;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도록&apos; 위임을 받고 집을 떠나 사도로서 맹렬히 활동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바울이 고린도 전서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남편과 아내가 헤어지려고 하는 경우를 특별히 거론하면서, 믿지 않는 쪽에서 헤어지려고 하면 헤어지라고 과감하게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초기에 그리스도교 복음이 전파되면서, 신앙의 문제로 이혼을 당하거나 집에서 쫓겨난 여성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여자들 쪽에서 과감하게 남편과 가정을 뒤로하고, 복음 사역의 길로 나선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lt;br /&gt;&lt;br /&gt;만일 그 여인들을 단지 가부장적인 규범과 가치관에 의해 판단한다면, 그 여인들은 모두 가정을 지키지 않은 부도덕한 여인들로 정죄를 받아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역사는 실제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으로 활동했던 저 여인들과, 가정과 자녀와 자신들의 목숨까지도 뒤로 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했던 여성들에 의해 계승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오늘날과 같은 교회의 발전은 사실상 복음이 전파되던 초기부터 지금까지 자녀와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고 비난받으면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가정교회를 세우고, 교회의 주역으로 활동했던 여성들의 헌신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lt;br /&gt;&lt;br /&gt;이 설교를 맺기 전에 한 가지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게 있습니다. 나는 이 설교를 통해서 &apos;이혼한 여성&apos;을 무조건 옹호하거나 이혼을 권장하고 찬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려는 요점은 성서가 결코 이혼 자체를 간음으로 규정한 것도, 예수와 바울이 이혼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비난하고 정죄한 것도 아니며, 변할 수 없는 법칙으로 이혼 금지법을 제정한 것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가 바라는 바는 남편과 아내가 하나님의 동등한 창조물로서 &apos;한 몸&apos;을 이루어 진정으로 서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또한 바울이 원한 것도 남편과 아내가 주 안에서 참된 평화와 생명을 누리며 사는 일입니다. 그런데 만일 겉으로는 결혼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실제로는 서로를 미워하고 죽이고 싶어 한다면 그들은 헤어지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혼생활을 잘 유지한다고 자랑하는 사람일지라도 실제로는 진정한 사랑 없이, 돈과 체면 때문에 형식적인 부부 관계를 이루면서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다면, 예수는 그들이야말로 간음자와 죄인으로 규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lt;br /&gt;&lt;br /&gt;물론 우리는 마가복음으로부터, 오늘 우리 시대에서도 단지 결혼을 자신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간주했다가 그러한 기대가 어긋나면 일방적으로 하루아침에 미련 없이 상대방을 버리고 떠남으로써 제기되는 무분별한 이혼 사태에 대한 경고의 말도 듣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 이상 이혼했다는 이유만으로, 이혼한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난해서는 안됩니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선포하는 교회가 이런 저런 이유로 결혼생활을 영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멸시하고 차별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도리어 교회는 지금까지 고통에 찬 삶을 보내면서 이혼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그들을 멸시하고 죄인처럼 냉대해온 죄를 고백하며, 성서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가르침으로 이혼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아픔과 눈물을 씻어주며 생명으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동등한 창조물로 이루어진 &apos;한 몸&apos;으로서 참된 사랑과 생명과 평화의 삶을 이루어갈 수 있도록, 모든 불의한 제도와 법과 교리를 고치는 일에 앞장서 나가야 할 것입니다. &lt;br /&gt;&lt;!-- 내용이 끝나는 곳입니다.--&gt;&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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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예수 복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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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2-02-03T23:13:54+09:00</published>
      <updated>2012-02-03T23:26:24+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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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허태수 목사</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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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예수 복음&amp;nbsp;&amp;nbsp;&lt;br /&gt;막1:1-8 &lt;/p&gt;
&lt;p&gt;2009.4.26 &lt;br /&gt;&lt;br /&gt;*오늘날 종교가 개인주의화 되면서부터 온갖 용어들이 개인의 취향과 이성적인 지식의 한계안에서 설명되고 이해 되어가고 있다. 한 마디로 제 멋대로다. 그러나 우리가 &apos;한 하나님&apos;안에 있으려면 그것을 지탱하는 공통의 이해와 지식은 버리지 말아야 될 게 아닌가? 어쩌면 오늘 날은 &apos;예수의 삶&apos;을 살기보다는 그걸 바로 세워 지켜가는 일조차 버거운 상태인지 모른다. 그런 마음으로, 행여나 나는 [예수의 복음]을 바로 이해 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한 주간이었다. &apos;초기 기독교 사회사&apos;라는 책이 유용하게 작용하였다. 헛된 자기 지식을 [예수의 복음]에 끼워 놓고&amp;nbsp;&amp;nbsp;거들먹 거리지는 말아야 하리라.&amp;nbsp;&lt;br /&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lt;br /&gt;복음서 중 제일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서의 저자는 예수에 대한 그의 증언 첫 머리에 &quot;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quot;이라고 하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여기에서 &quot;예수 그리스도의 복음&quot; 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곧 ‘예수님이 갈릴리에 사는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기쁜 소식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암시하는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기쁜 소식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시간에 제한되지 않고, 갈릴리 또는 갈릴리 사람이라는 공간에 갇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인 예수의 복음은, 역사 속에서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기쁜 소식이 된다는 것입니다.&amp;nbsp;&amp;nbsp; 그러기에 우리는 2000년 전의 예수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도 거듭 재생되는 예수사건을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더러 그런 기쁜 소식을 부활하신 예수와 더불어 재창출하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lt;br /&gt;&lt;br /&gt;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기쁜 소식이란 무엇인가요? 보통 우리가 ‘기쁜 소식이다’할 때&amp;nbsp;&amp;nbsp;그것은 그 사람이 처한 형편과 요구에 따라 달라집니다. 불치병을 앓고 있는 이에게 있어서 ‘기쁜 소식’은 획기적인 치료약이 개발되거나, 그와 같은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소식이겠죠. 직장을 구하지 못한 자녀를 둔 부모에게 ‘기쁜 소식’은 뭐 별거겠어요? 예를 든다면 앞의 예가 거기에 든다는 말인데요, 이런 예는 여러분도 얼마든지 이어갈 수 있는 거 아닙니까?&amp;nbsp;&amp;nbsp;&amp;nbsp;&amp;nbsp;&lt;br /&gt;&lt;br /&gt;그러나 지금 성서가 말하는 ‘기쁜 소식’은 그렇게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희망에 대한 응답 같은 게 아니겠죠. 그렇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기쁜 소식’은 바로 [예수의 복음]입니다. 그러면 복음이 뭐냐? 고전 15:1-4은 ‘내 죄를 위해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신 예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즉 ‘복음’인데 그러므로 그냥 ‘복음’이라고 하지 않고 [예수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는 사람들이 오랜 세월동안 기다리던 일이 이루어지게 됐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일에 대한 소식’ 이것 자체가 이미 기쁨이죠?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기다렸습니까? 내용이 뭐냐는 거죠. 그것은 예수를 잉태하게 되리라고 천사가 마리아에게 알려 준 거죠.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이 땅에 오신다는 거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걸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그 소식을 듣게 된 여인 마리아는 어떻게 반응했나요? 기뻐서 노래를 불렀다고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하나도 기쁠 게 없지만,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보편다수의 역사적인 희망이었기 때문에, 그만 개인이 겪거나 치러야 할 아픔이나 수치를 넘어가 버린 것입니다. 마리아는 대신 환영의 노래를 불렀답니다. 그녀의 노래를 통해서 우리는 그녀와 더불어 유대인들이 그토록 오래 기다린 것이 무엇인지, 예수가 어떻게 그것을 이루어 가실 것인지를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를 기다렸다는 말은, 예수가 하실 일을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기쁜 소식’이란 ‘예수를 통해 일어 날 일’ 또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대행자로 그들의 삶 속에서 그들이 기대하는 일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예수 복음’입니다.&lt;br /&gt;&lt;br /&gt;여하간, 마리아가 개인적인 아픔을 넘어서면서까지 불렀다는 기쁨에 찬 환영의 노래가 어떤 것인지 봅시다. &lt;br /&gt;&lt;br /&gt;주님은 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lt;br /&gt;마음이 교만한자를 흩으셨습니다. &lt;br /&gt;권세 있는 자를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lt;br /&gt;보잘 것이 없는 이를 높이셨으며 &lt;br /&gt;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lt;br /&gt;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lt;br /&gt;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lt;br /&gt;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lt;br /&gt;&lt;br /&gt;이스라엘은 약소민족으로 많은 세월 동안 열강 사이에서 고생을 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당시도 저들은 로마제국의 억압 밑에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외식에 찬 유대교 지도자들은 백성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율법조목들을 수 없이 만들어서 백성들로 무거운 죄책감에 시달리게 했었습니다. 따라서 저들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룩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lt;br /&gt;&lt;br /&gt;바로 그런 시기에 하나님이 성육신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병자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죄인이라고 천대받는 자들을 높이셔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삼아 기쁨에 찬 새로운 공동체를 이룩하셨습니다. 동시에 그는 스스로 의인이라고 하는 자들의 가면을 벗기어 그들의 흉악함을 만 천하에 폭로하셨고, 하나님의 성전을 발판으로 횡포를 하는 대사제들을 강도의 무리들이라고 질책하시면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채찍을 들어 숙청하셨습니다. 그리면서 그는 선언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를 그들이 천대하는 세리와 창녀 같은 무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신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천대받던 갈릴리 사람들이 어찌 신나지 않았겠어요. 예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저들이 호산나를 높이 부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저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삶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lt;br /&gt;&lt;br /&gt;예수님이 이 각성한 민중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들어오자 당황한 기득권자들은 예수를 정치범으로 규정해서 십자가에 달아 처형했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안심을 했습니다. 두목을 죽였으니 따르던 무리들도 다 흩어지고 말리라고 믿은 것입니다. &lt;br /&gt;&lt;br /&gt;저들이 예상했던 대로 따르던 무리들은 혼비백산해서 도망을 쳤습니다. 예수 운동이 박살이 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며칠 지나서 저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하면서 용감하게 거리에 나타나서 부활하신 예수야말로 메시아라고 증언을 해대기 시작했습니다. 그 예수가 곧 다시 오셔서 다윗 왕조를 회복하실 것이라고 증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들을 따르는 무리들도 점점 많아졌습니다. 아무도 그 기세를 꺾을 수 없을 것처럼 부풀어가기 시작했습니다.&amp;nbsp;&amp;nbsp;&lt;br /&gt;&lt;br /&gt;그렇게 희망에 부풀어 있던 백성들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주후 66년부터 시작이 되었던 유다 독립전쟁에 종지부를 찍으려고 동원이 된 로마 군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은 점령이 되고, 성전을 완전히 초토화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독립군들도 전멸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애국적인 유대인은 물론 그리스도를 따르던 무리들 역시 철퇴를 맞은 것 같았습니다. 그들 역시 메시아왕국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룩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를 중심으로 가졌던 저들의 기대가 다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믿었던 ‘기쁜 소식’은 신기루와도 같이 사라진 것입니다. &lt;br /&gt;&lt;br /&gt;그러나 이것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교회와 그 주변에 살던 사람들의 믿음과 심정이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나서 자란, 그리고 그의 선교의 중심지였던 갈릴리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망했다고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다윗 왕국을 이룩하려고 ‘예루살렘에 오실 것’이라는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라고 저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무슨 믿음과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는 언제나 고난 받는 사람들의 무리 속에 계신다고 저들은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려면 갈릴리로 가야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생각지 않고, 되레 고난 받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면 거기에서 다시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는 하나님나라의 기적을 맛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가 얼마 동안 그들 사이에 사시면서 새로운 삶을 창출하신 것은 기쁜 소식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저들은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서 기자는 그의 기록의 제호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16장에 있는 부활기사에 보면 천사는 빈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 모두 갈릴리로 가서 거기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라고 지시하십니다. 거기에 가서 눌린 자와 같이 계시는 예수를 만나면 다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생명운동이 피어오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기득권자들의 믿음과, 갈릴리 사람들처럼 어려운 이들이 믿는 믿음이 다름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계승하고 있는 부활의 믿음은 바로 저들, 갈릴리에서 부활하시고 활동하시면서 세상 어느 곳에서나, 어떤 사람에게서나 ‘하나님 나라의 부활’을 재생산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amp;nbsp;&amp;nbsp;&amp;nbsp;&amp;nbsp;&lt;br /&gt;&lt;br /&gt;그러면 이 사람들, 갈릴리 사람들의 믿음대로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재연이 되었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지중해 연변에 있는 민중들 속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기쁜 소식이 요원의 불처럼 확산 된 것을 보아서 압니다. 지중해 연변에는 로마제국에 억눌려 신음하는 무리들로 깔려 있었습니다. 저들이 간절히 바란 것 역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예수를 통해서 발견하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확산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이 간 곳마다 다시 하늘나라의 잔치가 벌어진 것입니다. 당시 예수의 가르침을 “새로운 삶의 길”이라고 불린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종족과 종족 사이의 담도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바울을 이방을 위한 선교사로 생각하지만 바울이 가기 전에 벌서 예수의 도가 그들 사이에 확산이 돼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lt;br /&gt;&lt;br /&gt;미국에 있어서 흑인들이란 오래 동안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었습니다. 20세기 전반에 있어서도 흑인들의 인권이란 완전히 무시되고 있었습니다. 그랬는데 60년대에 이르러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중심으로 한 예수의 마음을 가진 무리들이 생명을 걸고 미국의 갈릴리로 가서 자신들을 던졌더니 예수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이 미국에서도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닙니까? 우리나라는 또 그렇지 않습니까? 양반의 자리에 나아갈 수 없고, 상놈을 면할 수 없었던 시대에, 부녀자는 사람도 아닌 것으로 여기던 시대가 아닙니까? 그런 세상에 인간 평등의 역사를 이뤄가기 시작한 게 예수의 복음이 아닙니까? 이게 모두 전 세계와 전 역사에 고루 등장하는 ‘예수 복음’의 사건 즉 예수 부활의 증거들 이라는 말입니다.&amp;nbsp;&amp;nbsp;&amp;nbsp;&amp;nbsp;&lt;br /&gt;&lt;br /&gt;예수님에게서 시작이 된 복음을 재연시키려면 갈릴리로 가야 합니다. 사람들 속으로, 고난 받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우리 주변에 있는 갈릴리로 가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고독하고 외로운 갈릴리의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날로 빈부격차가 심화되어 가는 오늘날, 치열한 경쟁에 밀려나서 의지할 바를 모르는 무리들이 방황하고 있는 지금,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기다리는 갈릴리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이와 같은 [예수 복음]이 교리화 되고 전통에 탐착하여 안일을 구하게 되면,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어떤 ‘지식’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갈릴리의 삶’을 ‘예수의 복음’으로 보지 않고, 습관적인 신앙생활에서 얻은 어떤 지식을 ‘예수의 복음’인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예수의 복음]은 종교행위의 숙달정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특별하고 독특한 개인적인 체험이 [예수의 복음]은 더더욱 아닙니다. &lt;br /&gt;&lt;br /&gt;[예수의 복음]은 갈릴리 사람들과 함께, 낮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이뤄지는 ‘하나님 나라’의 役事입니다.&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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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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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2-02-03T23:13:54+09:00</published>
      <updated>2012-02-03T23:23:46+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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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허태수 목사</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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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 &lt;br /&gt;막10:17-22&lt;/p&gt;
&lt;p&gt;2009.4.19 &lt;br /&gt;&lt;br /&gt;*이 번 주일은 [이웃초청주일]입니다.&lt;br /&gt;준비하는 이들에 의하면 20여명의 이웃들이 교회로 나오기로 약속했고&lt;br /&gt;교우들은 그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lt;br /&gt;어떤 설교를 해야 하나 기도하다가 문득, &apos;원형대로&apos; 마음을 주셨습니다.&lt;br /&gt;기본에 충실하게 예수를 전해야겠다는 뜻입니다. &lt;br /&gt;예수처럼 사는 게 &apos;영원히 사는&apos;것이기 때문입니다.&lt;br /&gt;수 십 번의 리딩과 깊은 묵상이 이어지겠지만 &apos;예수&apos;라는 결론은 같을 겁니다.&lt;br /&gt;&lt;br /&gt;&lt;br /&gt;삶이란 죽음 앞에서 가장 큰 위축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것은 죽음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어떻게 보람과 기쁨에 찬 삶을 살 수 있는가를 보여 주시는 일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과정과 십자가에 달려 죽는 상황들은 이와 같은 삶의 진리를 밝혀주는 사건이 된다는 말입니다.&amp;nbsp;&amp;nbsp;&lt;br /&gt;&lt;br /&gt;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정에 한 청년이 예수님에게 와서 절을 하면서 &quot;선하신 선생님.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quot;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quot;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하신 분은 하느님 한 분뿐이다.&quot;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 된 신이라고 믿은 예루살렘 교회의 신앙고백과는 판이합니다. 그가 죽음 앞에서도 걸으신 기쁨과 보람에 찬 삶의 길이란 우리도 걸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lt;br /&gt;&lt;br /&gt;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은 젊은이에게 &quot;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quot; 등의 율법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도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믿으라고 해야 할 것인데 예수님은 이웃을 해하지 말라는 말만을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 까닭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매우 막연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quot;주여, 주여&quot; 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그가 사랑하는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는 우리는 알게 모르게 늘 이웃을 해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이웃을 해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이 말에 대해서 이 청년은 그 것은 어려서 부터 다 지켰다고 대답했습니다. 그의 진지한 모습을 보아 이 청년은 정말 바르게 살려고 노력을 한 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대견하게 그를 바라보시면서 &quot;그러나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라라&quot;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이 청년은 울상이 되어 근심하면서 예수 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예수님이 하신 이 말의 뜻은 무엇인가요? &lt;br /&gt;&lt;br /&gt;&quot;네가 가진 부유함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quot;는 말은 &quot;그 부유함을 너 혼자 가지고 있어서는 아니 된다&quot;는 말입니다. 물질이란 골고루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혼자 지나치게 부를 독점하고 있다면 그것은 남의 것을 도적질했다는 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이 굶고 병들어서 죽었다면 그것은 네가 살인을 했다는 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네가 스스로 부자가 된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는 것이요 이웃이 가난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거짓증언을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amp;nbsp;&amp;nbsp;하나님은 부를 독점한 자를 축복하실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살면서 어떻게 기쁨과 보람에 찬 영생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니, 무엇이든지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정작 죽음 앞에서 두려움이 큰 법입니다. 물론 가진 게 없다고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apos;죽음&apos;이 상실에 대한 고통과 다르지 않다면,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 &apos;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려주라&apos;는 말씀은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청년에게 있어서는 이 말씀이 청천 벼락을 맞은 격이었을 것입니다. 세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부유해지려는 것이 삶의 목표의 인생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이 소유하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는 게 아닙니까? &lt;br /&gt;&lt;br /&gt;&quot;예수님을 따라 살아야한다.&quot;&lt;br /&gt;&lt;br /&gt;삶의 가치를 바꾸라는 말이죠. 가는 길을 수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내용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청년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quot;나를 따르라!&quot; 머리 둘 곳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기득권자들에게 미움을 당하는 그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머리를 떨어트리고 근심하면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문제는 죽음 앞에서도 두렵지 않고 되레 기쁘고 보람찬 영생을 맛보려면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의 삶이야말로 생과사의 구별 없이 기쁨과 보람에 찬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다시 한 번 음미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의 이야기 몇 가지만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lt;br /&gt;&lt;br /&gt;먼저 요한복음서 4 장에 있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수가성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몹시 시장하고 피곤하셔서 언덕 위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에 주저 않으셨습니다. 그리자 제자들은 수가 성에 먹을 것을 구하려 들어갔습니다. &lt;br /&gt;&lt;br /&gt;그 때 한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피곤한 발을 끌고 우물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을 본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삶의 깊은 문제가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반발을 하는 그 여인과 대화를 계속해서 결국 그 여인으로 하여금 삶에 새로운 소망을 가지게 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여인은 너무나 감격해서 이 이야기를 전하려 물동이와 두레박도 잊어버리고 동리로 달려갔습니다. 이 모습을 본 예수님의 얼굴에는 보람찬 웃음이 환히 꽃피었습니다. &lt;br /&gt;&lt;br /&gt;그 후 먹을 것을 구하려 동리로 갔던 제자들이 돌아와 봤더니 그렇게도 시장하셨던 예수님은 미소 먹은 얼굴로 앉아 계시는데 그 얼굴엔 피곤한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놀라서 &quot;누가 선생님께 잡수실 것을 드렸습니까?&quot;하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예수님은 &quot;나에게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이 나의 양식이다&quot;라고 말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 그의 양식이었다는 말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라도 삶의 방식을 바꾸고 그로 인해 생기 있어 지는 게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amp;nbsp;&amp;nbsp; &lt;br /&gt;&lt;br /&gt;삭개오라는 세무 공무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키가 아주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보면 신체불구자들이란 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죄인들입니다. 그러기에 삭개오는 어려서 부터 사람들과 사회로부터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그러니 그런 세상을 향한 삭개오의 원한은 이만저만이 아니었겠죠. 결국 삭개오는 세무 공무원이 되어 유대인들에게서 세금을 짜냄으로 복수를 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결국 그는 세무서장이 되어 적지 않은 힘까지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부와 힘을 아울러 갖게는 되었지만 그러나 마음은 외롭기가 그지없었습니다. 돈과 권력이 있어도 인간으로 존경을 받지 못하는 삶을 살 게 될 때 그것은 더욱 큰 내면의 고통이 되었을 것입니다.&amp;nbsp;&amp;nbsp;&lt;br /&gt;&lt;br /&gt;그러던 어느 날 삭개오는 그 동리로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삭개오는 소문을 통헤 미리 그가 있는 동네에 오시는 예수가 &quot;세리와 죄인의 친구&quot;라고 불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삭개오는 그런 예수님을 한 번 만나고 싶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먼발치에서라도 뵙기나 하려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데다가 키가 작은 그로서는 예수님을 보는 것조차 용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세상 사람들의 눈에 떠밀려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 앞으로 나설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길가에 있는 뽕나무 위에 기어올랐습니다. 먼발치에서 예수님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가슴은 뛰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가 올라가 있는 나무 밑으로 오시더니 삭개오를 쳐다보면서 &quot;삭개오야.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너희 집에 머물겠다.&quot;고 부드럽게 말씀하시는 게 아니겠어요? 당시대엔 그런 죄인의 집에 예수님이 머무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리들의 비방소리도 들은 척 만 척 삭개오의 집에 가서 같이 식탁에 앉으셨습니다. 감격에 차서 예수님을 대접하던 삭개오는 식사가 끝나자 일어서서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lt;br /&gt;&lt;br /&gt;&quot;나에게 있는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토색한 것이 있으면 네 배나 갚아 주겠습니다.&quot; &lt;br /&gt;&lt;br /&gt;이것을 보신 예수님의 얼굴에는 다시 웃음의 꽃이 피었습니다. 이런 장면은 필시 예수님이 아니더라도 흐뭇해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만이 아닙니다. &quot;오늘 너희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quot;고 까지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감정적인 기쁨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예수님의 마음에 넘쳤다는 증거 아니겠어요?&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lt;br /&gt;&lt;br /&gt;예수님의 삶은 굽이굽이마다 이런 보람찬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짧은 몇 년의 공생에는 주로 이런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그리다가 그는 그가 걸으신 길이 진정으로 참 삶의 길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사셔서 하루에 삼천 명 씩 새 삶의 길로 돌아오게 하는 놀라운 기적을 이룩하셨습니다. 이 부자 청년이 예수님의 뒤를 따랐다면 이것을 삶으로 경험하고 참된 영생의 길에 들어섰을 것입니다. &lt;br /&gt;&lt;br /&gt;청년이 머리를 떨어뜨리고 돌아가는 것을 보신 예수님은 쓸쓸한 음성으로 &quot;부자가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quot;라고 한탄하셨습니다. 이것을 들은 제자들과 주변 사람들이 놀랬을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요즘도 복권에 당첨되어 갑자기 부자가 되거나 산삼을 캐면 뭐라고 그럽니까? 기도를 해서라든지, 돌아가신 아버지가 점지를 했다든지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처럼 그때도 부자는 하나님이 복을 내려서 그렇게 되었다고 여기던 시절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apos;나도 그런 부자가 되었으면&apos; 하고 기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저들이 부유를 독점함으로 많은 사람들을 굶고 병들어 죽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면서도 자기들이 선하신 하나님의 자녀이라고 주장하면서 남을 정죄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 사실을 지적하는 자들을 불온한 사람이라고 정죄하고 처벌을 한 것입니다. 돈과 권력에 마음이 굳어진 저들에게는 약한 자의 몸부림도 아우성 소리도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저들은 허위의 탈을 쓰고 허세를 부리다가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망한 것이 그 좋은 예라 하겠습니다. &lt;br /&gt;&lt;br /&gt;예수님을 따라 살아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뒤를 따라 살면&amp;nbsp;&amp;nbsp;그가 하신 것처럼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생명을 살리는 삶을 통해 그것과는 다른 어떤 삶보다 기쁨과 보람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심지어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amp;nbsp;&amp;nbsp;그렇습니다. 요한복음서 14장 12절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인류 역사를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서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 줌으로 위대한 일들을 했습니까? 이런 생명을 살리는 보람찬 삶, 영원한 가치가 있는 삶이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기를 던져서 그리스도와 같이 남을 섬기는 일에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amp;nbsp;&amp;nbsp;&amp;nbsp;&amp;nbsp;&lt;br /&gt;&lt;br /&gt;우리가 모두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힘으로 그리스도처럼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생명은 주께 있습니다.&amp;nbsp;&amp;nbsp;&lt;br /&gt;&lt;/p&gt;&lt;!-- 내용이 끝나는 곳입니다.--&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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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어떤 부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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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2-02-03T23:13:54+09:00</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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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허태수 목사</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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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어떤 부활&lt;br /&gt;막16:5-7&lt;br /&gt;2009.4.12 &lt;br /&gt;&lt;br /&gt;그리스도교 신앙은 부활절을 기점으로 합니다. 즉 그리스도교 신앙은 유대교를 개혁하고 갱신한 게 아니라 &apos;부활절&apos;을 기점으로 독자적으로 성립된 종교라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예수의 부활이 역사 속에서 &apos;유일무이한 사건&apos;이라는 교리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유일무이한 사건은 &apos;하나님의 의지&apos;에 의한 소산이라고 믿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이 위대한 사건이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절 신조는 기나긴 역사를 갖는 동안 그리스도교의 전통의 핵을 이루고 있습니다. 요컨대 교회의 신앙고백에 익숙한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위에서 말한 부활절 신학을 신앙의 본질로 인지하게 됩니다. 만약 자의적으로 그런 고백을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저절로 교회안에서 그런 강요를 받게 됩니다.&lt;br /&gt;&lt;br /&gt;그런데 이러한 부활신앙의 무의식은 그리스도인에게 세계에 대한 &apos;무관심, 무배려&apos;의 태도를 낳을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의 부활은 유일무이하니까, 역사 이전에도 이후에도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테니까, 부활이라는 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역사적인 문제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더욱 이 유일무이한 사건에 개입할 자격이 잇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인해 신앙 안에서 역사의 현안을 담아내려는 일체의 인간적 의지를 말살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감독회장 문제로 불거진 감리교 사태가 이번 고난 주간에도 더욱 혼탁의 농도를 더하게 된 근저에는 바로 이런 &apos;부활 이해&apos;가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안을 담아내려는 의지가 결핍된 결과입니다. 물론 어느 곳에나 예외가 있듯이 이런 신조 속에서도 역사적 실천에 깊이 연루된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해 온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정통 그리스도교의 주류는 대체로 자기시대의 역사적인 문제로부터 벗어난 신학적 . 신앙적 세계관을 형성해 왔습니다. &lt;br /&gt;&lt;br /&gt;이게 여기서만 끝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런 세계에 대한 무배려나 부관심의 신앙적 태도는 자신의 삶에 &apos;부활신앙&apos;을 연결하는데 어려움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apos;그 때 거기서&apos; 오직 &apos;단 한 번&apos; 일어난 사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 삶 속에서는 &apos;그때 거기&apos;에서 같은 생생함으로 결코 재생될 수 없으니까 문제지요. 그것은 &apos;지금 여기&apos;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향해 하소연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단지 옛날 얘기만을 회고하는 것으로밖에는 대답하지 못하는, 그리하여 우리의 삶에 체현되는 그 부활이 아니라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무관한 &apos;어떤 부활&apos;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의 부활은 예전 속에서 의례로만 남아 있는 오래된 유골이 되는 것입니다. &lt;br /&gt;&lt;br /&gt;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지 3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30년 뒤에도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늘 다시 살아납니다. 1997년 복제인간 이야기가 한창일 때 어느 기관이 조사를 했습니다. 복제가 가능해진다면 과연 누구를 복제하면 좋을까 하는 그런 질문이었습니다. 1위가 누군지 아시지요? 그렇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생가로 가서 죽은 그가 나눠주는 &apos;생기&apos;를 받아먹는다고도 합니다. 그는 &apos;그때 그 사람&apos;아니라 &apos;지금 여기&apos;살아나서 사람을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박근혜의 영향력은 대단하다고 합니다. 그녀의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 졸졸 따라다니는 사람이 수명씩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게 모두 그녀의 아버지가 딸에게 다시 태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세례요한의 얼굴로 태어난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그는 죽었지만 그의 이미지는 살아서 활동하고 있잖아요? 그는 죽었지만 그의 이야기는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개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속편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는 생물학적으로는 죽었지만 그의 사건은 지금도 사람들의 삶과 가슴에 부활하여 강력한 생명력을 역사 속에 또는 추종자들의 삶속에 펼치고 있습니다. 미국은 링컨이거나 케네디 같은 이들이 그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가수나 배우 또는 운동선수를 통해 이런 경험들을 넓혀갑니다. &lt;br /&gt;&lt;br /&gt;엊그제 임마누엘 교회에 모여 억지로 총회라는 걸 열면서 소란을 떤 일단의 감리교 목사들과 장로들이 과연 &apos;예수님의 부활&apos;사건을 &apos;지금 여기&apos;에 다시 재현되는 사건으로 받아 들였다면 그럴 수 있겠어요? 교회가 개인으로나 공동체로서 행하는 온갖 악한 일들도 &apos;예수님의 부활&apos;을 &apos;그때 그 사건&apos;으로 끝내놓고 살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정말 여기서 지금도 부활의 사건이 발생한다고 믿는다면, 그런 부활 신앙을 갖고 있다면 그럴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오직 예전을 행할 때만 &apos;부활&apos;을 믿고 있습니다. 부활절이나 되어야지 아버지 생일 차리듯 &apos;부활&apos;을 기념합니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지금 우리들의 역사 속에선 개인에게나 공동체에 아무런 영향력도 파급력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예전으로만 &quot;싸움은 모두 끝나고 생명의 승리 얻었네. 개선가 높이 부르세 할렐루야!&quot;(찬송가 156장)라고 소리 높여 찬송하는 주인공 예수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박정희 전 대통령은&amp;nbsp;&amp;nbsp;&lt;br /&gt;예전과 찬송은 그리 확고하지 못하고 드높지 못하지만 계속해서 역사와 사람 속에서 후속 사건들을 일으키고 있지 않습니까? 비록 그 사건을 예수의 부활 사건과 비교하려는 자체가 모순이 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lt;br /&gt;&lt;br /&gt;전 대통령 박정희 부활신화는 유일무이한 사건이 아닙니다. 한 번 일어나고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역사의 구체적인 상황 속으로 개입해 들어가고, 끊임없이 그 상황의 계기를 이루는 역사의 구체적인 인물 속에서 다시 태어납니다. 설사 부활할 만한 상황이 없어도 그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잠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매일매일의 일상 속에서 한없는 그리움의 대상으로 자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는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30년이 지난 지금도 다시 태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이때 만남은 그가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개입해 들어감으로써 이루어지죠. 사람들을 거룩한 성소로 불러내는 종교와는 달리, 역사를 외면하고 따로 골방으로 불러내는 게 아니라 사람들 자신이 살고 있는, 그들의 현장속으로 헤집고 들어가 사람들과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apos;예수 십자가의 부활&apos;을 믿는 우리네 부활과, 시속의 현장에서 거듭거듭 박정희 전 대통령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저들 속에서 일어나는 부활과 다른 점입니다. 지금 산 사람이 죽은 사람에게로 걸어 들어가 만남으로 그들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현장속으로, 사람들의 모든 사건 속에서 그는 부활신화의 주인공으로 그 사건들과 결합함으로 사람들에게 희망을 갖게 합니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희망을 불어 넣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황우석 박사에게 희망을 거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가 아무리 나쁜 사라이라고 해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가 죽어도 그에게 희망을 걸고 살 겁니다.&lt;br /&gt;&lt;br /&gt;유일무이한 사건, 오직 예수만이 가능한 사건, 그것이 부활사건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인류역사상 단 백만분의 일초만 살았다가 죽은 인간이 있다고 해도 모든 인간은 생물학적 형질상으로는 유일무이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존재가 &apos;유일무이하다&apos; 또는 &apos;그의 죽음과 부활은 유일무이한 사건&apos;이라고 할 때, 단순히 생물학적인 의미로 30여년을 &apos;살다가 죽었다&apos;는 것으로는 결코 사람들에게 기억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에게 그런 이미지는 백만분의 일초를 살다가 죽은 사람과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30여년의 시간의 길이가 2천년이나 지난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apos;유일무이사건&apos;이라고 주장하는 기독교 교리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미지가 끊임없이 구체적인 역사적인 사건으로, 그 역사적인 사건들이 뿌리를 내리고 우리들의 삶에 재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lt;br /&gt;&lt;br /&gt;이것이 마가복음이 전하는 올바른 부활의 논리이며 이해입니다.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십자가 위에서 처형을 당했지만, 그 때 그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야기가 &apos;지금 여기&apos;서 사람들에게 여전히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싸늘한 주검이 되어버렸지만, 예수님의 생명력은 제2, 제3의 예수를 통해 계속 역사의 무대 위에 살아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물학적으로 단지 한 사람의 사람이었으나, 예수님의 생명력은 역사 속에 살면서 예수님을 그리워하고 희망의 원리로 기억하고자하는 모든 사람들을 통해 부활하여 역사를 창조하는 새 힘, 새 근거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래서 우리들의 삶의 현장, 역사의 현장에서 &apos;지금&apos;도 &apos;내일&apos;도 계속되는 것입니다. 부활은 예전이나 기념이 아닙니다.&lt;br /&gt;&lt;br /&gt;기독교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quot;너희들은 해골을 숭배하는 예전주의적 종교&quot;라고 말입니다. 사실 그동안 &apos;예수님의 부활&apos;이 교회 안에서, 예배형식을 통해서만, 성직자의 예전을 통해서만 전통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더 이상 교회는 부활사건을 이어가지 못하는 게 사실 아닙니까? &lt;br /&gt;&lt;br /&gt;막16:5-7&lt;br /&gt;&lt;br /&gt;이 구절은 예수의 부활에 관한 가장 오래된 전승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 부활의&amp;nbsp;&amp;nbsp;목격자들은 &apos;여인들&apos;로 나옵니다. 성서시대의 여자들이 어떤 격을 갖고 살았는지 아시지요? 사람축에 들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여인들은 그래서 법정의 증인이 될 수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일상의 살에서도 증인이 될 수 없었던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인하는 유일한 목격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증인으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마치 누가복음이 예수님 탄생의 목격자를 가장 천대받던, 그래서 증인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던 &apos;목동&apos;으로 묘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그녀들의 부활 목격담이라고 하는 것도 고작 &apos;빈 무덤&apos;을 보았다는 것뿐이지 않습니까? 뭐 6하 원칙 이란 것도, 그것을 증빙 할 만한 자도 없습니다. 그녀들의 목격을 목격한 증언자도 없습니다. 의학적인 설명은 더더욱 가능하지 않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그런 의심 가는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읽은 가장 오래된 성서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고 있습니다.&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lt;br /&gt;&lt;br /&gt;오직 본문이 담고 있는 것은 흰 옷 입은 한 청년이 여인들에게 이렇게 얘기 했다는 것뿐이죠. &quot; 그 분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다.&quot; 이 &apos;갈릴리&apos;는 세례요한이 체포되었을 때도 예수님이 거론 하신 장소입니다. 그때도 예수님은 갈릴릴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나라 사건을, 고향에서 실종되었던 하나님 나라의 사건을 계속 일으키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예수를 보고 &apos;요한이 다시 살아났다&apos;고 하면서 &apos;요한의 부활&apos;을 생각 했다는 것입니다(막6:1-). &lt;br /&gt;&lt;br /&gt;예루살렘에서 처형당한 예수님, 그러나 이제 그분의 사건은 그때처럼 다시 갈릴리에서 불붙게 될 겁니다. 예수님의 고향이 있고, 가족이 있고, 청중이 있는 곳,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전히 살아 있는 곳, 그곳에서 예수님의 사건이 계속될 거라는 주장인 겁니다. 이것이 마가복음이 전하는 [예수의 부활]입니다. 사실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아직 기독교가 예전이 되어서 교회 안에 갇혀 버리기 이전에, 초기 기독교 전승자들, 바울이나 베드로와 같은 전도자들은 그들의 삶을 통해 예수의 부활을 다시 세상에 보여주며 살지 않았습니까? 그 사람들을 보는 것은 곧 예수를 보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전도 전통도 없었지만 부활하신 예수와 같은 삶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처럼 세상을 활보하고 있었습니다. 인간 삶과 역사의 현장에서 체현되는 &apos;예수의 부활&apos;이었다는 말입니다. 마가는 이걸 말하려고 하는 겁니다. 이걸 &apos;예수의 부활&apos;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lt;br /&gt;&lt;br /&gt;우리가 믿고 기리는 예수의 부활은 이 땅위에서, 예수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가슴과 삶 속에서 &apos;그때 그 사건&apos;을 &apos;지금 여기&apos;서도 계속 이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의 부활은 이것입니다.&lt;br /&gt;&lt;!-- 내용이 끝나는 곳입니다.--&gt;&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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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예수가 온다, 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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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2-02-03T23:13:54+09:00</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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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허태수 목사</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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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예수가 온다, 왜?&amp;nbsp;&amp;nbsp;&lt;br /&gt;눅3:4-6&lt;br /&gt;2009.4.5 &lt;br /&gt;&lt;br /&gt;고대 이집트는 이미 주전 5천 년 전부터, 바벨론은 주전 3천 년 전부터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거대한 제국체제의 희생자들이었습니다. 가장 밑바닥에서 강제노역으로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집트를 나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독자적으로 공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건설한 나라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apos;왕이 없는 사회&apos; &apos;계급이 없는 사회&apos;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를 사사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한 명칭이 아닙니다. 잘못하면 &apos;왕&apos; 대신 &apos;사사&apos;라는 계급이 통치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pos;사사&apos;는 통치자거나 계급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이 시대를 [평등사회]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합니다. &lt;br /&gt;&lt;br /&gt;사사는 세습되지 않고 특정 계급을 이루지도 않습니다. 그 사회의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문득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리고 일을 모두 해결한 후에는 곧 바로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그것이 사사입니다.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아버지의 공을 힘입어 자신이 스스로 왕이라고 칭했던 적이 있습니다. 아비멜렉이란 문자적 의미는 &apos;나의 아버지 왕&apos;이란 뜻입니다. 그는 자신의 형제들을 살해하고 자신이 왕으로 군림하려고 이 평등사회를 엎어버렸습니다.&amp;nbsp;&amp;nbsp;그는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아버지 기드온의 후광을 힘입어 자신의 왕국을 꾀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한 여인이 던진 맷돌 조각에 맞아서 숨지게 됩니다. 그렇게 그 일은 끝납니다(사사기 9장). &lt;br /&gt;&lt;br /&gt;그리고 그 일을 교훈 삼으려고 이야기를 꾸며 대대로 전승을 했습니다. 그게 사사기 9:8-15에 나오는 &apos;왕을 비웃는 가시나무 설화&apos;입니다. 하루는 나무들이 자기들의 왕을 세우려고 올리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에게 가서 왕이 되어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이들 각자는 &apos;기름을 내고 열매를 맺어야 하는 일을 어찌 놔두고 다른 나무들 위에 날 뛰겠느냐&apos;며 그 청을 거절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 아무 쓸모없는 가시나무에게 가서 왕이 되어달라고 하니 &quot;너희가 정말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너희의 왕으로 삼으려느냐? 그렇다면 와서 나의 그늘 아래로 피하여 숨으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가시덤불에서 불이 뿜어 나와서 레바론의 백향목을 살라 버릴 것이다.&quot;하고 위협하며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lt;br /&gt;&lt;br /&gt;이것은 아이들이 부르는 동요 같은 고대의 노래인데 여기서 왕은 아주 우스운 존재로 묘사되어 있죠? 이스라엘이 후에 왕정을 거치면서도 이런 노래들이 아직 살아있어 성서 안에 남아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이 이룩한 평등사회는 계급적 왕권사회로 부터의 강력한 부정이며 동시에 대안적 사회였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전반에는 이런 평등시대(사사시대)에 대한 전통이 강력하게 살아있습니다. &lt;br /&gt;&lt;br /&gt;후에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자 사무엘은 &apos;왕을 세우면 너희의 아들, 딸들을 잡아가 군사와 궁녀로 만들며, 네 소득의 십일조를 거두어 가고, 결국 너 까지도 노예로 삼을 터인데 왜 왕을 요구하냐&apos;며 반대합니다(삼상 8,10-18 ; 12,19). 이렇게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왕이 없는 사회는 인류가 아직 왕정을 경험하기 전에 부족시대로부터 왕정으로 넘어가는 자연스런 역사의 발전과정 중에 생기는 단순한 역사발전의 흐름만은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이집트라는 거대한 제국의 희생자였고 그 한 복판에서 살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제국에 대한 반동으로 계급이 없고, 불평등이 없는 이상적 형태의 공동체 건설이 바로 [출애굽 공동체]였습니다. &lt;br /&gt;&lt;br /&gt;구약성서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바로 출애굽 사건입니다. 성서는 계속 반복적으로 &quot;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노예 되었던 때를 기억하라&quot;고 하며 출애굽 사건을 회상시킵니다. 열 가지 재앙, 바다를 가른 이야기, 구름기둥, 불기둥, 만나 메추라기의 기적들과 무용담들이 성서 전반에 걸쳐 원초적 해방의 경험으로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불붙는 가시덤불 속에서 모세를 부르시어 중대한 사명을 주십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야훼]로 계시하시며 &apos;가서 내 백성을 구하라!&apos;는 명령을 하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의 노예들을 &apos;내 백성&apos;이라고 일컬으시며 &apos;그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내게 들렸다&apos;고 하셨습니다. 구약성서는 바로 이 야훼께서 자기백성이라고 동일시하신 노예들을 이끌어 가나안이란 땅을 주시고 그들에게 새로운 나라를 세워 주시는 이야기입니다.&amp;nbsp;&amp;nbsp;&lt;br /&gt;&lt;br /&gt;고대 종교가 가지는 사회적 기능은 한 사회의 체제를 유지해 주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이었습니다. 왕을 정점으로 시작하여 귀족, 평민, 노예 등으로 이루어지는 계급적 피라미드를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는 무력과 군사적 강제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정신적 작용, 이데올로기적 기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왕은 신의 아들로, 노예들은 신에게 저주받은 존재로 그들의 계급적 차별을 천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자포자기하게 만드는 기능을 종교가 감당했던 것입니다. &lt;br /&gt;&lt;br /&gt;또 한편 최고 정책결정자인 왕의 정책을 신의 뜻으로 받들어 지지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가령 왕이 전쟁을 결정하고 선포하였으나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다면 곤란한 일입니다. 이때 왕의 결정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게 해서 모두가 따를 수 있게 하는 역할을 종교가 감당하였습니다. &lt;br /&gt;&lt;br /&gt;또한 종교적 헌물을 통하여 왕실의 재산을 확보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람이 열(10)을 생산한다고 가정 하고요, 여기서 인간이 생존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양이 여섯이라고 하면,&amp;nbsp;&amp;nbsp;나머지 넷이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물질적 부분입니다. 바로 이것을 누가 차지하느냐 하는 것이 인류역사의 계급적 갈등의 내용입니다. 고대사회에서 왕이나 귀족들은 대개 1/10세를 받아갔는데 그것만으로는 확대되는 행정수요를 감당할 길이 없어 민중에게 과도한 짐을 부과하기 마련인데 이것이 지나치면 반란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것을 무리 없이 거두어들이는 기가 막히게 좋은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자발적인 헌납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적 헌납이라는 것은 지배권력이 선호하는 방법이었고 동시에 백성을 가난한 상태로 묶어놓아 왕의 통치를 용이하게 하는 부수적 효과를 가져 오게 합니다. 이런 것이 고대 종교의 사회적 기능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고대사회에서 성전과 신전은 왕실의 재산을 관리 보전하는 일종의 금융기관과 같은 역할을 하였으며 왕실의 재산 창고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lt;br /&gt;&lt;br /&gt;이러한 종교의 기능은 인간의 행복, 평등, 인권에 역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맑스는 이러한 종교의 기능을 보고 &apos;종교는 아편이라&apos;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 인류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종교가 탄생하였습니다. 스스로를 노예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그들을 위하여 해방의 사역을 감당하시는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의 출현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이제까지 인류가 가져보지 못한 새로운 종교였습니다. &lt;br /&gt;&lt;br /&gt;모세는 파라오에게 가서 다음과 같이 요구하였습니다. &quot;히브리 사람의 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으니, 이제 우리가 광야로 사흘 길을 걸어가서, 주 우리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하니, 허락하여 주십시오.(출3,18)&quot; &lt;br /&gt;&lt;br /&gt;모세가 파라오에게 요구한 것이 무엇인가요? 새 민족을 세우겠다고 했습니까? 독립을 달라고 했습니까? 새로운 땅을 차지하겠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감히 노예들이 어찌 그런 주장을 펴겠어요? 단지 자기들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으니 사흘 말미를 달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얼핏 보기에 별로 대수롭지 않은 주장 같습니다. 그런데도 파라오는 그것을 계속 거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놀라운 주장입니다. 그 당시 종교는 전부 체제유지의 기능, 지배자의 통치를 위해 복무하는 기능을 가질 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역시 이집트에서 궁전이나 피라밋과 같은 건축에 동원된 노예들이었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밋이 무엇인가요? 왕의 무덤입니다. 왕 하나의 영혼불멸을 위해 20만 명의 노예가 20년 동안 죽어라 일해야 세워질 수 있는 건축물입니다. 한 사람의 영혼불멸을 위해 노예 20만 명이 희생당해야 하는 종교! 이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이것은 사기입니다. 그렇다고 아무도 피라밋에서 걸어 나온 왕도 없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허구의 종교, 무덤의 종교로부터 나오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quot;우리 노예는 너희들이 믿는 그런 신들을 거부한다.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을 따로 섬기겠다.&quot;는 것이었습니다.&amp;nbsp;&amp;nbsp;&lt;br /&gt;&lt;br /&gt;이것은 대단한 선언입니다. 놀라운 역사의 변동입니다. 감히 노예들 주제에 자기들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니요? 일찍이 노예들이 독자적으로 종교를 가져본 적이 있는가요? 이것은 너희들 왕과 귀족들이 세워 논 거짓종교를 부인하고, 새로운 종교, 새로운 세계를 세우겠다는 참 하나님의 의지였고 실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모세를 통해 이뤄 내셨습니다. 스스로를 하층민, 노예의 하나님으로 자처하는 신, 노예와 하층민이 섬기기 시작한 새로운 의미의 종교는 인류의 역사가 경험하지 못한 혁명적 종교였습니다. 인간의 불평등과 계급, 신분적 차별의 벽을 허물어 가는 새로운 평등 종교의 출현이었습니다. &lt;br /&gt;&lt;br /&gt;오늘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이 물음에 답을 하기 위해 구약의 긴 설명을 했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이 선포의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누구나 [예수]라고 적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말 세례요한의 선포처럼 예수님이 왕의 행차처럼 당당하고 위엄 있게 우리에게로 오셨다고 생각해 봅시다. 물론 주인공다운 등장이긴 합니다. 전능하신 절대자의 아들다운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이런 예수님과 세상의 권력자와는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헤롯의 권세와 다를 바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권력에 굶주린 정복자와 무엇이 다릅니까? 이처럼 성서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위엄 있는 권력자의 모습을 한 예수로 답을 쓰는 것은, 세상을 지배하는 질서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apos;아버지의 이름&apos;을 흠모하고 동경하는 까닭입니다. 그렇게 되고 싶어하는 욕망 때문입니다. &apos;아버지의 이름&apos;은 안정과 영원을 상징합니다. 아버지를 부정하는 것은 새로운 것을 찾아가겠다는 것이고, 아버지의 이름을 인정하는 것은 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갖는 힘에 의존하겠다는 것이고, 그 힘을 증여 받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부권의 상징입니다. 사람을 지배하고 부리는 매력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누가복음 본문의 주인공을 [예수]로 쓴다는 것은 예수에게서 &apos;아버지의 이름&apos;또는 &apos;부권&apos;으로 상징되는 세상의 힘을 바라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정말 예수가 그런 존재로 이 세상에 오신 걸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apos;변화와 청산을 갈구하는&apos;백성들의 바램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사람들의 생명을 부리는 태산 같은 권력의 횡포 앞에 무력한 사람들을 향해 예언자가 선포하는 것입니다. &quot;산이, 그 도도함이 눕혀질 것이다.&quot; 아버지의 이름 앞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향한 선언입니다. 예수를 말하고는 있지만, 참된 주인공은 바로 위아래가 없는 세상, 누가 누구를 부리고 부림을 당하는 삶이 아닌 변화의 평등 세상을 바라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lt;br /&gt;&lt;br /&gt;우리는 지금 예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활절에는 &apos;예수가 다시 오셨다&apos;고 할 겁니다. 그러나 그 예수가 어떤 예수냐 하는 걸 미리 확인해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주간을 잘 지켰는지 뭐 그런 것 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말입니다. 구약성서의 역사와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성서의 본문을 통해 볼 때 예수님은 세상의 힘에 의해 차별화되고 계급화된 것들을 파괴하며 모든 인간이 평등해지는 세상을 위해 오십니다. 함께 더불어 행복한 삶을 살도록 오시는 겁니다. 이것을 바로 알고, 이것을 기대하며, 변화를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 본문의 주인공들이기 때문입니다.&amp;nbsp;&amp;nbsp; &lt;/p&gt;&lt;/div&gt;</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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